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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처음으로 한 개 사람으로 된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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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민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5-27 10:12 조회2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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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홀로 서기(1988년 ~ 1997년)

 

‘처음으로 한 개 사람으로 된 것 같은’

 

 

“내 뭐 하꼬?”

무릎 수술을 하기 전,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던 때에도 늘 일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병에 짓눌려 다른 일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차츰 통증에 익숙해지자 무료했고 부모님께도 죄송했다. 아버지 퇴직 시기는 다가오는데 월급은 대부분 치료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내 뭐하꼬?”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신문을 유심히 살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계 부업 하나를 구해오셨다. 수출용 안경테에 검은 가죽을 붙이는 일이었다.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한 일이었다. 꼼꼼하게 각을 딱딱 맞추는 내 성격으로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침대 위에 작은 책상을 놓고 조금 하고 누웠다가 다시 하기를 반복. 힘은 들었지만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게 즐거웠다. 

 

그러기를 사흘쯤 했을까? 본드 냄새 때문에 구토가 심하게 일어났고,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가죽을 오리고 붙이느라 용을 써서 그런지 마지막 날엔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어려웠다. 하루에 천 원 꼴로 삼천 원을 벌었다. 이게 내가 일해서 번 최초의 돈이구나! 뿌듯했다. 그러나 더 이상 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말로 하는 것. 시각장애인 협회에 전화를 걸어 음성책자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건 따로 마련된 녹음실에 가서 해야 한단다. 하는 수 없이 점자 봉사를 신청했다. 점자를 찍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손목이며 손가락이 퉁퉁 부은 걸 본 봉사자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렇듯 늘 일이 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랬던 터라 이제 조금이나마 걷게 되자, 그리고 이제는 병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게 되자, 더욱 일이 하고 싶었다. 수술을 하고 걸음마를 시작한 지 6년쯤 지난 94년 봄, 고향 부모님께 가서 잠시 지내고 있었는데 거기서 신문에 난 ‘독서 지도사’ 모집 공고를 보았다. 휠체어를 타고서도 늘 ‘뭐하꼬’를 뇌이던 나에게 평소 하고 싶었던, 책과 관련된 일이 나타났으니, 그리고 이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기까지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릎 정기검진도 받을 겸 해서 고향에 다니러 온 큰오빠를 따라 상경했다. 목발을 짚은 채 역삼동에 있는 ‘한우리 독서문화운동본부’를 찾아갔다. 상담 후 통신으로 수강할지 직접 출석 수업을 들을지 고민해 보기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출석 수업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상태로는 좀 무리였다. 양약 복용을 끊은 후라 일상생활을 겨우 영위할 뿐 여전히 오전에는 관절 강직으로 힘이 들었고 통증들이 전신 관절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통증 때문에 괴롭기도 하고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해서 얼마 전 지인이 권해 준 한양대 류머티스 내과 진료를 받아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왕에 약을 끊었으니 조금 더 참고 지내보자는 마음도 없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가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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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출석 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 곡절은 좀 있었다. 적극적이신 어머니는 뭐든 생각하는 대로 해 보라고 격려해 주셨지만, 아버지가 문제를 제기하셨다. 아이들 독서지도를 하겠다는 걸 반대하신 게 아니라, 6개월이라는 기간을 그렇게 힘들게 그 교육을 굳이 받으러 다녀야 하는가 하는. 대학까지 다녔으면 그 동안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했을 뿐만 아니라, 전공이 국문학이라면 어느 정도 그 분야에 소양을 갖춘 걸로 생각하는데 왜 굳이 위험하게 거길 오가려 하느냐는 말씀이셨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걱정이시다. 당시 나는 아직 혼자서 걷는 게 완전하지는 않아서 비라도 오는 날이면 외출이 힘들었고 가끔은 목발을 짚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출석 수업을 받으려 했던 건 다른 측면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대학 2학년 때 류머티즘을 앓기 시작한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병원 생활을 한 게 바깥 생활의 전부인 내게 사회로 나가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산다는 건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몸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지 않은가. 이런 내 생각을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내 처지를 이해해 주셨다. 아버지도 내가 뭔가를 하면서 살기를 누구보다 바라셨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분이셨기에 걱정이 되셨던 거다.

 

독서지도사 과정에 등록을 하고 류머티스 내과를 찾아 진료를 받았다. 그 병원에서 처방한 특효약은 면역억제제인 MTX(메토트렉세이트). 말 그대로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약이다. 류머티즘을 항체가 자기 몸을 공격해서 생기는 질병이라 보기 때문에 그 공격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복용 이후 첫 일 년은 감기를 달고 살았고 속도 울렁거렸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그래도 이 약을 먹으면서 94년 10월부터 이듬해인 95년 4월까지 6개월간 독서 지도사 과정을 무사히 마쳤고 사람들도 사귀었다. 그렇다고 바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아이들은 어떻게 모아야 할지 거쳐야 할 과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어디서건 경험을 해야 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냥 주저앉을 것 같았기에. 

 

때마침 경기도 수지에 있는 한우리 지부에서 교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단 갔다. 가서 원장을 만나 의사를 말했다. 강사료는 받지 않아도 좋으니 아이들을 가르쳐 보고 싶다고. 마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는 두 명의 남학생이 있으니 가르쳐보겠냐고 했다. 학원에서도 두 명을 가르치기 위해 강사를 구하기에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고, 그냥 내보내자니 중등 담당 강사가 없다는 소문이 나면 학원 이미지에 타격이 있을까봐 고민 중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중학생 둘을 맡게 되었고 수업은 재미있었다. 아픈 동안에도 방학이면 늘 조카들과 같이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며 시간을 보냈기에 아이들과 소통하는 게 그다지 생소하지도 않았다. 학원에서도 두 명이 내는 수강료를 모두 내게 주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안경다리 부업 이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돈이다. 그 학원에 다니는 동안 분당에 살던 셋째오빠네 집에서 지냈다. 갈 때는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혼자 갔고 올 때는 오빠가 퇴근길에 데리러 왔다. 그렇게 한 6개월을 다닌 뒤 다시 큰오빠네 집으로 왔다. 이제 뭔가 하면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조금씩 더 생겼다.  

 

그런데 교통편을 이용하는 게 쉽지 않았다. 늘 택시를 타고 다닐 수도 없고 버스를 이용하자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요즘처럼 정류장에 의자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다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버스를 타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교통 체증으로 시간에 쫓길 때면 내리는 사람이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지 않은 정류장은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였고, 정류장에 선다 하더라도 일정하게 서는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저만치 지나가서 서기도 하고 정류장에 채 도착도 하기 전에 사람을 태우고 가버리기도 했다. 한 마디로 기사 맘이고 정류장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야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러니 뛰기는커녕 빨리 걷기도 어려운 내가 버스를 타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운 좋게 탔다 하더라도 내리는 건 더 무서웠다. 보기에 멀쩡해 보여서인지 내가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질 않았다. 한 발을 겨우 땅에 딛고 미처 완전히 내려서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할까봐 여간 조마조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채 내리지도 않았는데 기사가 문을 닫으려는 바람에 승객들이 소리쳐서 겨우 사고를 면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어제까지 있던 횡단보도가 사라지는 일도 많았다.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육교를 세우려고. 그럴 때면 정말 화가 났다. 육교를 건너기 어려운 사람은 오래 기다리더라도 횡단보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몇 번 무단횡단을 하다가 운전면허를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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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독립

독서지도 워밍업도 했고 운전면허도 받았으니 일할 준비는 완료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독립을 거론하셨다. 나도 오래 전부터 바라던 바였다. 친구들처럼 내 살림을 직접 꾸리며 살아보고 싶었다. 아버지와 큰오빠는 반대를 했다. 경제적으로도 이중의 돈이 들고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사는 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우리 세 식구는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서울 큰오빠네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들이 돌아가신 뒤 독립을 하게 되면, 내보내는 오빠도 마음에 걸리고 나가는 나도 서러울 거라며, 당신들이 계실 때 독립을 하는 게 옳다는 것, 그리고 조카들이 하나 둘 시집을 갈 때가 됐으니 내가 독립을 하는 게 피차에 편하다는 논리로 아버지와 오빠를 설득했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조카의 신랑감이 드나들자 오빠네 식구하고만 살 때와는 달랐다. 내가 군식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1996년 6월 22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했다. 비록 큰오빠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얻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로지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살게 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딱히 일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어린 시절부터 늘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북적대며 살던 터라 적응이 잘 안 됐다. 특히 해가 지고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분주하고 초인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때면 혼자라는 게 확 느껴지면서 허전했다. 그해 여름 방학엔 언니네 아이들 남매가 와서 같이 지냈다. 그러면서 고등학생 언어영역 과외를 하던 친구 소개로 독서 그룹 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곳은 과천이었고 처음 독서지도를 시작한 곳은 대치동이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게 힘도 들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러던 차에 그룹이 늘어나면서 개포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우연히 깨끗한 소형 중고차 한 대를 비교적 싼 값에 사게 됐고, 다니기가 한결 수월했다. 

 

처음에는 수입에 맞춰 가계를 계획했다. 필수 생활비를 분야별로 책정하고 그걸 4주로 나누어 한 주 분의 돈을 쓰고 나면 다음 주가 될 때까지 지출을 하지 않았다. 식비가 초과하면 냉장고에 있는 걸로 최대한 간소하게 먹었다. 오빠네가 때때로 갖다 주는 음식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때로는 오빠네 집에 가서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점차 학생들이 많아졌고, 같이 교육을 받고 수업 연구를 함께 하던 동료에게서 소개를 받아 잠원동 쪽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러면서 내가 독서지도사 과정을 이수했던 단체에서 교재도 만들고 독서지도사 양성 과정 강의도 하게 되었다. 일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수입도 늘어났다. 전문 분야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성인이 된 듯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번 돈으로 병원 진료비를 내던 그날의 뿌듯함이라니! 83년 봄, 두 발로 서서 대구 파티마 병원 수녀원 뜰의 감나무를 바라보던 그날과는 또 다른 기쁨. ‘처음으로 한 개 사람으로 된 것 같은 자신(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복녀’의 독백)’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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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걷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까지 스무 해 가까이 걸렸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81년 겨울, 코르티솔(스테로이드호르몬) 주사 부작용 때문에 풍선처럼 부푼 몸을 한 채, 큰오빠의 책꽂이에 꽂힌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놓고 지구본을 돌려가며 세계 일주를 꿈꾸던 일, 얼른 나아서 돈도 벌고 독립도 해서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여행을 가겠다던 호언장담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시며 측은하게 바라보시던 부모님의 걱정 가득한 눈빛. 이제 병과 싸워 이기려던 그 숱한 날들은 지나갔다. 이제 병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공존이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내 힘으로 돈을 벌고 내 삶을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는 데서 오는 충만감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거기엔 단순히 돈으로는 환산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병상에서 보내던 그 시절,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두 다리로 우뚝 서서 ‘친구’와 우리의 앞날을 이야기하며 나란히 걷는 것. 아마도 직립을 하는 인간에게는 혼자서 자신의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유전 정보가 있는 듯하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혼자서 서고 걸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걷고 또 걷는 게 인간이다. 신체적인 홀로서기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홀로서기에 대한 열망 또한 인간이 가진 기본 욕구가 아닌가 싶다. 이 욕구가 충족될 때 비로소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고 그래야 진정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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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걷고 있을 때일지도 몰라. 왜냐하면, 연인들도 걸으면서 장래의 일을 이야기하잖아." (일본 드라마 <1리터의 눈물>의 주인공 ‘아야’가 휠체어를 밀어주는 남자 친구 ‘아소’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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