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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인디언 추장의 존재 양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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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8-25 09:13 조회1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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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추장의 존재 양식 (2)


임경아



3. 위신과 권력, 그 아슬아슬한 경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분쟁에서 추장의 중재에는 실효성 있는 수단이 없고, 그의 말을 명령권과 다른 지평에 놓여 있다. 이것은 추장에게서 완벽하게 권력을 분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재능과 재화를 아낌없이 내주어야 하는 추장에게는 위신만이 허락된다. 위신을 의역학적으로 풀이하면 재성이 관성으로 순환하여 추장의 관(官)이 명예나 책임감으로 작동하는 것까지는 허용하지만 지배욕이 되는 것은 딱 자르는 것이다. 거기에 말하기를 권력과 다른 지평에 놓는 것은 식상의 활용으로 볼 수 있다. 식상은 욕구와 재능을 의미하며, 표현력 등 언어를 쓰는 것과도 연결된다. 흔히들 하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는 다 근거가 있는 말이다. ^^ 이것은 식상 발달인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로, 하고 싶은 게 많으면 그런 욕구 가운데 하나인 식욕도 많다는 말이다. 사실 식상이 재성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이것저것 찔러보기만 하고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자기 절제력이 떨어져서 책임지지 못할 말을 뱉는다는 문제가 있다. 때문에 식상의 상(傷)은 명예에 해당하는 관(官)은 극하여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체면, 명예를 중요시하는 추장에게 식상에 해당하는 말하기 의무를 부과하여 관을 제어하는 방식이 말이다. 물론 추장은 식상이 재성으로, 재성이 관성으로 제대로 순환해야 맡은 일을 수행할 수 있기에 식상이 관을 상하게 하는 형태로 함부로 쓰지 않겠지만, 여하튼 말하기를 명령과 분리하고 이야기와 연결한 것은 식상을 활용하여 관을 제어하는 방식이다.
이런 모든 장치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면 효율적인 작전수행이 중요하므로 일시적으로 전시 추장에게 명령권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들에게 전쟁은 상시적이었는데, 어떻게 전시 추장에게 집중된 힘을 매번 일회성으로 한정하여 상시적인 권력이 출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제는 대중영화에서도 남북한의 군부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전쟁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틀에 박힌 영화적 장치로 느껴질 정도이지만, 아직도 한반도에서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전쟁위기설이 떠도는 경우가 있을 만큼 전쟁은 권력의 집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유능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는 전쟁에서 조선을 지켜낸 이순신에게 권력이 이동될까봐 그렇게 질투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영화 “허트 로커”는 이라크전을 배경으로 폭발물 처리반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사실적인 묘사 덕분에 등장인물이 느끼는 긴장과 불안감이 그대로 전달되어 관람 내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본국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살던 주인공이 일상의 무료함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다시 전장으로 떠나는 모습에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의문이 꽤 오랫동안 남았었다. 영화 시작부에 나오는 대사는 “전투의 격렬함은 마약과도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 이다. 이처럼 전쟁 특유의 긴장감 안에서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아파치족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처럼 놀라운 전투력에 부족민들에 대한 설득 능력까지 겸비하여 전시 추장으로 추앙받는 경우 자기 존재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전쟁 상황과 그에 따른 권력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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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쟁 특유의 긴장감?

그의 전쟁에 대한 욕망이 사회의 전쟁에 대한 욕망과 일치하는 한에서 사회는 그를 따른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추장의 욕망이 사회의 평화에 대한 욕망을 압도하려 하게 될 때 – 실제로 항상 전쟁을 원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추장과 부족의 관계는 역전되고, 지도자는 그의 개인적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회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런데 원시사회의 추장은 권력 없는 추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추장이 자신의 욕망을 위한 명령을 그것을 거부하는 사회에 도대체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중략> 원시사회는 위신에 대한 욕망을 권력에 대한 의지로 대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260쪽)

결국 추장은 부족의 도구일 뿐, 부족을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 수는 없다. 부족민들은 거울처럼 추장의 욕망을 투명하게 비추어, 추장이 그들을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4. 고귀한 삶에 대한 욕망

처음 인류학 세미나를 할 때 추장에게 부과된 수많은 의무들을 확인하면서 우리끼리 했던 말이 이렇게 할 일은 많고 대가는 없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추장을 할까? 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우리는 이미 체면, 평판, 명예라는 말보다는 돈에 몸이 더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재화를 부족민들에게 무제한 오픈해야 한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 황산벌에서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쟁에 나가겠다는 계백(박중훈)에게 그의 아내(김선아)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호랑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것이여 이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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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뭣이 중헌디!!


그만큼 근대 이전 이른바 사회 지도층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질 만큼 우선시되는 가치였다. 그래서 장자는 공자로 대표되는 유학자들을 그렇게 공격했나보다. 예를 들면, <사기>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신하가 군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주나라의 녹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먹다가 굶어죽었다. 유학자들이 숭상해 마지않는 백이, 숙제에 대해 장자는 그들이 인의(仁義)라는 대의명분을 위해서 굶어 죽은 것과 도척이라는 자가 재물을 탐하다 죽은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한다. 생명의 본성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은 같다는 것이다. 어쩌면 장자는 백이, 숙제를 공격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삶은 훌륭한 예시일 뿐 모든 사람에게 맞는 모범 답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각자 타고난 성향과 기질은 고려하지 않고, 유학자들의 인의 프레임에 갇힌 백이, 숙제를 기계적으로 따르면 자신의 생명력이 잠식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여하튼 그럼에도 이들은 명분을 추구하여 이름을 남길 수도 있고, 관직에 오르면 공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추장은 아무리 잘해도 대대손손 추앙하는 것 같지도 않고, 책임만 있고 권력은 없는 존재이다. 그 어떤 사회 체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다시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추장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하고 싶어 할까?


가장 강한 자로서 가장 정신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파멸하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즉 그들은 미궁에서, 자신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혹독함 속에서, 시험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들의 기쁨은 극기다. 그들에게는 금욕이 천성이고, 욕구이고, 본능이다. 그들은 어려운 과제를 하나의 특권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짓눌려 죽을 수 있는 짐을 가지고 유희하는 것을 하나의 기분전환으로 생각한다. (<안티크리스트>, 니체, 145쪽)

다른 사람들이라면 포기할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추장과 딱 들어맞는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딱히 외부에서 주어지는 혜택(?)이 없는 상황에서 추장노릇을 하는 것은 내적 보상, 즉 존재 역량을 넓힐 때 느끼는 기쁨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사주명리상 관성(官性)은 조직, 사회적 관계, 시련, 불편함을 의미한다. 직장이나 명예 등은 나 자신을 뜻하는 비겁을 극(克)하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행복이란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관성이 어떻게 인성(印性)이라는 삶의 지혜로 순환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 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인생에서 역경을 많이 겪을수록 성숙은커녕 자기만 힘들게 살았다는 자기 연민이나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와 같은 꼰대질만 남게 된다. 관성에서 인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선이 전적으로 안으로 향해야 한다. 나에게 발생한 많은 사건들을 감정적, 즉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일단 판단을 멈추고, 수많은 조건들이 서로 얽혀 있는 관계의 장 안에서 사건을 인식할 수 있는 통찰력이 인성의 힘이다.
결국 우두머리를 해보고 싶은 관성의 욕망에서 추장이 되었어도 그 힘이 인성으로 순환하지 않으면 추장 자리에 있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관성의 시련을 발판으로 사유의 지평을 넓혀가는 힘. 이를 통해 자기 존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니체의 표현을 빌면 힘에의 의지가 고양된 상태, 고귀해지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장에게 부과된 의무가 너무 많아 고단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그는 고귀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충만한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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