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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하오 공자, 짜이찌앤 <논어> | 닌하오 공자, 짜이찌앤 <논어> #20/공자와 그 제자들 - 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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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2-05 17:11 조회1,2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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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하오 공자, 짜이찌앤 <논어> #20

- 3부. 제자들 ; 천 개의 물음, 천 한 개의 대답​

 

 

 

문리스 (남산 강학원 대표회원)


자로(9) - 공부 공동체=유가(儒家)의 스펙트럼

 

유학은 ‘배움(學)’을 공동체의 무기로 삼았던 최초의 학단(조직)입니다. 물론 공자가 활약하던 시기까지는 사실 다른 조직이랄 게 없는 시기였습니다만, 저는 공자 사후 오래지 않은 시기에 여러 다른 조직들이 등장했던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제자백가 그룹들이 저마다 강조하던 안목과 처방은 달랐지만, 어찌 보면 이 동아시아 세계에 ‘배움’이라는 유전자만큼은 일종의 공통 감각이 된 것이 아닌가.

 

유학은 이전에 한 번 말씀 드렸지만,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즉 글씨 대신 써주고, 주산 같은 걸로 숫자 맞춰주고, 마차 대신 몰아주고, 활 쏘고(보디가드?) 뭐 그런 일을 하면서 생계형 일자리를 꾸렸던 집단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 가운데 배움이 있다는 걸, 늘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배움’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학단=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단이 나라, 신분, 나이 등을 가볍게 넘어섰던 것은 확실합니다. 요컨대 배움 공동체라고 할까요. 제가 있는 남산 강학원도 저희끼리는 보통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소개합니다. 뭐 저희가 공자의 후예라거나 이런 뜻이 아니구요, 여하튼 저희도 공부를 베이스로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배움'의 의미에 대해 묻게 되곤 합니다. 배운다는 게 뭔가,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일견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지식 형성을 위한 배움 이전에 좀 더 근본적인 것이지 않을까 싶어요. 어찌 보면 훨씬 더 소박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어른=스승'의 말씀을 얼마나 자기의 삶에서 잘 실천해볼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죠. 만일 그런 점에서라면 자로는 누가 뭐라 해도 공문 제자들 가운데 한 손에 꼽힐만한 최고 중의 최고 제자라는 점에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문에서 자로라는 제자는 또한 이런 인물이기도 한 겁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자로는 동네에서 불량스럽게 껌이나 씹고 다니면서, 골목 하나 차지하고는 지나는 사람들한테 삥이나 뜯으며 뒤에서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인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자로가 어떤 인연으로 일생일대의 스승을 만난 겁니다. 그리고 동료=후배=동생=제자 기타 등등의 인연들을 만났죠. 그리고 자로는 자신의 능력(?)을 극적으로 변환시킵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평생을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입지전적 인물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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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불량배에서 공문의 제자로~
 

 

저는 <논어>라는 책 안에서 제자로서 자로가 맡고 있는 캐릭터는 이 지점에 하나의 포인트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앞서 만났던 안회 같은 인물은 스승에게 배워 스승을 뛰어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스승의 말씀은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직 검증(?)이랄까 그런 게 사실 없다면 없는 말씀들인 거죠. 그런데 안회가 그 말씀들을 착착 실현하는 삶을 삽니다. 요컨대 안회 덕분에 공자의 말씀들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고상하고 이상적인 말씀이 아닌,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가야하는 말씀이 되었더랬죠. 

 

그럼 자로가 보여주는 지점은 무엇이고 어디일까요. 자로는 <논어>에서 여러 번 스승 공자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는 제자입니다. 하지만 또한 자로는 스승 공자가 흔들릴 때마다(성인 공자께서는 은근히 자주 흔들리십니다^^) 거의 유일하게 이 스승의 강력한 지짓대이자 약한 고리를 문제 제기하는 매서운(!)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자로니까 가능한 거란 말씀입니다. 앞뒤 없고, 계산 없고, 선명하고, 뒤끝 없는 자로이기에 가능한 거죠. 

 

예컨대 위나라에서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가 공자를 만나려 했을 때 세간에선 말들이 많았습니다. 공연히 만났다간 스캔들이 날 수도 있는 상황 같은 뭐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남자를 만나러 가려고 합니다. 자로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결국 남자를 만나러 다녀오죠. 그런데 여전히 자로가 퉁퉁 부어 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남자와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하늘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조금 유치하긴 합니다만 이런 식의 말입니다 “내가 남자랑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 성을 간다...” <논어> 안에서 공자가 자로 앞에서 쩔쩔매는(^^) 대목들이 서너 군데 나오는데, 전부 공자의 어떤 정치적 행보에 자로가 강력하게 반대를 하는 대목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로(10) -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 품고, 달리고!

 

또 한 번은 공자가 살던 노나라에서 공산불요라는 인물이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가 또 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자로가 또 막아섭니다. ‘까짓것, 불러주는 데가 없으면 안 가면 그만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른다고 그런 자리엘 갑니까?’ 공자는 이번에도 자로를 달랩니다. “자로야, 공산불요가 나를 모르고 부르겠느냐? 나를 부른다는 건, 모르긴 몰라도 내가 뜻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뜻이겠지.” 이런 대목도 듣기에 따라선 공자께서 상당히 쩔쩔매며 자로에게 이해를 구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필힐이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께서는 또 몸을 움직이려 합니다. 이쯤 되면, 공자님 부르면 오시는 분 맞죠? 우리가 불러도 오실 겁니다. (웃음) 단 공자를 부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미리 생각해봐야 합니다. 필힐의 쿠데타 때에도 역시 또 막아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겠어요? 예, 자로가 죽으라고 막아서죠.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왜 가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공자의 변명도 압권입니다. 자신은 갈아도 닳지 않고, 물들이려 해도 물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니 걱정하지 마라... (웃음)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여하튼 자로는 이 몇 개의 빛나는 대목들에서 다른 어떤 제자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스승 공자 앞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라니요! 그게 가능한 사제 관계라니요.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절대 아니거든요.

 

다시 말해 자로는 이 위대하고 거침없는 거대한 거인 스승을 막아설 수 있는 단 한 명의 용감한 제자입니다. 평소에는 비록 실수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굽히지 않고 솔직하고 정정당당하게 묻고 배우는 제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자로는 비록 건달 출신의 비천하고 미천한 인물이었음에도, ‘사람은 이런 배움이나 이런 계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다.’라고 사실을 실증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공문은 한 사람을 얼마나 큰 스펙트럼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그런 의미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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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밟을 때와 엑셀레이터 밟을 때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로의 그 거침없음, 엄하고 까마득하고 넘볼 수 없는 스승이고 그런 스승이기에 질문할 때마다 매번 혼나면서도 매번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또 그런 이유로, 스승에게조차도 자기가 배운 것과 다를 때면 끝까지 마음에서 설복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불굴의 정신, 그런 게 자로라는 인물이거든요. 그런데 자로는 어떻게 그런 활동이 가능했을까요. 자로의 개인적 기질도 기질이지만, 거기에는 역시 스승 공자라는 넘사벽 울타리 아니 브레이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자로가 자기 기질의 역량을 다 폭발할 수 있도록 품어줄 만한 그릇, 그게 공자였던 겁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부터 조금 다른 것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방금 브레이크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우리는 점점 속도를 올릴 수 있는 건 어떤 이유일까요. 자동차를 시속 150킬로 200킬로까지, 무슨 자동차 대회에서는 더 300킬로도 나가는,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속도를 우리는 겁도 없이 밟을 수 있을까요? 굉장히 좋아졌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죠. 왜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고 거침없이 뭔가를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마음껏 펼칠 수 있다.’라고 하는 마음이 드는 건, 내가 최소한 시궁창에 빠지려고 하면 우리 스승이 그걸 절대로 그냥 보고 계시지 않는다. 내가 개차반 같은 일을, 사람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못할 수도 있는데, 내가 정말로 못난 짓을 하면, 그걸 스승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그 믿음이, 공자라고 하는 브레이크가 논어라고 하는 이 안에서 자로라고 하는 캐릭터를 가능하게 해주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거꾸로 공자라는 사람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은 여러 제자들이 이 하나의 문화 안에서 이 다양한 개성들을 이 안에서 모아낼 수 있는가. 이걸 다 모아낼 수 있는 이 스승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는 걸, 우리는 역으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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