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기획 연재

기획 연재

나의 원 밖으로 나가면 진실된 관계를 만날 수 있다 l 가네시로 가즈키 『GO』

게시물 정보

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8-24 21:15 조회93회 댓글0건

본문


나의 원 밖으로 나가면 진실된 관계를 만날 수 있다


이하늘(청공자 용맹정진)


원 속에 사는 사람들

 우리는 모두 ‘원’ 속에서 살고 있다. 원이 뭐냐고? 원이란 “(너란) 인간의 크기”(GO 65p) 라고 한다. 즉 말하자면 원은 나를 규정지어주는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원들은 ‘국적’으로 설명 될수도 ‘학교’로 설명 될 수도 ‘가족’으로 설명 될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보자면 나의 원은 ‘한국인’이고 ‘남산강학원의 학인’이며 ‘누구누구의 아들’이다. 사실 이 원들은 나도 모르게 규정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한국인이라거나 학인이라거나 누구누구의 아들인 것은 그렇게 나를 바라봐주는 ‘타자’의 시선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 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고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소설 『GO』의 주인공 스기하라는 이 타자로부터 규정되는 정체성이 매우 불편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원 속에서 안주하며 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 끊임없이 원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원을 고집하려고 하며 스기하라는 왜 원 밖으로 나가고자 했을까? 



원 속에 안주할 것인가? 원을 뚫고 나갈 것인가?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아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도 잔뜩 있어. 빼앗아오기는커녕 상대방이 네 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생략) 그런데도 넌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원 안에 가만히 있는 편이 편하고 좋을 텐데.”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배울 겁니다.” 

 (가네시로 가즈키/ 『GO』/ 북폴리오/ 65p)


 이 대화는 아버지가 스기하라에게 처음으로 권투를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말한다. 권투는 ‘원 밖으로 주먹을 뚫고 나가서 무언가를 빼앗아오고자 하는 행위이고 그러다보면 자신의 것을 뺏길수도 있다고, 그런데도 하겠냐고.’ 하지만 스기하라는 아무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답한다. 

 나는 스기하라가 뺏고 뺏기는 싸움을 선택을 한 이유는 그것보다 ‘원 안에 가만히 있는 것’이 훨씬 더 싫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 안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에게 익숙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편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답답하게 옭아매는 것”(같은 책 72p) 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원’이 ‘나란 인간의 크기’라고 본다면 ‘원 안에 가만히 있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고 사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을 때 그 정체성으로만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자신을 한 가지 정체성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스기하라는 물론 어떤 관계 속에서는 ‘재일 한국인’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와 권투를 할 때는 권투를 배우는 제자이고 어머니와 영화를 볼 때는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는 착실한 아들이며 정일이와 책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때는 좋은 책 친구이다. 이와 같은 행위를 할 때 대체 어디서 ‘재일 한국인’ 이라는 원이 필요한 것인가? 그러니 자꾸 자신을 특정한 원 속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 매우 답답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스기하라는 안주보다는 자유를 택했다. 그 싸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뺏고 뺏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 내 것을 뺏긴다는 것은 싫은 일이고 남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은 왠지 나쁜 일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싸움은 ‘원’들의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원’은 곧 나의 정체성이고, 이 싸움에서 뺏고 뺏기며 섞이는 것은 바로 ‘정체성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사람일수록 뺏고 뺏기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 

 바로 사쿠라이가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스기하라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신체는 즉각 거부반응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신이 스기하라와 맺어왔던 관계는 말끔히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녀가 그렇게 반응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원을 빼앗길까봐 겁나서 였다. 사쿠라이의 원은 ‘일본인’이라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 속에서 평생동안 자신의 원을 지키며 살았다. 그리고 그 원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피는 더럽다”(같은 책 200p) 와 같은 ‘차별’이라는 방어기제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스기하라와 계속해서 만나게 된다면 자신이 지켜왔던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다.  



나를 잊어버릴 수 있는 원 밖으로 GO!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쿠라이의 두려움은 자신의 원을 지키려는 고집이 만들어낸 두려움이다. 그 고집을 버린다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 그리고 그제서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스기하라는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 밖으로 탈주하려 한다.  


 “나는 재일도 한국인도 몽골로이드도 아냐.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좁은 곳에다 처박지 마. 나는 나야. 아니, 난 내가 나라는 것이 싫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잊게 해주는 것을 찾아서 어디든 갈 거야.”

(가네시로 가즈키/ 『GO』/ 북폴리오/ 261p)

     

 그래서 스기하라는 재일, 한국인, 몽골로이드 같은 ‘원’들에 묶여서 사는 곳이 아닌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말한다. 조선학교도 미야모토가 제안한 새로운 서클도 스기하라를 옭아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는 ‘원’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더러 그 허울 뿐인 원을 고집하는 것이 차별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 스기하라는 끊임없이 자신의 원 밖으로 나가 타인의 원을 침범하는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잊혀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사쿠라이와 자신의 원을 넘나들며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듯이. 이처럼 자신의 원과 타인의 원을 흐트러뜨리며 나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면 국가, 문화, 전통이라는 ‘원’을 벗겨낸 솔직하고 담백한 진실된 관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2021. 08. 18. / 청공자 용맹정진 수요일 발제)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