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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그래서 나는 사는 게 좋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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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민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4-22 15:18 조회1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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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미했으나 과정은 ‘창대’했다(4)
​(병과 ‘싸운’ 10년 ; 1978년~1987년)


그래서 나는 사는 게 좋았는지도……

오창희

흔히들 오랜 세월 병에 시달리며 산 사람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내리 즐거워만 하기도 어렵지만 온통 고통 속에서 살기만도 어렵다. 만약 누군가 주야장천 힘들기만 했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는 저마다의 환경에 따라 순간일망정 아픔을 잊게 하는 아주 작은 즐거움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니하고 내하고 같이 죽자”

처음 2~3년은 통증이 무척 심했다. 하룻밤만이라도 두 다리를 쭉 펴고 통증 없이 자는 게 소원이었다. 그때 내가 떠올린 건 팔다리가 분리되는 인형. 잠 잘 때만이라도 팔다리를 떼고 편안히 자고 싶었다. 여름, 특히 장마철이 견디기 힘들었다. 날이 흐리고 기압이 낮아지면 관절 통증은 배가 된다. 39도를 오르내리던 열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오한이 들어 한여름에도 내복에 긴 팔 티셔츠를 입고 양말을 신고 지냈다. 물론 난방도 하고 잤다. 밤이 되면 통증 때문에 숙면을 취하기도 힘들었고, 한 자세로 조금만 있으면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불을 끌어 덮을 수도 없고 돌아눕는 것도 힘들었다. 어머니가 팔을 들어서 옮겨 주고 이불도 다시 덮어 줘야 했다. 유독 땀이 많으신 분이라 미닫이문을 열어둔 채 내 방 밖에서 주무셨다. 곤히 주무시는 어머니를 깨우는 게 미안해서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면 작은 소리로 ‘엄마~’하고 부른다. 한 번 불러서 깨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깊은 잠에 빠져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조금씩 목소리를 크게 하면서 조심조심 어머니를 불렀다. 그럴 때면 밤은 왜 그리도 긴지, 왜 그리 목은 마르며, 소변은 왜 또 그리 보고 싶은지…….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 바람결에 닫히는 문소리에도 내 몸은 통증에 진저리를 쳤다. 숟가락질도 못하는 날이 많았고, 파리와 모기를 쫓기도 어려웠다. 얼굴에 파리나 모기가 앉으면 안 돌아가는 고개를 겨우 돌려가며 쫓아보지만 잠깐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와 앉는다. 그러면 입의 각도를 요리조리 바꿔가며 방향을 조준하고 숨을 들이마신 뒤 프흐~~하고 입김을 날린다. 그러고 나면, 파리란 놈은 염치도 없이 날아가는 척, 엉덩이만 살짝 뗐다가 바로 내려앉는다. 그 얄미움이란. 그러나 뒤끝은 없다. 그러나 모기란 놈은 한 번 쫓고 나면 한참은 돌아오지 않는다. 얼핏 보면 염치가 있는 듯하지만 뒤끝 작렬. 가려운 곳을 긁지 못하는 그 괴로움이란! 이마가 가려운데, 아무리 용을 써도 누운 채로는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으니! 중력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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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 해(80년 아니면 81년) 봄, 그 당시는 어머니가 대소변을 받아내던 시절이었다. 대구 동촌에 살았는데 그 부근에 경상도에서는 흔히 거랑이라고 부르는 큰 내[川]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큰물이 져서 천방(川防)까지 물이 차는 그런 곳이다.

그해 봄, 며칠간 봄비가 제법 내린 어느 날, 어머니가

“동촌 거랑에 큰물 나가드라. 거기 니하고 내하고 가서 빠져 죽자. 니 혼자 죽으라 카면 죄 많고 내하고 같이 죽자. 이래 고생시리 사니 죽는 게 안 나을라.”

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죽고 싶으면 엄마나 가서 죽어라. 나는 이래도 사는 게 좋다.”

한참 뒤, 어머니가 그러셨다. “그 때 니 혼자 집에 두고 다니는 게 영 불안했다”고. 어머니는 그 시절 여기저기 약을 구하러 다니거나 볼일을 보러 다니느라 집을 비울 때, 혹시라도 내가 나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게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 속을 떠보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였는데, 내가 어머니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그 이후로는 안심하고 다니셨단다.

당시에 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든가 ‘어쨌든 이 고난을 견뎌야 한다’든가 하는 ‘나름의 철학을 세우고 확고한 투병 정신’으로 견디어낸 건 아니었는데……. 그냥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돌이켜 보면, 죽고 싶을 만큼 안 아팠던 건가 싶기도 하고, 순간순간 엄습해오는 고통을 견디는 것만도 힘이 들어서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같고, ‘사람이 어떤 경우에라도 살려고 하면 다 살게 마련’이라는, 어릴 적부터 엄마가 하시던 말씀에 세뇌된 탓인 듯도 하고, 아침마다 좀 어떠냐는 아버지의 걱정 어린 물음에 거짓말은 아니면서도 뭔가 보답하는 차원의 대답도 궁리해야 하고, 방문객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똥오줌을 적절한 시간에 스타일 구기지 않고 눌 것인가(이야말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나으면 무얼 해서 먹고 살 것인가도 연구해야 하는 등, 날마다 부딪치는 ‘실존적’ 문제가 산적했기에 실존 그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는 죽음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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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서 또는 멀리서 나와 함께 했지만 내 안에 들끓고 있는 복잡다단한 심사를 맘껏 나눌 상대는 없었다. 당시 일기장을 보면 누군가와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싶다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 당시 읽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수없이 반복해서 읽은 책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언제부터 이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한용운의 시에는 일기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감정들이 다양한 언어로 담겨 있었다. 특히 우울하거나 마음이 가라앉을 때면, 여성 화자의 목소리에 마음을 실어 여든 여덟 편의 시를 큰 소리로 주욱 낭송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힘이 솟았다.


독서를 일상으로 삼기 시작한 건 대구 파티마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부터였다. 책은 일요일마다 병실을 순회하는 이동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어선지 종교 관련 서적들이 많았다. 『천국의 열쇠』,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 이해인 수녀의 시집. 퇴원을 해서도 주로 신앙 서적을 읽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녀, 소화 데레사』, 『다미안 신부』, 『무상을 넘어서』(故김홍섭 판사의 신앙 유고집), 『부처님이 계신다면』(탄허 스님) 등등. 헌신적이거나 고행을 하는 삶들을 읽다보면 상대적으로 내 삶의 힘겨움이 덜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신앙 서적 속 인물들은 나와는 좀 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세계 명작을 읽기 시작했다. 작품 속 인물들의 고민과 갈등에 내 힘겨움을 얹어보기도 하고,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에선 고마움까지 느꼈다. 『좁은 문』,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테스』, 『부활』 등 각양각색의 사랑이야기들을 읽을 땐 작품 속 주인공들이 부럽기도 했고, 『데미안』, 『어린왕자』, 『이방인』 같은 작품들은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작가가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뜻도 모르고 읽은 사르트르의 『구토』와 카프카의 『심판』.

그렇게 한 몇 년이 흐른 뒤에는 주로 수기를 읽기 시작했다. 곧 나을 거라 생각했던 병이 세월이 흘러도 크게 차도가 없자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고,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데에 많은 위로가 됐다. 수기 중에서도 주로 투병기를 많이 읽었는데 기억나는 책으로는 『스무 살의 어둠은 너무 깊어라』(대학 1학년 때 초상집에 다녀온 뒤 원인 불명의 병으로 자리에 누워 지내게 된 여대생의 이야기), 『진아의 방』(김옥진/고2때 성벽에서 추락해 하반신 마비가 된 산골 소녀의 수기), 『일어나 비추어라』, 『잃어버린 너』(김윤희/화상을 입은 연인을 둔 여자의 수기), 『빛 속에서』(일본인 삼포능자의 수기) 등이 있다. 그 무렵, 위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책들도 읽기 시작했는데, 『간디 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전태일 평전』, 『백범일지』,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 등을 읽으면서 건강 이외에도 인생에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할 것들이 많다는 것에 나의 힘듦이 가볍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시공간의 넘나듦이 자유로워서 좋았다. 지금 여기에서 그때 거기를 경험하기도 하고 평생을 살아도 못 만날 것 같은 나와는 참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걷지 못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넘칠 때는 일기장에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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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기

지금 보관하고 있는 열다섯 권의 일기장은 주로 82년부터 95년 사이의 기록이다. 투병 초기에는 쓰는 것이 힘들어서 뜸했고, 96년 독립 이후 일을 하고 나서는 일기를 쓰지 않고도 살 만해서 뜸해졌다. 당시에는 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일기가 쓰기 싫어서 시도 베끼고 명언도 베끼고 해서 국어 선생님께 혼이 난 적도 있는데, 아픈 동안에는 하루에 몇 번씩도 썼다.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을 했고, 형제들도 각기 가정을 꾸렸다. 친구가 보고 싶을 때도, 미래가 불안할 때도 일기를 썼다. 책을 읽고도, 영화를 보고도, 뉴스를 보고도 일기장을 펼쳤다. 날씨가 좋아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꽃들이 만발해도 단풍이 곱게 물들어도, 눈이 내려도, 통증이 심해도, 엄마한테 죄송해도, 아버지가 미울 때도 일기장에 내 맘을 털어 놓았다. 그러다가 한 번씩 지난 일기들을 읽다보면 때로는 늘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은 내 모습이 보여 다시 마음을 다잡기도 하면서.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일기 쓰기는 그 당시 나의 숨통이었다.

그 중 몇 컷.

나의 자유는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의해 구속당하고 있다. ‘自己로부터의 해방’ 나에게 너무도 절실한 問題이다. …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답답하기만 하다.(84. 1.25)

- 제법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듯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ㅋ

밤이 주는 이 푸근함. … 빛은 모든 걸 들추어내지만 어둠은 그냥 그대로 묵인해준다. 하지만 한 가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 그리움…… 눈을 감는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물체에 빼앗겼던 시각마저도 합세하여 더욱 더 궁지로 나를 몰아넣는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켠다.(85.3.3)

- 가출 하루 전날의 일기다. 아버지 보란 듯이 독립을 하겠다며 취업 신청서를 냈다가 대학생 위장취업문제로 무산되자 가출을 감행하기 하루 전날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그리움의 정서에 빠져 있다니 어찌 된 일인지…….

밤새도록 통증에 시달리다 아침만 겨우 먹고 또 이불 속으로 기어들다. 정말 심한 통증이다. 종일 그렇게 찡그린 얼굴로 지내다가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두 시가 넘어서야 세수를 하고 또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저녁때가 되어 엄마가 안 계셔서 식사 준비를 했다.(86. 4. 2. 일기)

- 류머티즘은 아침엔 죽을 맛이다가도 오후가 되면 통증이 좀 잦아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머니가 안 계실 때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할 때도 있다. 물론 발병하고 한참 지난 때부터이긴 하지만.

저녁에 감자국을 끓였다. 우선 멸치를 넣어 끓이다가 납작납작하게 썬 감자를 넣고 파와 양파를 넣어 맛을 보니, 너무 맹맹한 것 같아 고춧가루를 조금 넣었다. 엄마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맛보고 요것 좀 조것 좀 하면서 맛을 창조하시는구나 싶었다.(87. 3. 12. 목. 맑음)

- 난 먹는 것도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도 즐겁다. 그러다 보니 그 와중에도 휠체어를 타고 앉아 감자국 끓이기에 여념이 없다.요즘도 난 감이당에서 한 끼도 안 거르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백기완. 홍숙자. 신정일. 김선적. 나에게 주어진 한 장의 투표용지에 무엇을 생각하며 어디에 기표를 할 것인가? (……) 의무가 나에게는 권리보다 더 크게 느껴져 한층 더 부담이 된다. 4.19, 5.16, 10.26, 12.12, 5.17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또 6.29 선언인지 항복인지가 있기 전까지 이 한반도를 뒤덮었던 함성과 최루탄 가스는 무엇을 얘기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외치다가 죽어간 무수한 영혼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박종철, 이한열, 이밖에 이름조차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그 많은 젊음들. 그들의 생명과 바꾼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어느새 우리들 사이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듯하다.(87.11.29)

- 국가의 명운을 짊어진 듯 자못 진지하다.

생명 유지의 기본이 먹고 배설하는 것이듯, 나 또한 생명체인 다음에야 허기 진 몸과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읽어야 했고 배설의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니 무엇이든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읽고 쓰는 건 순전히 굴신(屈身)이 어려운, 그리하여 마음마저 쪼그라들던 내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선택한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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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자연, 그리고......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2015, 219)

이 표현을 조금 다르게 하고 싶다.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가 아니라, “추억은 작은 것일수록”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기억나는 건 성적표의 점수도 아주 특별한 이벤트도 아닌, 일상 속 따스한 분위기와 장면들이다. 방학이면 도넛과 호떡을 만들던 오빠들과 언니 옆에서 주전자 뚜껑으로 본을 뜬 뒤 작은 술잔으로 도넛의 구멍을 내며 놀던 일, 창호지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겨울 오후, 삶은 밤을 까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때의 그 느낌들, 무더운 여름날, 하루에도 몇 번씩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해야, 나오너라 김칫국에 밥 말아 먹고 장구치고 나오너라”며 물에 젖어 새파란 입술을 하고서 구름에 가린 해를 부르던 일, 경고 표시로 빨간 깃발이 꽂힌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가 관리인이 옷을 싣고 가는 바람에 친구들과 팬티만 입고 뛰던 일, 썰매를 타다가 젖은 엉덩이를 말리려다 바지를 태워버린 일 등등. 이런 추억들을 불러오노라면 어느새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온몸의 피가 맑아지는 듯하다.


자연이 내게 준 즐거움과 위로 또한 크다. 대구 앞산 아래 아파트 내 방 깊숙이 드리우던 초여름의 싱그러운 초록 그늘, 밤이 되어 힘든 몸을 침대에 누이면 그 넓은 창을 통해 머리에서 저 발끝까지 환하게 비치던 새하얀 달빛, 태풍이 휘몰아칠 때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시원히 날려주던,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던 가로수들, 병원 생활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휠체어를 타고 병원 복도 창가에 붙어 앉아 바라보던 일몰, 대광주리에 담긴 호박이며 무말랭이 위에 내리쬐던 습기를 걷어낸 투명한 가을 햇살, 갈색의 부드러운 붓을 거꾸로 세운 듯한 나무들을 품고 침묵으로 빠져들던 겨울 산, 봄이 되면 아기 손톱만한 연둣빛 잎새들을 매달던 나무들. 이런 자연과 하나 되는 그 순간만은 아무런 불안도 통증도 없이 평화로웠다. 지금도 남산 산책길을 걸으면,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와 꽃과 풀들이 내뿜는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면서 발바닥에서부터 목 줄기까지 뿌듯하게 올라오는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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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참 고마운 인연들. 부모님과 형제, 조카들이야 더 말할 바가 없고 그 밖에도 참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특히 무더운 여름과 심한 통증으로 괴로웠던 동촌 시절에 힘이 된 사람들이 참 많다. 틈 날 때마다 찾아주던 많은 친구들, 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면 대소변도 받아내고 끼니도 챙겨주던…….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동안엔 통증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에미 팔아 친구 산다”는 말이 있다며 인생에서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씀하셨다. 유머가 많은 外육촌 언니도 그 시절 우리 집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바람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 때문에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부채질을 하면서도 연신 유머를 날려주던 양순 언니의 숱 적은 노랑머리와 하얀 얼굴. 언니와 함께 부르던 조용필의 신곡,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창밖의 여자’ 등등. 라디오를 틀면 흘러나오던 이런 노래들을 따라 부르는 게 즐거운 일과 중 하나였다. 그 인연으로 용필이 오빠^^를 좋아하게 되었고, 걷게 된 이후에는 콘서트에도 여러 번 갔었다.

류머티즘에 좋다고 하면 한겨울에도 산에 가서 약을 구해 주시던 삼종 조부님과 늘 마음 써 주던 많은 친척들, 지금도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첫 주치의 선생님, 그리고 말 한 마디 손길 하나로 힘을 주던 신부님과 수녀님들. 파티마 병원 시절, 앞을 잘 못 보시던 세실리아 수녀님이 내 휠체어를 밀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 둘이서 성가를 부르면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그리고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만날 날이 있다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친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르며 그날그날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된 ‘그 친구’. 이 밖에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십 년이란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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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찾아온 류머티즘과 싸우는 동안 참 많은 것들을 새롭게 만났다. 부모님과 친구들이 더욱 살갑게 느껴졌고, 그저 재미로 호기심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읽던 책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으며, 그렇게도 쓰기 싫어하던 일기는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책이 없었다면 긴긴 여름 해를, 더 길고 힘든 겨울밤을 무얼 하며 보내며,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시도 때도 없이 들끓던 오만 가지 상념들을 누구에게 쏟아놓았을까 싶다. 그리고 오고 또 떠나간 수많은 인연들. 때로는 아픔도 주었고 또 그리움도 있었지만, 그리움과 아픔들이 크고 작은 마디를 만들며 또 다른 마디들을 넘는 힘이 되었다. 사람들과 사물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빛깔과 리듬들. 이런 것들이 뿜어내는 ‘힘’들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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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하게 시작한 병이 ‘창대’한 과정을 거치며 힘들게 했지만, 아무리 통증이 심해도 불안이 엄습해도 그 틈으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어서, 그날 어머니의 말씀 끝에 서슴없이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래도 사는 게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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