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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미증유의 공기가 폐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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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9-29 21:07 조회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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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공기가 폐속으로 들어왔다

박 성 옥

1. 기억의 소환

“나는 금년에 죽을지도 모른다.”
새해를 맞아 제자에게 보내는 연하장에 소세키는 이렇게 썼다. 1915년 48세가 되던 해다. 감기 한 번 걸리면 몇 개월을 바

깥출입을 못할 정도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소세키는 다음 해 세상을 뜬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예감하는 사람은 어떤 글이 쓰고 싶어질까. 소세키는 따뜻한 볕이 들어오는 유리문 안에서 수필을 썼다. 이

때 쓴 수필에는 유년시절의 회상이 많이 들어있다. 소세키는 어릴 적 부모에 대한 기억과 형제들과 지낸 시절을 담담하게 추

억한다. 그 중 한 대목이다.

아사쿠사에서 우시고메로 옮겨진 당시의 나는 어째선지 무척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은 누구나 쉬이 알아볼 정도로 뚜렷이 밖으로 드러났다... 내가 혼자 방에서 자고 있는데 머리맡에서 나지막한 소리로 연신 내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다...하녀는 어둠 속에서 내게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여기시는 분들은 사실 도련님의 아버지와 어머니세요. 아까 ‘아마도 그래서 저렇게 이 집을 좋아하는가 봐, 거참 묘하군.’하고 두 분이 말씀하시는 걸 제가 들었으니까 도련님에게 살짝 가르쳐 드리는 거예요.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돼요. 아시겠어요?” (나쓰메 소세키, 『유리문 안에서』,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17년, 84~85쪽)

한밤중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하녀에게서 꿈결처럼 자기 존재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 분들이 진짜 부모라면 그동안

아버지 어머니로 알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지? 소세키는 늦둥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50세, 어머니는 42세

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 나이에 임신하는 건 남세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기대수명이 50세 밖에 안 되던 시절이니 늦은

출산이긴 하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소세키는 한 살 때 다른 집의 양자로 보내졌다. 양아버지의 외도로 집안이 시끄러워

지고 양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소세키는 아홉 살 때 본가로 되돌아온다. 어린 소세키는 태어난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친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렀다. 본가로 되돌아왔지만 호적은 22세가 될 때까지 양부모의 이름 아래 남아있었다.

입양과 파양, 복적을 거쳐야 했던 곡절 많은 유년시절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을까.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그 무엇들이 한꺼번에 파열하는 순간 기억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과거와 인과관계가 없는 듯 보이는 현재는 가느다란

실로 이어져 있다. 수필 연재를 마치자마자 소세키는 『한눈팔기』를 쓴다. 『한눈팔기』는 소세키가 쓴 14편의 장편소설 중

에서 가장 자전적인 색채를 띤 소설이다. 자전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주인공 겐조는 소세키와 싱크로율 99%이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체험 위에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인지라 소설 속 주인공을 작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소세키와 가장

닮은꼴 인물인 겐조를 통해서 자연인 소세키의 감정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

소세키는 어릴 적 자신을 입양했던 양부모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낸다. 『한눈팔기』 는 36세 중년이 된 그의 앞에 소식이

끊어졌던 양부모가 나타나는 이야기다. 서로 잊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한 때는 부모 자식 관계였으나 사실 피 한 방울 섞이

지 않은 남남이다. 호적을 되돌린 지도 오래 됐다. 서류상으로나 법적으로나 모른 체 해도 무방한 타인들이다. 양부모와의

조우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헛된 인연이 질긴 인연으로 다시 봉합되는 순간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는지.

2. 도리냐 개인주의냐

소설은 ‘먼 데서 돌아온’ 겐조가 출근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먼 데’는 영국을 암시한다. (소세키는 1900년

9월에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 1903년 1월에 귀국했다.) 겐조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친척들 눈으로 보면 겐조는 출세

한 사람이다. 소위 서양물을 먹은 하이칼라 아닌가. 양행(洋行)까지 다녀왔으니 월급을 엄청 많이 받을 거라는 소문이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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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겐조는 돈에 쪼들렸다. 그는 일에 쫒기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녹초가 되었지만 쉬지도 못하고 책상 앞에 달

라붙어서 시험지를 채점한다든지 강의 준비를 해야 했다. 정작 쓰고 싶은 글을 쓸 여유는 없었다. 주변에는 온통 겐조에게

손을 벌리는 가족들만 있었다. 겐조는 배다른 누나에게 매달 용돈을 주고 있다. 천식에 걸려 헐떡거리는 누나는 용돈을 더

올려달라고 부탁한다. 매형이 누나를 발로 차고 두드려 패면서 용돈을 빼앗아 가는 걸 알면서도 겐조는 싫다고 거절하지 못

한다. 형도 가난했다. 어디 장례식이라도 가려면 겐조에게 낡은 외투를 빌려 입을 정도다. 한 때 고위직에 있었던 장인도 망

했다. 일자리를 잃고 미두(주식)에 손을 대는 바람에 빈털터리이다. 장인도 겐조에게 손을 내민다. 보증을 서달라고 졸라대

니 겐조는 할 수 없이 대출을 받아서 돈을 빌려준다. 아내도 돈이 없어 쩔쩔 맨다. 친정에서 가져온 옷까지 전당포에 맡겨서

살림에 보탠다. 아내는 곧 셋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늘어날 생활비가 걱정이다. 사교도 끊고 일만 하는 겐조는 삭막

한 광야를 걸어가는 기분이다. 소세키는 다른 글에서 이 당시의 심정을 말했다.

대학에서는 강사로서 연봉 800엔을 받았다. 아이가 많고 집세가 비싸 800엔으로는 도저히 꾸려 나가기 힘들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두세 군데 학교를 뛰어다니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넘겼다. 그 어떤 소세키도 이렇듯 분주하여 지칠 대로 지치면 신경쇠약에 걸리기 마련이다. (『유리문 안에서』, 117쪽)

이런 와중에 양아버지였던 시마다가 나타난다. 시마다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겐조를 찾아올 때마다 돈을 달라고 조른

다. 점점 액수가 늘어난다. 시마다는 다시 부모 자식의 연을 맺고 자신을 부양해달라고 한다. 그건 안 된다고 거절하자 시마

다는 큰 액수의 목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산 너머 산이다. 경쟁하듯이 양어머니도 겐조를 찾아온다. 한 때는 ‘가능한 부유

하게, 고상하게, 그리고 선량하게 보이고 싶어 했던 그 여자’에겐 시골노파의 행색이 완연하다. 양어머니는 송구해하며 겐

조 앞에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을 보는 겐조의 마음은 불편하다. 겐조는 그녀가 찾아올 때마다 “실례지만 인력

거라도 타고 가시지요.”하며 5엔짜리 지폐를 건네준다. 형, 누나, 매형, 장인어른에 양아버지, 양어머니.... 사방에서 돈을

달라고 조른다. 한 마디로 겐조는 삥 뜯기는 남자이다.

양아버지를 만나니 지금까지 잠자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자식이 많았던 친아버지에게 겐조는 조그마한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친아버지는 나중에 신세를 질 장남이라면 몰라도 다른 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돈을 쓰는 걸 아까워했다. 양부모에게

겐조를 맡길 때 친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었다. 어쩔 수 없이 겐조를 다시 거두게 되자 애물단지를 떠맡은 듯 무뚝뚝하게 굴었

다. 겐조는 변화하는 친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정나미가 떨어졌다.

엄밀히 말해 겐조에게는 양부모에게 갚아야 할 빚이 없다. 양부모를 돌볼 책무도 없다. 호적을 되가져오면서 겐조를 키워주

었던 양육비를 충분히 갚았던 것이다. 인연을 끊는 조건으로 양부모에게 돈을 주고 증서도 교환했다. 자식을 두고 상품처럼

돈이 오갔다. 부모 자식관계가 교환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겐조는 일찌감치 몸으로 체득했다. 유년기의 체험 때문인지

소세키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돈의 흐름에 주목했다. 소세키의 소설은 이해관계에 얽힌 인간의 감정을

신랄하게 묘사한다.

겐조는 양부모가 성가시다. 우리의 인연은 진작 끝났다고 외면하고 싶다. 그는 자신을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자

조한다. 하지만 겐조는 그들을 박절하게 내치지 못한다. 계속 돈을 줄 필요가 있느냐고 아내가 잔소리를 하면 겐조는 버럭

성질을 낸다. 만만한 게 마누라다. “사람의 도리가 그런 게 아니니까....” 겐조는 속으로 우물거린다. 그는 옛정을 뿌리칠

수가 없다. 도움을 청하는 친인척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결국은 다 도와준다.

부모자식도 부부도 연인도 모두 화폐관계로 치환된 지 오래다. 겐조는 충효의 도리와 개인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대다.

전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왔던 효의 의무에 대해 환멸의 감정을 느낀다. 철저하게 자기 실속을 차리는 개인주의자가 되기엔

너무 무르다.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한 근대인이 될 수 없다. 환멸과 연민이 교차할 때 신경이 갈가리 찢긴다. 전통적

가치와 개인주의가 부딪히는 균열이다. 도의와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은 소세키 소설의 전형성으로 나타난다.

3. 작가의 탄생

겐조는 양아버지에게 목돈을 주고 지긋지긋한 인연을 정리하고 싶다. 마침내 그는 원고지를 앞에 두고 펜을 든다. 원고료를

벌기 위해.

​건강이 점차 나빠지고 있다는 불쾌한 사실을 알면서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는 맹렬하게 일했다. 마치 자신의 몸에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위생을 학대라도 하는 것처럼, 또한 자신의 병에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피에 굶주렸다. 게다가 남을 도륙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피를 빨며 만족했다. 예정한 매수를 다 썼을 때 그는 펜을 던지고 다다미 위에 쓰러졌다. “아아, 아아” 그는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한눈팔기』, 283쪽)

글을 쓰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짐승처럼 신음하는 소리가 처절하다. 겐조는 알고 있다. 돈을 준다한들 인연이 매듭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활고를 압박해서 소설가의 재능을 촉발시켰으니 양부모와의 인연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나 할까.

바로 이 장면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위대한 작가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1904년에

잡지 <호토토기스>에 연재되었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불멸의 대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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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는 한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그 어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이는지 증언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작가의 사생활을 엿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세키는 국비유학을 2년 다녀왔으니 그 두 배인 4년을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근무해야 했다. 의무연

한을 마치자 그는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한다. 매년 장편소설 한 편씩 쓰고 연봉 2400엔을 받는 조건이다. 사람들은 제국대학

교수의 명예를 버리고 일개 신문사에 들어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소세키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학교를 그만둔

다음 날부터 갑자기 등짝이 가벼워지고 폐에는 미증유의 엄청난 공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소세키는 억눌려 있던 것을 토해내듯이 맹렬하게 소설을 써내려갔다. 훗날 소세키 아내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남양진주조개로 만든 펜대로 글을 썼는데 손가락이 닿는 부분이 닳아서 둥그스름하게 패어있었다.”(나쓰메 교코, 『나쓰메 소세키, 추억』,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6년, 168쪽) 소세키는 뭔가 쓰지 않으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문예 저술을 생명으로 삼는 소설가보다 명예로운 직업은 없었다. (2017.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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