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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유식(唯識)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 괴로움(苦), 그것을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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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21 15:51 조회1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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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

불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괴로움(苦)’이다. 부처님은 일체가 괴로움(一切皆苦)이라고 했다. 일체가 괴로움이라니. 세상엔 기쁜 일도 많고, 평안한 일도 많은데 어떻게 일체가 모두 괴로움인가. 인생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무엇을 그렇게 괴롭다고 하는가 하고 들여다보면, 먼저 태어나는 것(生)부터 괴롭단다. 태어남이 괴롭다는 것은 이해된다. 태어남으로 인해 각종 일들이 벌어지니 굳이 따지자면 태어남은 괴로움의 시작이다. 그다음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이 모두 괴로움이라 한다. 늙음, 병듦, 죽음이 괴로움이라는 것도 동의 된다.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늘 건강하고 생생한 삶을 살고 싶은데 몸은 늙어가고 병든다. 그리고 이 삶이 전부 라고 생각했는데 언제가 이 삶을 놓고 사라져야 한다. 생로병사를 네 가지 괴로움(四苦)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육체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육체는 그 자체로는 괴로우니 어쩌니를 알 수 없다. ‘괴롭다’라고 하려면 그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아는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로병사가 괴로움이라는 것은 육체의 변화를 분별하여 변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 마음이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어쨌든 앞의 네 가지 괴로움은 육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괴로움이라면, 이 육체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여러 행위에서 오는 괴로움도 있다. 먼저, 좋아하는데 헤어져야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인 애별리고(愛別離苦)이다. 반대로 싫은데도 만나야 하는 괴로움인 원증회고(怨憎會苦)도 있다. 그리고 얻고자 하는데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 구부득고(求不得苦)도 있다. 인생에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구하고자하나 얻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만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행위를 괴로움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오음성고(五陰盛苦)라는 괴로움을 얘기한다. 이로써 그 유명한 팔고(八苦)가 완성되는데, 오음성고에서 오음은 오온(五蘊)을 말한다. 오온은 ‘나(我)’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蘊)이다. 육체인 색(色)과, 정신인 수(受), 상(想), 행(行), 식(識). 그러니 오음성고는 인간의 육체 그 자체뿐만 아니라, 뭘 느끼든(受), 뭘 생각하든(想), 뭘 의도하든(行), 뭘 인식하든(識)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헤어짐, 만남, 구함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여기다 오온, 즉 육체로 뭘 하든 정신적으로 뭘 하든 다~ 괴롭다고 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도대체 붓다는 ‘인간은 괴롭다’는 것을 왜 이다지도 철저하게 알게 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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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붓다는 ‘인간은 괴롭다’는 것을 왜 이다지도 철저하게 알게 하고 싶었을까?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그 시작은 괴로움

괴로움(苦)은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 – 苦諦, 集諦, 滅諦, 道諦)의 시작이다. 사성제에서 ‘제(諦)’는 ‘진리’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세히 알다, 살피다, 소리 내어 울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성제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 또는 ‘네 가지 자세히 살펴야 할 것’, 또는 ‘네 가지 소리 내어 외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붓다가 소리 내어 외치며 사람들에게 자세히 살피라고 한 기본적인 네 가지의 가르침이 ‘사성제’인 것. 이 사성제는 ‘괴롭다(苦諦)’로 시작한다. 이는 붓다가 생각한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괴롭다’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괴롭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하나?

여기에는 붓다 자신의 경험이 있다. 붓다는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나 부족할 것 없는 풍족한 왕궁 속에서 자랐다. 붓다의 아버지 정반왕은 자신의 아들이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출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붓다가 된다는 예언이 있었음), 늙음, 병듦, 죽음을 보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도록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왕궁 밖에 나갔다가 늙은 자를 보고, 병든 자를 보고, 죽은 자를 보게 된다.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것을 본 붓다의 충격. 이 충격은 붓다를 출가하게 만들고, 결국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되도록 만든다.

그런데 붓다는 무엇에 그렇게 충격을 받았을까? 단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볼 때 분명 충격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출가를 결심하기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린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출가해야 한다.(^^;) 붓다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늙기 싫고, 병들기 싫고, 죽기 싫은 마음, 즉 삶을 애착하는 ‘거대한 갈망’을 보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가 평소에는 경험하지 못한 마음이다. 그 마음이 들불처럼 올라오는 것을 본 것. 화려한 궁정 속, 부족할 것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붓다는 자신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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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입버릇처럼 ‘괴롭다’를 달고 산다. 아니 정말 세상은 괴로운 일투성인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괴롭다는 것을 알까? 정말 괴롭다면, 그 원인을 찾고 거기서 벗어나려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괴로움의 원인을 찾고 벗어나는 방식은 붓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괴로움의 원인을 ‘저’것에서 찾고, ‘저’것을 제거하는데 온 힘을 쏟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헤어짐이 괴로울 때, 헤어짐이라는 행위와 함께하는 내 속의 갈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탓하거나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방식으로 괴로움을 해결하려 한다. 이는 괴로움의 원인을 ‘저’것, 즉 대상에서 찾는 방식이다. 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을 대상이 아닌(대상은 자신 속의 괴로움을 보게 하는 요인이었을 뿐) 자신 속에서 발견했다. 만약 대상에서 찾았다면 왕이 되어 그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갖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었을 거다. 그런데 내 마음이 원인인데 왕이 된들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길을 찾아 떠날 수밖에.

어느 명상센터에서 깨달은 괴로움

올 초에 어느 명상센터에서 열흘간 명상을 한 적이 있다. 매일 조금씩 명상을 하고는 있었지만,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 열흘 동안 하루 12시간씩 명상만 한 것은 처음이었다. 명상 자체는 좋았다. 명상도 명상이지만 일상을 떠나서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았다. 혼자 방을 쓰고, 시간 되면 맛있는 밥 주고,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서 12시간씩 명상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다. 정해진 숙소, 정해진 방석(명상 자리도 정해짐), 정해진 식사 자리, 정해진 명상 시간. 내가 움직이는 모든 동선(動線)이 타인과 최소한의 접촉(물론 직접적인 신체 접촉도 안 된다)만 하게 하고, 먹고, 자는 등 생활 전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명상센터에 들어갈 때 휴대폰이랑 책도 반납하고, 열흘 동안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 침묵도 참 좋았다. 말을 할 필요 없으니 생각도 줄고, 휴대폰이랑 책이 없으니 찾아다니며 세상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일상이 너무 단조롭다 보니 이것저것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 지나니 잦아들었다. 열흘의 명상은 그야말로 (거의) 침묵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마지막 날엔 침묵을 깨고 말을 해도 되었다. 열흘 동안 말을 못 하다가 이제 해도 된다고 하니 기쁠 줄 알았다. 아니 처음에는 기뻤다. 그런데 막상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온갖 생각들도 따라 올라왔다. 몇 마디 말에도 얼마나 많은 생각이 함께 올라오는지 정말 난감할 정도였다. 열흘간의 침묵 때문이었는지 생각들이 올라오는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생각뿐 아니라 그 생각과 함께 동반되는 감정도 너무나 선명하게 몸으로 느껴졌다. 마음은 평소에도 이렇게나 폭풍 같았나? 폭풍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 폭풍을 겪어 내는 마음은 너무나 바빴다. 열흘의 명상이 없었다면 우리 마음이 평소에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바쁜 이유가 거의 갈망 때문이란 것도 몰랐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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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 고요한 명상센터에서 어떤 작은 소란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사소한 대화들이 있었다. 예컨대 “여기 앉아도 돼요?”와 같은. 그런데 나는 그 사소한 대화 속에 ‘여기 앉고 싶다’는 내 속의 갈망을 여실하게 봤다. 이걸 갈망이라고 할 수 있냐고? 나도 이걸 갈망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몰랐다. 갈망이란 붓다가 본 ‘생로병사’처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인생사에 있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단순한 저 대화에도 갈망은 있었다. 이 갈망은 상대가 승낙하는 순간 없어지는 ‘듯’하고, 상대가 거절하는 순간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듯’하다. 하지만 애초 갈망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대상(또는 대화)은 그것을 올라오게 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열흘의 침묵 끝에 한 첫 대화에서 나는 이 마음의 작용을 보았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붓다가 왜 괴로움을 얘기했는지. 인간은 괴롭다. 딱히 큰 일이 있지 않더라도 모든 일에 모든 순간에 인간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형상(色)에 도취되어 잠시 잊을 뿐. 주변의 소리(聲)에, 냄새(香)에, 맛(味)에, 감촉(觸)에 정신 팔려 괴로움이 없어졌다고 생각할 뿐. 이 ‘작은 갈망’들은 파도가 너울대듯 마음속에서 너울대다가 ‘사건’을 만나거나 ‘대상’을 만나는 순간 들불처럼 일어난다. 그러니 괴로움의 원인은 대상이나 사건이 아니다. 내 마음속의 갈망이다. 그 평온한 명상센터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괴로운 존재인가를 눈물 나도록 실감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괴로운 존재인가도.

괴로운가? 정말?

명상센터에서의 경험 후, 그 많은 경전에서 왜 괴로움을 얘기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이 정말 괴롭다는 것을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해야 그 원인을 치밀하게 탐구할 것이고, 원인을 치밀하게 탐구해야 거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보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더 고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가 미련 없이 왕궁을 떠나는 것. 고귀한 자들이 미련 없이 세상의 가치들을 버리는 것.

괴로움은 존재에겐 숙명과 같다. 존재란 끝임 없이 무언가 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는 괴로움은 없어질 수 있고((滅諦), 거기에 벗어나는 길이 있다(道諦)고 한다. 2,500년 전 자신 속의 갈망을 보고 그 길을 탐구했고, 경전을 통해 우리에게 전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찾은 길을 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괴로운가? 정말?’ 이 질문이 원인을 찾게 하고, 길을 찾게 하고, 그 길을 가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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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괴로움은 없어질 수 있고((滅諦), 거기에 벗어나는 길이 있다(道諦)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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