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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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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민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4-15 11:28 조회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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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 질문들] (3) - 『명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박 성 옥


나쓰메 소세키(1867~1916)가 죽은 지 막 100주년을 넘긴 올해 그의 마지막 작품을 읽는 감회가 남다르다. 『명암』은 평생 신경쇠약과 위장병에 시달렸던 소세키가 죽기 직전까지 썼던 작품이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 장장 600쪽이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썼다. 죽음 직전까지 글을 쓰면서 소세키는 무슨 문제에 매달렸을까. 이 작품은 결혼한 지 6개월 밖에 안 되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다. 상대방의 마음을 징글징글하게 탐색하는 이들 부부의 신경전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은 또 무엇인지를 되짚어보게 된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혹자는 ‘눈물의 씨앗’이라고 답할 것이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배신의 쓴 맛을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답할 수 있다. 혹자는 ‘얄미운 나비인가봐’라고 말끝을 흐릴 것이다.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사랑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의 대답이 되겠다. 내게 같은 질문을 묻는다면 ‘사랑은 바닷물’이라고 대답하겠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게 된다는 게 결혼 30주년을 넘긴 나의 지론이다. 소세키는 남녀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명암』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결혼의 빛과 그림자


『명암』의 주인공 쓰다와 오노부는 연애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가 싶지만 때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색채가 짙던 메이지 시대이다. 근대적인 서구문화가 밀려들어오고 있지만 사랑 때문에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직 보편적 정서가 아니었다. 소세키의 여러 작품에는 사촌여동생과 결혼하지 않고 연애결혼을 한 남자 주인공이 가족들에게 질책당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결혼은 혈통과 재산의 상속을 위한 가족 간의 결합이라는 게 사회적 통념이었다. 쓰다의 숙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연애결혼에 대한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남의 딸을 부모로부터 독립한 그냥 여자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어떤 아가씨를 봐도 부모라는 소유자가 어김없이 뒤에 붙어 있다고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아무리 반하고 싶어도 반할 수 없는 처지 아니었겠어? 왜냐하면 반한다거나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대를 이쪽이 소유해버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 이미 소유권이 있는 것에 손을 대는 것은 도둑질이니까.” (나쓰메 소세키, 『명암』,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6년, 94쪽)


그랬다. 고대 사회부터 결혼은 사랑보다는 재산권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리스에서 여성은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소유였다. 지참금을 가진 여자는 남자에게 소유권이 양도되었다. 재산권을 양도받은 대신 남자는 아내를 부양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고, 여자는 그 대가로 섹스, 출산, 가사노동을 제공했다. 근대 이전까지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일반적이었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은 등식이 성립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고 말 한 번 나눈 적이 없이 결혼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누구도 신랑과 신부가 서로 사랑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사랑이 결혼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까?


대다수의 사회사학자들은 서구에서 근대적인 결혼관이 미국 독립전쟁과 1830년 사이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재산, 가족, 사회적 지위가 여전히 결혼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 기간 동안 사랑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메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이호영 옮김, 책과함께, 2012년, 269쪽)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을 하는 풍습은 거의 18세기 후반에 와서야 중류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연애결혼이 일반화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물론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상류층에서는 부의 세습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정략결혼이 이루어진다. 쓰다와 오노부의 연애결혼은 희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쓰다의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연애결혼을 한 오노부는 튀는 여자였다. 그들은 이질적인 오노부에게 처음부터 배타적인 시선을 보낸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오노부가 결혼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노부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책을 빌리러 갔다가 쓰다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오노부는 중매쟁이를 앞세워서 이 결혼을 성사시켰다. 오노부는 당대에 보기 드문 주체적인 여성이었던 것이다. 소세키의 초기 작품인 『우미인초』(1907년)에도 후지오라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자기 취향대로 남편을 선택하려 했던 후지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이유 없이 돌연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로부터 9년 후에 쓴 『명암』(1916년)은 오노부라는 신여성 캐릭터를 제대로 만들어냈다.

소설가로서 가장 완숙한 시기의 작품인 만큼 소세키가 『명암』 속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소세키는 쓰다와 오노부의 심리를 교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간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1인칭 주관적 시점에서 내러티브를 펼치던 서술방식과는 달리 『명암』에서는 아내의 관점도 공평하게 다루어진다. 은밀하게 심리전을 펼치는 부부관계, 노골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시누이와 올케관계,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주변인들, 삥 뜯는 친구와 친척관계까지 개인이 맺고 있는 방대한 인물관계를 총망라해서 보여준다. 『명암』은 소세키 작품 중에서 가장 두껍고, 가장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며 가장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2. 우연과 비밀이 교차할 때


결혼을 해서 독립된 가정을 이루게 된 쓰다는 자기 월급만으로 생활을 하기가 빠듯하다. 쓰다는 부유한 숙부 밑에서 자란 부인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 돈 있는 남편으로 보이고 싶어 그는 허세를 부린다. 보너스를 받으면 갚겠다고 약조하고 아버지에게 매달 돈을 빌려서 생활한다. 쓰다는 추석상여금으로 오노부에게 반지를 사주느라 빚을 갚지 못하고 빚 독촉에 시달린다. 예상치 않게 치질 수술을 받게 되자 병원비가 없어서 쩔쩔맨다. 화폐관계만 보더라도 쓰다는 어쩐지 아내에게 떳떳하지 못한 열세에 놓인다.


아버지나 오빠, 남편처럼 호주가 될 수 있는 남자들이 어머니나 누이, 아내의 생활비를 책임진다는 것은 메이지민법이 정한 남녀관계, 즉 남자가 여자를 경제적으로 지배한다는 권력관계의 구도일 것입니다. (고모리 요이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 한일문학연구회 옮김, 이매진, 2006년, 133쪽)


부부관계는 일종의 권력관계다. 경제적 주도권을 확실히 쥐지 못한 남자는 감정적으로도 열세를 느낀다. 쓰다는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 먼저 문을 열어주는 아내를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옅은 화장을 하고 있는 아내는 아름답다. 하지만 쓰다는 상황판단이 빠르고 영리한 아내에게서 “번뜩이는 나이프의 빛”을 본다. 아내가 뛰어나다는 느낌이 들면 어딘가 불쾌한 기분이 든다. 호락호락 손 안에 들어오지 않는 아내는 그를 긴장시킨다. 이 여자는 왜 나를 남편으로 선택했을까.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쓰다에게 아내는 다가갈 수 없는 타자다.

남편을 이해할 수 없기는 오노부도 마찬가지다. 오노부는 사랑받기 위해 힘껏 애교도 떨고 친절을 베풀지만 남편의 태도는 뻣뻣하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그저 아내의 애정을 빨아들이기 위해서만 생존하는 해면동물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녀는 회의를 느낀다. 남들은 속도 모르고 자상한 남편에게 사랑받고 산다고 그녀를 부러워한다. 그녀는 “매일 씨름판 위에서 얼굴을 맞대고 씨름을 하는 듯한 부부 관계”를 남에게 들키기 싫다. “난 행복해”를 과시하고 싶다. 남편을 맘대로 다룰 수 없는 여자는 지혜가 없는 게 아닐까 자학하며 굴욕을 느낀다. 오노부는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망과 자존심 때문에 고독하다.


아슬아슬하게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부부사이에 한 술 더 뜨는 방해자가 끼어든다. 쓰다의 여동생은 오노부가 사치스러워서 아버지의 빚을 못 갚는다고 오빠를 책망한다. 명분은 효도지만 그녀를 히스테리 직전까지 몰고 가는 진짜 감정은 질투다. 쓰다의 여동생은 특출한 미모를 지닌 덕분에 상당한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다. 자식을 둘이나 낳았고 시부모와 시동생도 모시는 살림꾼이지만 자기 남편은 외도를 일삼고 성병에 걸렸다. 그런데 오노부를 보면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는 것 같고 오빠의 사랑도 독차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동생은 샘이 나서 참을 수 없다. 시누이와 올케 사이의 갈등은 악의를 낳고, 여동생은 세력가 요시카와 부인과 오노부를 골탕 먹일 작전을 짠다. 요시카와 부인 역시 질투와 시샘에 사로잡힌 오지랖 대마왕이다. 요시카와 부인은 옛날에 쓰다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기요코와 쓰다를 재회하도록 비밀리에 주선한다. 결혼 파탄의 징후가 다가오고 있다.

오노부는 쓰다에게서 뭔가 비밀스러운 낌새를 눈치 채고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의심과 불안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 남편을 선택한 일을 떠올린다. 오노부는 다른 사람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직접 남편을 골랐기 때문에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신이 주인공이기에 또한 책임도 져야한다. 그녀는 무조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노력형 인간 앞에서 우연은 얼마나 악의적인지. 우연과 비밀이 교차할 때 낭만적 결혼은 너무나 덧없고 허망한 신기루로 보인다. 운명을 뒤틀리게 하는 계략이 사방에서 일어나는데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사건을 예측불가의 우연이라고 부른다면 열심히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먹먹해진다. 결혼을 했지만 두 사람은 각자 고독한 개체다. 동일한 사건과 마주쳐도 부부는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해석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감정이 출렁이고 의심과 질투가 엇갈린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이 결혼은 명암이 공존하는 세계다.




3. 타자와의 관계에 출구는 없을까


나쓰메 소세키의 결혼관은 음양화합과 음양불화의 양면성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끌어당기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가 없다. 재미있는 건 음양화합이 필연적이듯 음양불화 또한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음양화합의 성과를 올리는 일은 머지않아 다가올 음양불화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명암』 225쪽) 결혼의 양면성을 쌈박하게 설명한 뒤 고모부가 보여주는 행동은 위트가 있다. “이건 음양불화일 때 가장 잘 듣는 약이야. 대개의 경우 한 봉지만 먹으면 금방 낫는 묘약이거든” 하면서 고모부는 오노부에게 돈봉투를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음양화합의 직효약이 맞았다. 오노부가 쓰다에게 돈을 건네주자 모처럼 부부사이에 고소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번뇌 중에서 가장 큰 정신적 고통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는 고통과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볼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감정이 중첩되어 있는 게 결혼생활 같다. 오죽하면 전생에 원수였던 사람이 이생에서 부부가 된다고 할까. 예컨대 결혼 전에는 매력으로 보이던 과묵함이 결혼 후에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뒤바뀐다. 종이 한 장 뒤집듯이 장점이 단점으로 전환한다. 이런 모순된 감정을 지속적으로 겪는 관계가 부부일 것이다.

쓰다가 온천으로 가서 옛 애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명암』은 미완으로 끝난다. 소세키가 죽지 않고 소설을 끝맺었다면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까?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한 우리는 맘대로 결말을 써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와우 육이오동란은 난리도 아니었다. 기요코와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옛 여자를 만난 사실을 아내에게 들켜 혼쭐이 난다. 입센의 노라처럼 오노부가 집을 나간다 등등 아침 드라마급 스토리가 줄줄 쏟아졌다. 다들 가슴속에 이야기꾼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지 그야말로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로서는 이들 부부가 계속 의심과 사랑을 오락가락하며 힘겨루기를 무한반복한다는 쪽이다. 개인의 내면을 해저까지 파고 내려가는 소세키는 쉽사리 출구를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세키에게는 사람을 계몽시키려는 목적의식이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뒷얘기가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명암』은 개인의 고독과 사랑의 실상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옛 애인을 만난 쓰다는 어느 쪽이 먼저 말을 꺼낼까를 생각해본다. “오노부라면 분명 먼저 말을 했을 것이다. 오노부는 쓰다에게 잠깐의 여유도 주지 않는 여자였다. 오노부 앞에서 자연히 쓰다는 늘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조용한 기요코를 상대하면 쓰다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나왔다.” 쓰다에게 여성은 영원한 타자이다. 오노부에게 남성이 영원한 타자인 것처럼. 쓰다가 영원히 아내도 옛 여자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능동적인 부인 앞에서 소극적이 되고, 수동적인 옛 여자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타자와 어떤 힘의 관계로 만나느냐에 따라 자기 자신도 달라진다. 그 때는 자신마저도 자기에게 타자가 된다.

근대적 개인과 타자성을 파고드는 면에서 소세키의 시대를 앞서가는 급진성을 엿볼 수 있다. 각자 독립적으로 분절된 개인은 고독하다. 자유로운 자아를 찾은 대신 자신과 동일화되지 않는 타자의 차이성을 감내해야 한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야말로 영원한 타자성을 확인하는 실험일지 모른다.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관계 맺는 방식을 창안해야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사랑은 마실수록 목이 더 마른 바닷물’이라는 나의 생각은 다소 바뀌었다. 짠 바닷물을 꼭 들이킬 필요가 있을까. 멀리서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거나 가까이 다가가 수영을 하거나 파도를 타고 노는 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2017.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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