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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두고두고 읽을 ‘살아있는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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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11-17 08:31 조회1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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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 몸의 주인이 되자(2008~2017)

 

 

 

 두고두고 읽을 ‘살아있는 텍스트’

 

                      

 오창희

 

 

 

“신외무물이다!”

몸에 대해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생각은 하나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지간하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내가 아픈 동안에도 먹는 거며 약이며 지극정성으로 해다 주셨지만, 내가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좀 오래다 싶으면 여지없이 한 말씀을 하신다. “삼백예순다섯 뼈마디를 조 마야(주워 모아야) 된다. 있는 대로(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그래 늘쳐 노면(늘어지게 두면) 한정이 없다. 사람 몸도 기계 긑애서 자꾸 써야 되제 안 쓰면 녹이 쓴다.” 전신 관절이 아픈 날이면 일어나기도 힘든데 이런 말씀을 하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엄마가 안 아파 봐서 그러는 거지 엄마도 아파 보면 운동을 하기가 얼매나 어려운지 알 텐데….” 그러면 “니가 만약 시집을 갔으면 엉금엉금 기서라도 살림을 살아야제 별 수가 있나. 그 요량하고 애를 써 봐라”라고 하시거나, “운동이 어려우면 앉아라도 있어야제. 사람이 자꾸 눠 있으면 기(氣)가 상한다.” 

 

때로는 야속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병상에 있는 게 죄송해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어머니 말씀이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외출했다가 오시는 소리가 나면 얼른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이런 저런 운동을 한다. 한참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어머니 말씀을 거역하기 어려워서, 시간이 지나면서는 죄송해서 아픈 걸 참고 운동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안 하시면 오히려 내가 걱정이 되어서 누웠다가도 일어나 운동을 하곤 했다. 그러다 보면 누워 있을 때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몸이 전혀 다른 몸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차츰 어머니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도 어머니로부터 몸을 관리하는 방법들을 일상적으로 듣고 살았다. 저녁 한 끼 굶는 것은 산삼보다 낫다며, 자는 애를 억지로 깨워서 저녁을 먹이지 말라든가, 모기에 물린 자리를 긁어서 덧났을 때, 자던 침(밤새 자고 일어나 아직 말하지 않은 상태의 침)을 바르라든가(위생의 측면에서 보면 해로울 것 같은데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개는 주둥이가 따뜻해야 되고 사람은 발이 따뜻해야 된다든가, 머리는 항상 차게 하라든가, 겨울철 감기에 걸렸을 때는 체온 조절이 중요하니 목욕을 삼가라 등등. 그렇지만 그때도 역시 어지간하면 움직이라는 말씀을 빼 놓지 않으신다. 몸을 둘둘 싸고 지나치게 조심을 하면 감기가 자꾸 찾아온다고. 어머니는 감기에 걸려도 자리 깔고 누우시는 적이 잘 없다. 쌍화탕 한 병 마시고 푹 자고 나서 어지간히 병세가 잡히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출은 삼가시지만 집안일은 평상시처럼 하신다. 아버지의 조리법은 반대다. 일단 자리를 펴고 누우면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움직임이 별로 없으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자주 감기에 걸리셨고 한 번 걸리면 잘 낫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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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너무 안양(安養)을 하면 점점 약해진다. 감기는 댕기면서 나을 생각을 해야지, 겁을 먹고 자리 보존하고 있으면 나가던 감기도 도로 들어온다.” 이게 어머니 지론이시다. 이럴 때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있다. “너그 큰외아지매(큰외숙모)가 몸을 그클(그렇게) 안양을 했는데, 감기 삘(나갈) 날이 없었다. 그래 가주고 겨울이 오면 감기가 이 집 저 집 문을 빨쫌히 열어보다가, 아이고, 이 방 아랫묵(아랫목)에 영덕댁이 앉았네. 이번 겨울도 저 드가서(저기 들어가서) 나야 될따 카고 쏙 들어가디라(들어가곤 했단다).” 지금도 나는 감기가 상승세를 탈 때는 샤워는 물론 머리 감기도 발 씻기도 미룬 채, 생강이나 대추, 파뿌리를 넣고 달여서 보온병에 넣어 두고 수시로 마시면서 감기를 다스린다. 이 밖에도 자라면서 어머니께 들은 갖가지 처방들이 그때그때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다. 

 

어머니의 그 많은 양생법 중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하게 남아 있는 말씀. 몸은 아주 지쳐서 여기서 더 무리를 하면 안 된다고 신호를 보내고, 생각은 이걸 하고 쉬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릴 때, 그럴 때 생각나는 말씀. 밤늦은 시간, 내방에서 불빛이 새어나가면, 화장실에 다녀오시다가 방문을 열고, 조용히 던지고 가시던 짤막한 경고성 멘트. “신외무물(身外無物)이다!” 하긴 자기 몸을 해치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 세상에 있을까.   

 

 

 

어머니의 시조 외기

기미생(己未生)이신 어머니와 신유생(辛酉生)이신 아버지는 열일곱과 열다섯이 되던 1935년 봄에 결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약학을 전공하셨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큰아버지가 지으셨다는 『소녀필지(少女必知)』 한 권을 베끼며 한글도 깨치고, 당시 아녀자가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을 배우셨다. 신학문을 한 신랑과 학교라고는 문전에도 못 가본 신부, 전형적인 신식신랑과 구식신부의 만남. 아버지는 결혼 뒤 2년 만에 한양으로 유학을 가셨다. 그 동안 어머니는 시어른 네 분을 모시고 식솔들 거느리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며 지내셨고. 그 와중에도 행여 구여성이라 버림을 받을까봐 한 달에 두 번씩 편지를 쓰셨단다. 조금이라도 유식해 보이려고 시집 와서 할아버지께 틈틈이 배운 한자를 군데군데 섞어가며. 

 

3년간 공을 들인 뒤 아버지한테서 처음으로 답장이 왔다. 펜으로 쓴 편지지 일곱 장. 하도 읽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한 편지. 누가 볼세라 평고리(간단한 소지품을 넣어두던 대나무 상자)에 넣어두고 외가엘 다녀오셨는데, 그것으로 문을 발라버렸더란다. 그것도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거처하시는 사랑에. 부끄러워서 얼른 그 위에다가 다른 종이를 구해다가 덧바르셨는데 두고두고 알쪼근했다(아쉬워서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고. 지금 같으면 문짝을 통째로 떼어서라도 보관을 했을 거라신다. 그 말씀 끝에는 꼭 그 편지의 두 구절을 들려 주셨다. “다음부터 애서(슬픈 정서)에 접근하는 문구는 쓰지 말 것.” “잠 안 오는 밤, 공상 망상에 빠지지 말고 더 현실적인 것에 마음을 둘 것.” 어머니가 어떻게 하면 아버지 답장을 받아볼까 하고 이렇게도 써 보고 저렇게도 써 보았는데, 아버지의 감성을 건드리는 문구가 있었나 보다. 

 

유난히 땀이 많은 어머니는 여름방학에 아버지가 오시면 적삼을 곱게 다려서 주욱 걸어 놓고 수시로 갈아입으셨다. 행여 땀내라도 나면 아버지가 싫어할까봐. 그러다가 방학이 끝나면 훌쩍 서울로 가시는 아버지. 그렇게 8년을 지내셨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한 연후에야 큰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살림을 하러 가셨다고. 그간에 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준 것 중 하나가 바로 시조나 가사 외기. 어머니는 평소 집안일을 하시면서도 곧잘 시조와 가사를 외셨다. 내가 아픈 동안에도 여전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나 때문에 심히 괴로우신 건 아닌가보구나 싶어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심란한 마음을 달래시느라 이런 것들을 외셨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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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그 많은 시조를 외게 된 건 어릴 적에 하던 가투놀이 덕분이다. 가투는 시조 100수의 전문이 적힌 공책과 각 시조의 종장만 적어 놓은 종이를 가지고 하는 놀이다. 술래가 공책을 들고 시조를 외기 시작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해당 시조의 종장을 찾아서 줍는 놀이다. 그러니 많은 시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한 구절만 읽어도 종장을 찾을 수 있는 것. 그러다 보니 놀이에서 이기려면 시조를 많이 알아야 하고, 그렇게 놀이로 시작한 시조 외기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어머니의 일상이 되었다. 나도 학교에서 배운 시조보다 어머니에게서 들으며 외게 된 시조들이 더 많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어머니께 운을 떼 보았다. “길 아래 두 돌부처”라고. 그러자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벗고 굶고 마주서서 찬이슬 눈비를 일 년 내 맞을망정 평생에 이별루 없으니 그를 좋아하노라”를 이어서 외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늘 어머니의 시조 외는 소리를 들었다. 밥을 먹듯 물을 마시듯 어머니에게서는 끊임없이 시조가 흘러나왔다. 가끔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시조로 대신하기도 하고. 

 

오늘은 오랜만에 좀 느긋하게 일어나서 아침을 먹었다. 엄마는 기도를 하시고, 나는 그 옆에서 트임(당시 내가 운영하던 중학교 동창 카페)에 올라 있는 최신가요를 들으면서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 쌓아 두었던 책들을 정리하고, 이 방 저 방, 그래봤자 콧구멍만한 방 둘이지만, 밀대로 밀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가 흘러나온다. 엄마 기도에 방해될까봐 최대한 볼륨은 줄이고 카페에 글 한 자락을 올리고 있다. (……) 기도를 끝내고 일어서시면서 나보고, "또 컴퓨터 하나? 니는 컴퓨터 새다" 하시면서 갑자기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라는 시조를 외며 나가신다. 예사로 듣고 있는데 계속 반복하신다.

  글을 쓰다 말고 찔리는 데가 있어서 "엄마 그거 저 들으라고 하시는 거지요? 가사 다듬어 달라고." 그랬더니, 겸연쩍은 듯이 웃으면서 "그래" 하신다.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든다. (……) 엄마가 작년 겨울 동안 지은 가사가 있다. 작년 설에 내가 부르고 오빠가 워드로 치고 해서 겨우 한 작품 프린트해 드렸더니, 친구들한테도 부치고 아주 즐거워하셨다. 남은 글도 그렇게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내가 맨날 바쁘다고 하니, 자꾸 조를 수는 없고 속으로는 조바심이 나셨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밥 먹으면서 "식목일에는 수업 안 하제?" 그러셨는데 아마도 그거 정리해 주면 좋겠다는 뜻이셨나 보다.  (2002. 3. 30. 토)

올 들어 첫눈이 내렸다. 점심을 먹은 뒤, 엄마가 미장원에 가자셔서 현관문을 나서는데 눈이 어찌나 탐스럽게 내리는지. 행여 눈이 그칠세라,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 어느 새 분당 율동 호수로 접어든다. (……) 호숫가 키 작은 소나무에 눈꽃이 하얗게 피었다. 엄마가 시조 한 수를 읊으신다.

 

송림에 눈이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 가지 꺾어 내여 임에게 보내고져

임께서 보신 후에야 녹아진들 어떠리

 

나도 따라 읊는다. 

 

송림에 눈이오니 가지마다.....      (2004년 1월 12일 첫눈 내림)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은연중 내게도 새겨진 걸까. 나도 아플 때 시집을 소리 내어 외곤 했다. 그렇게 죽 외고 나면 기가 확 도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도 즐겨했다. 그러면 소화도 잘 되고 시간도 잘 가고 통증도 잊어버리고. 감이당 대중지성 1학년 1학기 첫 텍스트인 『열하일기』를 암송하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이후 늘 암송하는 게 즐거웠다. 맘에 드는 부분을 외고 또 외워서 막힘없이 암송하고 나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씻겨진 듯 가뿐하다. 어머니도 그랬을 것 같다. 시조를 외면서 외로움, 그리움, 막막함을 풀어내고 다시 힘을 내셨으리라. 

 

 

   

“엄마의 광복절”

 

"태극기 달아라" 하시는 엄마 소리에 눈을 뜨니 10시 10분, 어제 너무 일이 많아서 그랬는지 도무지 몸이 말을 안 들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텔레비전을 켰다. 이선희가 무슨 노래를 열창하고 이어서 광복절 노래를 부르고 안춘생 광복회 고문이 만세 삼창을 하고 식은 끝났다. 근데, 화면에 비친 모든 게 석고상처럼 보인다. 광복절 노래를 부르는 학생도 어른도 태극기를 흔드는 손들이, 달싹이는 입들이 꼭 움직이는 인형 같기도 하고 미이라 같기도 하고. 그 굳은 분위기, 어색한 표정, 썰렁~~~한 분위기. 저런 식의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싶고 오히려 광복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태극기를 안 달고 미적거리니 엄마는 또 그 광복절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하도 들어서 외워버린.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 그날이 칠월 칠석이었단다(오늘이 칠월 칠석이라며 더 좋아하신다). 낮에 읍에 내려가셨다가 밤이 돼서야 오시더니 큰할아버지 빈소에 들어가서, " 아이고 아배요, 해방됐니더. 아이고 아배요, 해방됐니더" 하며 곡을 하시더란다. 할아버지는 그날 밤 식구들과 일꾼들을 다 불러 놓고, “내일은 전부 일하지 말고 놀아라” 라고 하시고, 다음날 날이 새자 친척들 집을 일일이 다니시며 오늘은 일하지 말고 모두 읍에 놀러 가라 하셨단다. 온 집안에 일대 해방이 선포된 것. 엄마도 큰오빠를 업고 친척 아지매들하고 읍에 구경을 가셨는데, 그때는 얼마나 흥분이 되셨는지…. 일본놈들은 도망가고,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은 몽둥이를 피해 도망 다니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단다. (중략)

 

근데 솔직히 엄마는 해방이 되면 뭐가 달라지는지 잘 모르셨다고 한다. 3.1 운동이 있던 해에 태어나, 날 때부터 일제강점 하에 살았으니 그러실 만도…. 그래도 할아버지가 기뻐하시니 그게 엄청 좋은 일이고 이제 아주 좋아지나 보다 뭐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어찌됐든 엄마한테는 그 날의 해방이 정말 색다른 의미가 있었단다. 그 시절 농촌살이란 참 일도 많았는데, 그 고된 노동으로부터 하루 온종일 해방이라니…. 

 

엄마는 다른 날은 안 그러는데 광복절에는 꼭 태극기를 챙기신다. 점심에는 해방 기념으로 맛난 것 먹자고 하신다. 그날 엄마의 그 ‘특별한 해방’을 기념하며.    (2002. 8. 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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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평소에도 이야기하는 걸 즐겨하셨다. 주로 당신이 직접 경험하거나 자라면서 들은 이야기며 유머성 이야기들도 참 많이 해 주셨다. 어머니에게서 듣는 그 시절 이야기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소 판 돈을 가지고 밤길을 걸어도 안전할 만큼 치안이 잘 되어 있었던 좋았던 시절로 회상하기도 하고, 목화나 놋그릇 따위를 모두 공출하라며 집을 샅샅이 뒤진 날강도들이 날뛰던 시대로 회상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이념이나 사상, 애국 같은 거대 담론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어머니의 소중한 일상이 있을 뿐. 그래서 어머니에게서 듣는 역사는 교과서에서 배운, 일상과 유리된 화석화된 사건들의 나열과는 다른, 생생함이 살아 있는 텍스트였다.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언젠가부터 어머니가 책을 읽거나 공책을 펴고 뭔가를 쓰고 계신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마도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였던 것 같다. 아버지 가신 지 십 년 정도 흐른 뒤 지나가는 말로 슬쩍 비추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너무 외롭고 허전했지만 나이 든 사람이 주책이란 말을 들을까봐 내색을 못했다고. 어머니는 마음을 달래려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하셨던 것 같다. 책은 글자가 굵은 초등용을 주로 읽으셨다. 『백범 김구』, 『동학 농민 전쟁』, 『몽실 언니』 등등 역사 관련 책들을 좋아하셨다. 어머니와 동시대를 산 인물들이어서 더 실감이 난다시며. 『소설 목민심서』를 읽으신 뒤에는 남양주에 있는 다산 기념관에도 다녀오시고, 남한산성에 가면 역사관에 들러 벽에 써 붙여 놓은 이런저런 기록들을 하나하나 읽으시기도 하고. 80대 중반에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으신 뒤, 감명을 받으셨는지 옷가지며 소지품들을 모두 정리하시고는 무척 홀가분해 하셨다. 돌아가신 뒤 유품은 이부자리와 늘 입고 벗던 옷 몇 벌, 신발 한 켤레, 지팡이 하나, 작은 손가방, 약간의 소지품들, 『법화경』과 『소녀필지』, 그리고 어머니가 쓰신 글 몇 편이 다였다.

 

처음 글을 쓰신 건 2001년 겨울이다. 물론 편지를 더러 쓰기는 했지만, 특별한 대상 없이 당신의 감회를 적은 글은 이때가 처음이다. 외가에 다녀오신 감흥을 담아서 가사 한 편을 써서 친구분께 부쳤더니 그분이 달력 뒷장에 가사 한 편을 써서 보내오셨다. 그 이후로 몇 편의 글을 더 쓰셨다. 여행을 다녀오시거나 고향집에 다녀오신 뒤, 그 감회를 글로 적으셨고, 어린 시절에 놀던 이야기, 육십년 결혼 생활을 가사에 담기도 하셨다. 그 가사를 읽다 보면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진 삶을 보는 듯 낯설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겪은 이야기라 재밌는 텍스트를 읽는 듯했다. 어머니는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글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글 쓰는 걸 어려워하지 않으셨다. 사위의 극진한 마음 씀에 편지로 고마움을 전하기도 하고, 여든여덟 생신에 드린 내 편지에도 편지로 답해주셨다. 뉴스를 보다가 이해가 안 가는 용어가 나오면 그때그때 적어 두었다가 물어보셨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수업을 마치고 늦은 밤에 집에 오면 어머니의 질문이 적힌 수첩이 책상 위에 놓여 있곤 했다. 

 

어머니는 마흔에 나를 낳으셨다. 그러니 철이 들 무렵에 어머니는 이미 쉰을 넘기셨다. 쉰둘에 며느리를 보았고 곧이어 손주들이 연이어 태어났으니 일찌감치 할머니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어머니가 책을 읽고 글을 쓰시는 모습은 내게 참 다르게 다가왔다. 존경심이 생겼고, 존엄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아흔이 넘어서는 황반변성으로 글을 쓰는 것도 어렵고 책을 읽는 것도 힘들었다. 그 무렵 외사촌 올케가 어머니께 『법화경』 일부를 필사한 책을 선물했다. 어느 절에서 신도들이 돌아가며 손으로 베껴 쓴, 글자 크기가 큰 경전이었다. 그것을 읽고 또 읽으셨다. 신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어머니는 거기에 나오는 ‘비유품’의 ‘비유’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셨던 것 같다. 그 책을 두어 번 읽고 나서 그 의미를 이해하시고는 나에게 ‘화택’의 비유를 설명해 주며 무척 즐거워하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침대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법화경으로 굽은 등을 숙이고 한 손으로 덮인 눈꺼풀을 들고 법화경을 읽고 또 읽으시며 마음에 드는 구절은 외기도 하고 비뚤빼뚤 필사도 하고 손녀가 오면 필사를 부탁하기도 하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일흔 번 가까이 읽으셨다. 나중에는 우리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시력을 잃으셨는데도 맛있는 음식을 드시듯 읽기를 계속하셨다. 불법에 너무 늦게 맛들인 것을 아쉬워하시며. 

 

어머니는 아라비아 숫자를 배우지 못하셨지만 한글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며 가계부를 적으셨다. 그러면서 늘 말씀하셨다. 문서 기록을 공부처럼 하라고. 그리고 여수(주고받는 것)가 분명해야 한다며, 어머니 부탁으로 물건을 살 때는 천 원이라도 돈을 주셨고, 거스름돈이 남으면 백 원이라도 꼭 챙기셨다. 그리고 돈이라는 건 써야 채워지는 것이며, 아깝다고 꾹 쥐고 있다 보면 손가락 새로 다 빠져 나가고 나중에 손을 펴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따라가면 무리수를 두게 된다는 것. 돈도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가니, 백 원이라도 소홀하게 취급하지 말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런 말씀에 세뇌가 되어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줍는다. 10원이라도. 지난겨울 뉴욕에 갔을 때 맨해튼에 강풍이 불어 두 분 선생님 팔을 붙들고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저기, 동전 주워야 돼요”라고 소리쳐서 이 와중에 동전까지 챙기냐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같이 가던 선생님이 결국 그 동전을 주웠다.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해 힘들어 하셨던 것은 기대와 그에 따르는 집착과 서운함, 원망 같은 감정의 부대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법화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셨지만, 체력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당신 힘으로는 다스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어머니는 "내 마음이 자꾸 어디로 갈라칸다"는 말씀으로 당신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겨움을 토로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젊고 힘이 있을 때는 다른 활동들을 하면서 그 감정들을 이겨낼 수가 있지만, 어머니처럼 눈도 어둡고 귀도 어둡고 보행도 어려운 상황이 되면, 오롯이 자신이 그간 닦아온 정신의 깊이로 그런 감정들을 감당해야 하는구나, 얼마큼의 내공을 길러야 저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에 내게 하셨던 말씀, “기대가 젤 나빠. 다 아는데 안 그랠라 캐도 잘 안 된다. 니는 공부해서 내그치 살지 마라. 아무 기대도 하지 마고 살아라.” 어머니의 이 말씀은 아마 나에게도 평생 가져갈 미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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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많은 걸 공유했다. 삶의 지혜는 물론 죽음의 과정까지도. 어머니 덕분에 마지막 가시는 길에 우리들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어머니 가시는 길을 끝까지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도 병원을 들락거리며 고생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실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 자기 삶을 결정하는 일이 결국은 죽음을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니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는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라는 것을. 이제는 내 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는 두고두고 새롭게 읽을, 내게는 더 없이 소중한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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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는 결혼하지 않고 오로지 불법을 배우고 싶다는 원을 발하셨으니, 어머니는 틀림없이 그 길을 가시리라 믿는다. 부디 원을 이루시어 이 생에서 다 버리지 못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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