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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의 유동성, 위험과 가능성 사이 | 타다 토미오, 『면역의 의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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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7-29 23:39 조회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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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의 유동성, 위험과 가능성 사이



박소담


면역학이란 사실 생물학 중에서도 가장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학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요즘 코로나 백신이니 뭐니 해서 면역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긴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생활에 위협이 되는데 그 치료제인 백신이 바로 우리 몸의 면역 반응과 관계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 이상으로 면역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몸에서 딱히 두드러지게 보이는 면역 기관도 없고, 코로나 같은 병원체가 유행하지 않을 때야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관심이 가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지만, 병원체에 대항하는 반응으로 면역을 정의하는 건 사실 19세기 말 면역학이 갓 태동할 때의 일이다. 재밌게도 면역을 뜻하는 immunity는 immunitas, 즉 과세(munitas)에서 면제된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국가의 세금을 피해 가는 것만큼이나 큰 특권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저자는 병원체에서 몸을 지키는 면역이란 근대 시대의 패러다임을 넘어 새롭게 제시된 현대면역학을 우리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 현대면역학의 시선으로 현재 코로나 상황은 어떻게 다르게 비춰질까?


질병에 한 번 걸리면 두 번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면역의 의미는, 앞서 말했듯 19세기 말 근대의학이 발전하면서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직 이식에 따른 거부 반응과 함께 면역의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면역 반응은 병원체뿐만이 아니라 같은 종, 요컨대 다른 사람에게서 장기 이식을 받을 때도 일어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로 면역 반응이란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하여 ‘자기’를 지키는 현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직관적으로도 알아듣기 쉬운 얘기다. 면역학적 모델은 쉽게 군사 모델에 비유되는데,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군에 대항하여 자신의 나라를 지킨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델에 모순되는 현상들이 관찰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해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자가면역질환’이나 외부 병원체에 대해서 면역 반응을 상실시켜버리는 에이즈 바이러스의 등장이 그 예다. 화학자 파울 에를리히는 동물이 왜 자기 자신에 대해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자가면역질환의 탄생을 예감하고 있었다.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반대로 ‘비자기’여야 마땅한 것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면역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이 등장했다. 면역 반응은 대체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면역은 어떻게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해내는 걸까?


나와 타인을 어떻게 구분해내냐는 질문은 얼핏 들으면 좀 당황스럽다. 그건 그냥… 당연히 다른 거 아냐? 나는 나고 너는 너지! 이 막연한 나와 타자의 문제를 구체적인 면역 현장에서 들여다보자. 외부 병원체에 반응하는 몸의 면역 세포 중에는 T세포와 B세포라는 것들이 있다. 이 세포의 막에는 외부 물질에 대해 반응하는 수용체들이 모여 있는데, 이들은 희한하게도 외부 물질에 대해 직접 반응하지 않는다. 수용체들이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몸 세포들의 표면에 부착된 있는 MHC(사람의 경우 HLA)란 단백질이다. T세포와 B세포는 MHC 단백질에 부착되어 있는 외부 물질만을 인식할 수 있다. 곧 ‘비자기’는 오직 ‘자기’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1960년대까지의 면역학이 면역계를 ‘비자기’를 인식해 배제하는 시스템으로 손쉽게 규정했던 데에 비해, 오늘날의 면역학은 원래의 ‘자기’를 인식하는 기구가 ‘자기’의 ‘비자기’화를 감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자기’는 언제나 ‘자기’라는 맥락 위에서 인식된다.

타다 토미오, 면역의 의미론, 한울, pg.39


타인은 오직 나의 맥락 속에서만 타인이 된다. 나와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타인이 오직 나의 맥락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건 언뜻 묘하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고 각각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악이요, 나는 선이다. 코로나라는 타자의 출현은 인간들에게 거대한 피해를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타인이라는 악 또한 나의 선이라는 맥락에서만 출현할 수 있었다면 어떨까. 코로나는 오직 인간의 맥락 위에서만 위협적이다. 인간 활동이 수그러들자 도시에 야생동물이 출현한 것으로도 쉽게 드러난다. 야생동물에겐 코로나라는 타인이 기회로 작동할 수도 있다. 우리는 반대로 물어야 한다. 우리의 어떤 맥락이 코로나를 이토록 위협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가? 어쩌면 인간은 결코 어느 생물도 넘볼 수 없는 생물계 피라미드 꼭대기에 군림하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전과 같은 일상이 유지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저자는 더 나아가 면역에서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주목한다. 이에 대해서 비록 지금은 채택되지 않지만, 예르네가 제시한 네트워크설은 정말 흥미롭다. 면역 세포인 B세포의 표면에 부착되어 있는 수용체는 세포 바깥으로 분비되어 우리 몸을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는 ‘항체’라고 불린다. B세포의 수용체나 항체는 체내에 병원균이 침입했을 때 ‘비자기’를 인식하여 그들을 제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병원균이 침입하지 않는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할까? 예르네는 ‘비자기’가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을 때, 항체와 수용체는 ‘자기’들과 서로서로 반응하면서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a라는 항체에 반응하는 b라는 항체가 있고, b라는 항체에는 또 c라는 항체가 반응하고, 이렇게 연속된 항체의 고리들이 다시 항체 a로 돌아오는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자기’가 하나 침입한다고 생각해보자. 항체는 유전적 재조합의 다양성으로 인해 어떠한 ‘비자기’와도 반응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어서, 평상시 ‘자기’ 항체에 반응했듯 침입한 ‘비자기’와도 반응하게 된다. ‘비자기’, 즉 자기 항체 x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폐쇄된 네트워크의 평형은 움직이게 되고, ‘비자기’와 반응하는 항체들이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면역 반응은 항체들의 네트워크의 균형에 의한 것이며, 여기에는 반응을 명령하는 어떤 지휘자도 없다. 물론 이후 항체 외에 면역 반응에 관여하는 요소들이 더욱 많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네트워크설은 폐기되었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슈퍼시스템 면역계 역시 ‘자기’ 네트워크가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네트워크설과 유사하다.



‘자기’ 네트워크는 유동적인 균형을 잡고 있을 뿐,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유동성으로 인해 자신의 세포를 공격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거나, ‘비자기’일 법한 외부 미생물을 공격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외부에게서 우리를 철저히 지켜준다고 믿었던 면역계는 사실 언제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을 바꿀지 모르는 위험한 네트워크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유동적이라는 건, 한편으로는 면역이 굉장히 커다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와 ‘비자기’의 미묘한 줄타기 위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가는 것만이 생명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자기’를 지킬 필요도, ‘비자기’를 배제할 필요도 없이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가는 존재가 될 뿐이다.




2021. 7. 20. / 신세계 세미나 s.2 4주차 / 『면역의 의미론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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