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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글소식]혜제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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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2-10 22:27 조회40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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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제의 재발견






강 보 순        

 

기억에서 멀어진 군주, 기억해야 할 군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과거에 접속하는 1차원적인 접근은 과거의 사실(史實), 즉 역사를 통해서다. 그런데 그 과거는 시대를 초월하는 객관적인 사실(事實)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절단 수집되어 편집 확대된 사실(史實)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도 역사가의 시선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전한시대의 시작만 해도 그렇다. 『사기』가 기억하는 전한시대의 봄과 『한서』가 기억하는 전한시대의 봄은 다르다. 특히 2대 황제인 혜제(유영)를 기억하는 사마천과 반고의 붓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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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사기』 본기를 <고조본기-여태후본기-효문본기> 순으로 구성하여 처음부터 혜제를 수록하지 않았다. 반면 반고는 『한서』 본기에 <고제기-혜제기-여후기-문제기> 순으로 구성하여 혜제를 2대 황제로 수록해 놓았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은 것일까? 혹 사마천은 사료부족으로 혜제의 존재를 몰랐던 것일까? 아니다. 사마천은 혜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본기에 넣지 않았다. 알고 있어서 넣지 않았다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주지하듯 본기는 황제의 기록이다. 사마천이 그 황제의 기록에 혜제를 넣지 않은 이유는 혜제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효혜황제(혜제)와 고후의 재위시절, 백성들은 비로소 전국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주와 신하가 전부 쉬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혜제는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고후가 여주인으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해 정치가 방안을 벗어나지 않았어도 천하는 편안했다. 형벌이 드물게 사용되어 죄인이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니 옷과 음식은 더더욱 풍족해졌다. 

- 사마천,「여태후본기」, 『사기』, 민음사, 407쪽

혜제 시절에 한나라는 태평했다. 그러나 사마천이 보기에 그 태평함은 혜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여태후가 만든 것이었다. 혜제는 엄마 여태후의 기세에 눌려 실권이 없던, 그저 그런 꼭두각시에 불과한 아들이었다. 모든 치세와 권력이 여태후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혜제가 황제로 재위하던 7년간의 기록을 여태후의 치세로 보고, 여후본기에 혜제의 치세를 편집해서 넣었다. 하지만 반고의 입장은 달랐다. 반고는 혜제를 한나라의 정식황제로 보고 ‘혜제기’를 수록, 그의 7년간의 정치행적을 담아놓았다. 

 

효혜제는 안으로는 친족을 친애하고 밖으로는 재상을 예우하였으며, 제(齊) 도혜왕을 우대하고 조(趙) 은왕을 총애하였으니 형제에 대한 은애와 공경이 두터웠다. 숙손통이 간언을 올리면 두려워했으나 상국 조참의 대답에는 기뻐하였으니 가히 관대 인자한 주군이라 할 수 있다. 여태후에게 지덕을 훼손당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 「혜제기」, 『한서』 1권, 명문당, 181쪽

사마천의 『사기』를 먼저 읽었던 나에게 반고의 이 논찬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혜제는 꽤 오랫동안 존재감 1도 없던 인물이었다. 차라리 왕망에게 독살되어 죽었던 어린 황제 평제나, 미소년 동현과 동성애를 나누었던 황제 애제가 혜제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았다. 그런 혜제가 반고의 붓끝에서는 ‘관대 인자한’ 군주로 등장하다니. 이러한 충격은 『한서』를 읽는 내내 계속되었는데 『한서』를 전부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혜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마천의 시선이었다는 것을. 어느 왕조의 역사를 둘러봐도 군주에게 ‘관대 인자하다.’는 평가는 자주 쓰이는 표현이 아니다. 심지어 『한서』 본기에 기록된 12명의 황제들 중에서도 이러한 평가를 받은 인물은 거의 없다. 이쯤되니 사마천과 반고가 바라본 혜제가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마저 생길 지경이다. 대체 반고는 무엇을 근거로 전한시대를 이끈 봄의 군주라인에 혜제를 편입시킨 것일까? 

 

 

 

내쳐지는 아들, 유영

 

제국 한나라의 후계원칙은 적장자(정실 황후의 장남) 상속이다. 하지만 이 원칙으로 자리에 오른 황제는 14명 중 단 2명, 고조의 아들 혜제와 선제의 아들 원제뿐이다. 이 사실은 맏아들이 무조건 태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태자가 되었더라도 그 자리가 결코 황제를 보장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맏아들=태자=황제’라는 도식이 실제 역사에서는 늘 적용되지 않은 것이다. 유방의 적장자인 유영(혜제) 역시 이 곤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000년 중국 정사를 관통하는 태자책봉 문제가 막 통일을 이루어낸 한고조 시절부터 이미 상존했던 것이다.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때는 고조(유방) 말년. 고조는 태자인 유영(훗날 혜제)을 폐하고 자신이 총애하던 척부인(척희) 사이에서 낳은 아들 여의를 새로이 태자로 세우고 싶어 했다. 태자로 책봉된 지 약 10년 만에 내쫓길 처지에 놓인 유영. 그런데 유영이 부친 유방에게 내쳐지는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다. 어디서 봤을까? 

 

한왕(유방)은 불리하여 도주하였다. 하후영은 길에서 어린 혜제와 노원공주를 보고 수레에 태웠다. 한왕은 위급하고 말은 지쳤으며 적병은 뒤에 추격하기에 여러 번 두 아이를 발로 차내어 버리려 했지만 하후영은 매번 주워 태웠고 하후영은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달렸다. 한왕은 화를 내며 십여 차례 하후영을 죽이려 했지만 결국은 탈출하여 혜제와 노원공주를 풍현에 데려다 주었다.

- 「하후영열전」, 『한서』 3권, 명문당, 37쪽

유영은 본인부터 살고 봐야했던 유방에게 발길질을 당해, 달리는 수레 위에서 내쳐지는 모습으로 한서에 처음 등장한다. 천하를 욕망하는 자를 아버지로 둔 아들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라도 되는 듯, 어린 유영은 저항 한번 하지 않고 아버지의 밀어냄을 고스란히 감내한다. 차라리 울고불고 난리라도 피웠더라면, 차라리 버리고 가는 아비를 향해 돌멩이라도 쥐고 던졌더라면 유방이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이후로도 유영은 때로는 아버지로부터 때로는 어머니로부터 끊임없이 존재 자체를 시험받는다. 어려서는 수레 위에서 내쳐지고, 커서는 태자책봉 문제에서 다시 한 번 내쳐질 위기에 직면하고, 황제가 되어서는 결국 모친에 의해 내쳐지게 된다. 그러한 내쳐짐 가운데 단 한 번도 자립하지 못했다고 평가받는 인물 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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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이 유영을 폐하려는 대외적인 명분은 ‘닮음’ 이었다. 유방은 어질고 나약한 유영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활달한 성격의 여의가 자신을 더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명분을 듣고 유방을 지지해준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유방의 안목을 의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늙은 군주의 망발로 여겼던 것일까? 

 

여태후가 물었다. 폐하께서 백세가 되시면 소상국도 죽을 것인데 누가 대신하면 좋겠습니까? 조참이 좋을 것이다. 그 다음을 묻자 황상이 말하였다. 왕릉이 좋을 것이니 조금 고집스럽지만 진평이 왕릉을 도우면 된다. 진평은 지혜가 넘치지만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발은 중후하고 학식이 좀 적어도 유씨를 안정시킬 자는 틀림없이 주발일 것이니 태위로 삼을 수 있다. 여후가 그 다음을 묻자 황상이 말했다. 그 다음은 자네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고제기」, 『한서』 1권, 명문당, 164쪽

왕릉은 여후가 여씨를 왕으로 봉하려하자 가장 먼저 쓴소리를 했던 인물이고, 진평과 주발은 여후 사후 여씨의 난을 진압해 나라를 안정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고조의 인물 평가는 죽는 순간까지 객관적이고 날카로웠다. 이것을 두고 과연 늙은 군주의 막말이라 할 수 있을까? 또한 고조는 골상을 볼 줄 알았다. 조카 유비(훗날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키는 주인공)를 보자마자 ‘너에게 반상이 있구나.’라고 말하며 ‘동성은 일가이니 나중에 반역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런 고조가 보기에, 태자 영은 한나라를 수성할만한 재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유약한 태자 영은 더더욱 안심할 수 없는 후계였을 것이다. 유방의 마음은 막내 아들 여의에게 기울어 있었다. 

  

 

 

태자 모친의 조건, 태후의 품격

 

아들을 태자로 만들고 황제로 만드는 것은 9할이 모친의 능력이다. 모친이 황제로부터 받는 총애의 정도가 그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모친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이 태자가 된다면 미천한 첩의 신분이라도 황후가 된다. 반면 아들이 폐태자가 되어 태자의 지위를 상실한다면 황후의 신분이라 하더라도 그 지위를 보장받기 어렵다. 그래서 엄마와 아들은 운명공동체다. 엄마의 흥망성쇠가 곧 아들의 흥망성쇠인 것이다. 이것은 여후-유영, 척부인-유여의 모자지간도 마찬가지였다. 척부인이 유방으로부터 총애를 받자 그녀의 아들 여의는 한순간에 태자 후보로 거론된다. 척부인의 봄이 아들 여의의 봄을 불러온 것이다. 덕분에 유방의 태자교체안건은 순식간에 공론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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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척부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왜냐하면 유방이 정실부인 여후를 오랫동안 찾지 않았고, 때마침 아들 유영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척부인은 여후의 라이벌로 태자책봉의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는 유방을 미모로 구워삶고 있어 여론을 조금만 유리하게 이끌었더라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척부인의 전략은 여성으로서의 매력, 그 이상을 넘지 못했다. 오로지 유방만 붙잡은 것이다. 그녀는 여론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반면 여후의 전략은 달랐다. 여후는 유방과 함께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며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 유방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여후의 전략은 유방에게로의 정면대결이 아니라 유방이 아끼는 신하들의 마음을 얻고 여론을 주도하는 것에 있었다. 여후는 오랜 경험을 통해 태자책봉의 최종결정권은 유방에게 있으나, 그 결정을 좌우하는 것은 신하들의 여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조가 태자를 폐하고 척부인 소생의 여의를 태자로 삼으려 할 때 대신들이 완강히 간쟁을 하여도 통하지 않았다. 주창이 조정에서 강력히 따지자 고조가 말을 해보라고 했다. 주창은 말을 더듬으면서 크게 화난 모습으로 말했다. “신이 입으로는 말을 잘못하지만 신은 마음속으로는 그~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압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려 하더라도 신은 기~ 기필코 명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고조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실소하면서 조회를 파했다. 여후가 동쪽 복도에서 엿듣고 있었는데 주창을 보고서는 무릎을 꿇고 사례하며 말했다. “경이 아니었으면 태자를 거의 폐할 뻔했습니다.”

- 「주창전」, 『한서』 3권, 명문당, 74-75쪽

 자식을 위해 무릎 꿇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는 감동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장면의 감동은 그러한 것에 있지 않았다. 이 장면의 진정한 감동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여후가 무릎을 꿇으며 사례’한 것에 있었다. 여후가 어떤 여인인가? 뒤에서 보겠지만 척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고, 항우에게 사로잡혀 억지로 무릎이 꿇려 있을 때도, 기개를 잃지 않았던 철의 여인 아니던가. 그 콧대 높고 자존심 강한 여인이 지금 한낱 신하에게 무릎을 꿇고 사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자식을 위한 일이었는지, 자신을 위한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후의 이 무릎 퍼포먼스가 당시 신하들에게 던져준 울림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왜일까? 이것은 단순히 퍼포먼스가 아니라 태후의 품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주창은 날마다 척부인을 희롱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유방에게 ‘폐하는 꼭 걸주와 같은 주군입니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것은 유방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지만 척부인의 인간됨이 태후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옛날에 진나라 헌공은 여희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여희 소생의 해제를 태자로 정했다가 진국이 수십년 동안이나 혼란에 빠졌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부소를 태자로 일찍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해가 거짓을 저지르고 즉위하여 끝내 나라가 망한 것은 폐하께서도 직접 보셨습니다. 지금 태자는 인자하시니 이를 천하가 다 알고 있으며 여 황후와 폐하께서는 같이 고생하시며 맛없는 음식을 드셨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기어이 적자를 폐하시고 어린 아들을 세우겠다면 신은 먼저 사형을 받아 목의 피로 땅을 적시겠습니다. 

- 「숙손통열전」, 『한서』 3권, 명문당, 147쪽

숙손통이 문제 삼고 있는 태자의 조건은 2가지다. 태자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과 태자의 엄마가 누구냐는 것. 유방은 여의가 자신을 더 닮았다는 대외적인 명분을 내세워 태자를 새로이 세우려 하지만 숙손통은 그것 못지않게 태자의 엄마가 누구인지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유방의 말대로 여의는 형 유영보다 황제에 더 적합한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군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신하들의 마음을 얻을 줄 모르는 여인은 태후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여인이 황후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나라의 예법을 만들었던 숙손통은 적장자 상속이라는 원칙이 지켜지길 바랐던 것도 있지만, 군주 유방이 맛없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힘든 시절을 함께 이겨내 왔던 여후에 대한 마음도 헤아리는 주인이 되길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감독 여후, 시나리오 장량, 주연 상산사호

 

신하들이 아무리 간쟁해도 유방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유방이 보고 싶었던 것은 유영의 군주다움이 아니었을까? 유약한 군주가 아닌 강인한 군주. 유영에겐 군주로서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부친 유방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으니 말이다.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던 어느 날,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때마침 고조는 병으로 앓아누워 출정할 수 없어, 유영을 대신 내보내려 했다. 그러나 유영은 출정하지 못했다. 왜일까? 

  

그 이유는 태자를 보좌하기 위해 온 상산사호가 여석지(여태후의 셋째 오빠)에게 그 전쟁에 태자를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상산사호는 누구인가? 상산사호는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선생으로 모두 80세가 넘은 당대의 현인들이었다. 그런 상산사호가 갑자기 나타나 태자를 보좌하다니 어찌된 까닭일까? 이것은 여태후의 그림이었다. 남편 유방이 태자교체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자, 또 다른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사방으로 귀를 열어두었던 여태후에게 한 가지 묘안이 들어온다. 어떤 사람이 “유후(장량)는 계책을 잘 쓰고 폐하도 그 말을 잘 따릅니다.”라는 말을 하자 여후는 곧장 오빠 여석지를 유후에게 보낸다. 그리고 끝내 계책을 받아온다. 장량은 어떤 계책을 내놓았을까? 장량은 유방이 존경했지만 끝내 얻지 못한 인재, 즉 상산사호를 모셔와 태자를 보좌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여후는 장량이 일러준데로 태자에게 서신을 쓰라고 한 뒤 후한 예물과 함께 겸손한 언사의 사람을 보냈다. 결과는 대성공! 상산사호는 여석지의 집에 머물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상산사호가 여석지의 집에 머물면서 태자를 위해 낸 첫 의견이 바로 경포의 난에 태자를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상산사호가 말했다. “태자가 출정해서 공을 세워도 태자에게는 보탬이 더 없지만 공을 못 세우면 그 때문에 화를 당할 것이요. 태자가 데리고 출정하는 여러 장수는 폐하와 함께 천하를 평정했던 억센 장수들이요. 지금 태자가 이들을 거느리는 것은 양에게 늑대를 거느리라는 것과 같아 장수들이 명령에 잘 따르지 않을 것이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 「장량열전」, 『한서』 2권, 명문당, 543쪽

이 말을 들은 여태후는 상산사호가 알려 준 대로 유방에게 찾아가 울면서 뜻을 전한다. 결국 고조는 ‘내가 생각하더라도 못난 자식을 내보낼 수가 없으니 이 아비가 직접 출정하겠다.’는 말을 하고는 혜제를 대신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출정하게 된 것이다. 진압은 성공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일은 유방으로 하여금 태자를 교체해야겠다는 확신을 더더욱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척부인은 유방 옆에서 더더욱 끈질기게 자신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책봉해달라고 울면서 조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태자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경포의 난을 진압하고 연회를 연 술자리. 태자가 유방의 시중을 들었는데 그때 백발을 한 네 명의 노인들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태자를 수행했다. 유방은 이들을 이상히 여겨 무엇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네 명이 자기소개를 하자 유방이 깜짝 놀라며 묻는다.

 

“내가 공들을 오라하였지만 공들은 나를 피해 숨었었는데 지금은 왜 내 아이를 따라 왔는가?” 이에 4인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문사를 무시하고 욕을 많이 하여 우리가 두려워 피하고 숨었습니다. 지금 태자는 인자하며 효성스럽고 유생들을 공경하고 친애하기에 온 천하가 모두 기대하며 태자를 위해 죽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에 우리도 태자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자 고조가 말했다. “수고스럽더라도 끝까지 태자를 도와주기 바라오.” 

- 「장량열전」, 『한서』 2권, 명문당, 545쪽

유방이 태자를 교체하려 했을 때 많은 신하들이 반대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들이 태자를 지지한 이유는 하나같이 상산사호의 뜻과 같았다. 그것은 태자 영의 인자하고 어진 성품이었다. 왜 이들은 혜제의 인자함에 주목했던 것일까? 유방의 천하대업은 무수히 많은 살육위에서 세워진 제국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오래 전란으로 피폐해져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하가 안정된 상황. 이 시기에 필요한 군주는 유방과 같은 ‘전쟁의 신’이 아니라 백성들을 어진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는 군주, 살육보다는 생의 기운을 쓸 수 있는 군주. 그런 군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혜제는 천하를 소유한 자의 자식들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방식으로 욕망을 쓰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진시황이나 그의 아들 호해처럼 폭정 음란함을 누릴 수 있었을 지위였지만 혜제는 그러한 욕망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신하들은 태자 유영의 이런 성품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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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방은 자신의 뜻을 거둔다. 그러면서 척부인을 불러 말한다. “나는 태자를 바꾸려 했지만 저 4인이 태자를 보좌하니 날개가 다 생긴 것이니 바꾸기 어렵게 되었다. 여씨가 너의 진짜 주인이로다.”(「장량열전」, 『한서』 2권, 명문당, 547쪽) 유방이 끝내 유영을 태자로 삼은 것은 유영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유영 등 뒤에 날개를 달아준 여후의 전략 때문이었다. 유방은 크게 뛰어난 재능이 없던 자신이 천하를 움켜쥘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의 등 뒤에 달린 날개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약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아들 뒤에 자신이 얻지 못한 인재들이 아들의 날개가 되어 있는 모습에 유방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영에게 확신을 갖게 된다. 유방에게 평생 물음표로 남았던 아들이 비로소 느낌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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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문영님의 댓글

문영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존재감 없던 혜제가 이렇게 살아나는군요!!
<사기>와 <한서>의 다른 시선, 다른 온도..완전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