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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홍루몽의 페이지들 | 성장 또는 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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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석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6-09 21:22 조회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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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돋는 놀이

   그럼 보옥이는 언제 공부하고 배우나? 보옥은 유한계급의 자녀답게 한가한 유희를 통해 공부한다. 주령놀이, 수수께끼놀이, 시 짓기 등이다. 주령놀이는 말 그대로 술마실 때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한 명의 매니저가 패를 돌려 뽑게 하거나 별도의 규칙을 정해서 그 룰에 맞게 시를 짓거나 우스개 소리를 하는 것인데, 이게 쉽지 않다. 보옥이가 했던 주령놀이 중에 가장 어려워 보였던 한 사례를 소개하면 이렇다.

자, 지금부터 슬플 비悲자, 근심 수愁자, 기쁠 희喜자, 즐거울 락樂자 등 네 글자를 말하는 것인데 반드시 여아의 입장에서 말해야 합니다. 거기에 이 네 글자의 까닭을 주석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말을 다 하면 문배를 마셔야 하는데, 술 마시기 전에 하는 주면으로는 새로운 유행곡조로 노래를 한가락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술 마신 다음에 하는 주저로는 술자리에 있는 물건에 착안하여 고시나 대련, <사서>와 <삼경>에서 유래하는 사자성어 등을 말해야 합니다.(2권, 196쪽)

   에잇! 그냥 벌주를 마시고 말지, 이걸 어떻게 하나? 싶은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이들은 신기하게도 다~ 한다. 나로 하여금 보옥의 나이를 셈하며 읽게 한 가장 큰 계기는 ‘대체 이 녀석이 몇 살인데 술을 마셔?’라는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보옥은 거의 스토리가 시작하자마자부터 술을 마시는데, 처음엔 유모가 못 마시게 잔소리 한다. 그러다 명절 잔치를 하는 자리에서 술을 자유롭게 마시면서 대옥이의 ‘흑기사’를 하기도!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가면 밖에서 남자들끼리 기녀와 함께 마시는 자리에도 간다. 홍루몽은 보옥의 변화를 뚜렷이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보옥이의 나이 듦을 잘 의식할 수 없지만,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상황을 의식적으로 캐치한다면 보옥이가 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옥이를 포함한 이 가문의 아이들이 가장 즐겁게 노는 자리는 술자리가 아니라 바로 ‘해당화 시사모임’을 할 때이다. 집안의 자매들과 함께 보옥은 한 달에 두 번씩 모여앉아 시제에 맞춰 시짓기 놀이를 한다. 주령놀이도 내 입장에선 너무 어려워서 체력장과 필기시험을 한꺼번에 보는 듯한 느낌을 주더니, 이 시사모임에서 이들이 하는 ‘놀이’는 한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종종 읽기를 포기하고 대충 뛰어넘기 일쑤였다.

   보옥이는 이 시짓기 놀이에서 한 번도 뽑힌 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 내에 다 쓰지도 못하여 매번 간신히 써서 내는데, 다른 자매들의 시를 감상할 때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수다를 떤다.이건 잘됐네, 이건 이상하네, 이 시어는 아주 교묘하네 하면서 온갖 참견을 다 하는 모습을 보면, 보옥이는 정말 즐겁게 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금 즐겁게 공부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이 즐거운 시사모임은 후에 흐지부지 되었다가, 새로운 멤버로 다시 구성되기도 하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합집산을 한다. 홍루몽에서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단 하나도.

한 뼘씩 크는 깨달음

   성장소설을 읽다가 10대 소년소녀들이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에 이르면 가슴이 아렸던 경험이 있다. 그들의 성장이 대견해서 축하하면서도 눈물 콧물이 났던 이유는 그 성장, 그 철듦이 무언가에 대한 상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상실한 것이 세상물정 모르던 고집, 독선, 무지라 할지라도, 깨달음은 대부분 실패와 함께 오기 때문에 그 협소한 자아가 던져지고 깨지는 과정은 왠지 통과의례의 고통처럼 아프다.

   보옥은 항상 자기가 죽으면 눈물 흘려줄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를 궁금해 했다. 나도 어렸을 때는 내 죽음을 상상하면서 모두 슬퍼할 것을 생각하면 조금 우쭐해지고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보옥은 죽도록 매를 맞고서도 자매들이 이처럼 자기를 위해 울어준다면 당장 죽는대도 보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보옥이에게도 드디어 세상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는 냉엄한 자각의 순간이 오고야 만다. 성장의 고통 치고는 사소하고 웃픈(웃기고 슬픈) 일화다.

   보옥이는 여자들과만 지내면서 온갖 따뜻한 배려와 시중을 받았다. 이 가문의 중심이 자신이며, 규중의 중심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보옥은 어느 날, 자기 가문에서 관리하는 극단아이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찾아가 가장 노래를 잘 한다는 아이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노래를 청했으나,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바로 면전에서 거절을 당한다. 아, 누구에게서도 싫어하는 기색을 받아본 적이 없는 보옥은 민망했다. 이게 뭐지? 저 여자아이는 뭔데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이게 뭐지? 저 여자아이는 뭔데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보옥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 배우아이와 보옥의 가문 중의 한 사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보옥은 그 사내가 와서 배우와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며 애절한 자신들의 마음을 주고받는 것을 보며 넋을 잃었다. 그 순간, 보옥에게는 하나의 깨달음이 찾아온다.

“아버님이 늘 나를 보고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바가지로 바닷물을 헤아리는 격’이라고 야단치시더니 그게 바로 맞는 말이야. 어젯밤에 내 죽으면 너희 눈물로 장사지내 달라고 한 말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구. 나 같은 놈이 모든 사람의 눈물을 독차지할 수는 없어. 앞으로 각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로 장사지낼 수밖에는 없을 거야.”(2권, p.376)

   자기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되는 때라고 들은 적이 있다. 보옥은 이제 세계가 자기 뜻대로 돌아가는 작은 왕국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인연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재의 변이

   보옥은 이렇게 놀고 사랑하고 배우며 10대를 보냈다. (사랑얘기는 너무 길어서 다음기회로) 그런데 홍루몽의 10년은 보옥이가 크고 있다는 것, 깨닫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드러낼만한 획기적인 일은 위에 기술한 ‘각자 인연’ 정도 빼고는 별로 없기도 하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성인이 되는 여러 표시들, 가령 술을 마신다던가 여자를 접한다던가 하는 일들은 보옥의 10대를 아이와 어른으로 가로지르는 분수령이 아니다. 그건 보옥에게 통과의례의 의미가 전혀 없다. 그것들은 보옥이가 10살 무렵부터 그냥(!) 자연~스럽게 하던 일이다. 10대 후반에 결혼을 하지만, 그것도 그가 성인이 되었다는 어떤 경계도 되지 못한다. 가문이 쫄딱 망하지만 그것도 그로 하여금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다. 소년에서 유부남, 부유한 상태에서 가난한 상태가 되었어도, 보옥은 그것과 자신을 연결해서 생각한 적이 없다. 이것이 보통의 성장소설에서 느끼는 통과의례의 아픔과 감동을 보옥이에게서 찾기가 힘든 이유다.

   홍루몽은 그런 외부 조건의 변화가 한 사람의 삶을 커다랗게 전환하는 계기가 아님을, 본질적 변이는 ‘자기를 인식하는 앎’에 있음을 보여준다. 보옥이를 내내 괴롭게 한 것은 어떤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생의 무상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엉뚱한 질문으로 눈물을 뿌리며 근심하기를, 때론 바보 같았고 때론 미친 듯 했다. 그러다 보옥은 19세에 돌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 출가한다. 이것은 성장이 아니라 존재의 변이이자 변태가 아닌가!

   10대라고 하면, 우리는 의례 그 한가운데에 사춘기를 상정하고 질풍노도와 반항, 커진 몸과 성징으로 대표되는 성장을 떠올린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홍루몽에선 그런 외부적 형태의 조건은 그냥 지나갈 뿐, 우리의 존재 변이의 원인이 될 수가 없다.

   보옥이의 돌연한 변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답을 찾았을까? 그건…아직 잘 모르겠다. 아마 그걸 찾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홍루몽 속으로 들어가 더듬거리며 즐거운 보물찾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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