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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좋은 공부’ | 니체, 『도덕의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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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7-15 23:42 조회19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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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좋은 공부’



원자연(글쓰기학교 고전평론반)


공동체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친구들과 부대낄 일이 많다. 이 말은 사건·사고가 늘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을 겪을 때마다 ‘이 친구에게 좋은 게 뭘까?’를 늘 고민하는데, 매번 쉽지 않다. 그러다가 작년에 활동을 하면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가치 기준을 얻었다. 성격과 취향을 가진 친구가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으로 친구를 대하니, 훨씬 간명해졌다. 친구의 개인적인 성향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에게 좋은가?’를 가치 기준으로 삼으니 많은 것이 뚜렷해졌다.


그 뒤로는 친구에게 “이건 공부에 좋지 않아. 너에게 좋은 공부를 하렴!”, 이런 식의 말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배워온 것 위에서 ‘공부’와 ‘좋음’을 말했었는데, 효과는 썩 좋진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너에게 좋은 공부를 해”라는 말에서, “저는 이게 좋아요”라는 제각각의 좋음이 등장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길을 잃었다. 또 다른 하나는 ‘좋은 공부’를 말할 때의 ‘좋음’이 모호했다는 것이다. 이땐 마치 공동체에 이상적인 ‘좋음’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갔었다.


친구들의 좋음에 끄달리거나, 이상적인 좋음을 말하거나. 둘 다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니체라면 뭐라고 말해줄까? 니체가 말하는 ‘좋음’을 가이드 삼아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좋음, 고귀한 ‘행위’를 하는 자의 가치


니체는 말한다. ‘좋음’이라는 것은 ‘고귀한 자’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고귀한 자들이 만들어 내는 게 좋음이라고? 이 정의를 듣고 있자면, ‘고귀한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다. 이 시대에 신분 상승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귀한 사람은 어찌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렇게 그 ‘사람’에 주목한다. 뭐가 좋다고 하면, ‘그게 뭔데?’라는 질문을 하는 것처럼, ‘대상’에 눈이 간다. 고귀한 자들이 만들어 내는 게 ‘좋음’이라고 하니, ‘고귀한 자’에 눈이 가고, 재빨리 묻는다. “어떻게 해야 고귀한 사람이 되지?”


아마 니체라면 ‘고귀한 사람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오잉? ‘고귀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해놓고, ‘고귀한 자’가 없다니! 정말 웃기는 니체씨다.


‘주체’의 제약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고 오해하는 언어의 유혹(그리고 언어 속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이성의 근본적 오류)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일반 사람들이 번개를 그 섬광과 분리하여 섬광을 번개라 불리는 어떤 주체의 행동이며 활동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군중 도덕도 강자를 강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서 분리하여, 마치 강한 것을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떤 중립적인 기체가 강자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기체란 없다. 행동, 작용, 생성의 배후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행동자’란 행동에 그냥 상상으로 덧붙인 것이다.-행동이 전부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연암서가, pg. 61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오해를 하고 있다. 언어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이다. ‘고귀한 자’가 따로 있고, 그들이 행하는 ‘좋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고귀한 자’라는 것은 ‘고귀한 행동’을 하는 자를 지칭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덧붙여진 말이다. 주체는 상상이고, 허구다. 주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주체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오직 ‘힘’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고귀한 자는 어떤 행위로, 어떤 힘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그 힘은 어떻게 발현되는 것인가?”



‘좋음’이라는 가치의 생산, 차이를 겪어라!


이제 오해는 풀렸다. 고귀한 자는 없다. 아니, 때때로 고귀한 자는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귀한 행위를 할 때만 고귀한 자는 존재한다. ‘고귀한 행위’를 통해 규정되는 ‘좋음’에 대해 살펴보자.


‘좋음’이라는 판단은 (…) 오히려 ‘좋은 사람들’ 자신, 즉 고상한 사람, 강한 사람,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고매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모든 저급한 것과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것 비열하고 천민적인 것과는 달리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즉 최상급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한다.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Pathos of Distance)에서 비로소 그들은 가치를 창출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같은 책, pg. 30


고귀한 행위는 ‘천민적인 것’과 ‘자신의 행위’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차이distance’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최상급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것. 이것이 고귀한 행위를 통해 생산된 ‘좋음’이다.


여기서 차이distance는 무엇일까? 무엇과 무엇의 차이인가? 이것은 ‘타인’과 ‘자신’과의 차이도 아니고, ‘어제의 못난 나’와 ‘오늘의 나’의 차이도 아니다. 오직 행위와 행위 사이의 차이다. 비슷비슷한 행위들 사이에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 그런 행위 주체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 순간 ‘고귀한 자’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고귀한 자는 자신의 행위를 ‘최상급’의 것으로 ‘느낀다’. ‘느낀다’는 것은 주체와 행위 사이에서 어떤 간극도 없이 전해지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최고라는 느낌은 아마 그 현장에서 함께하고 있는 모든 행위자들이 함께 ‘느낄’ 것이다. 어떤 행위가, 힘이 발휘되는 순간, 그 힘은 시공간에 퍼져간다. 그리고 이때 다른 행위들과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어진다. 어떤 행위가 지금 이 시공간에서 특이점을 만들어 냈는지 ‘느끼고’, ‘평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겪음pathos’을 말할 수 있다.



‘힘의 세계’에서 ‘공부’한다는 것


니체의 ‘좋음’이 작동하는 세계는 완전 다른 세상이다. 그 세계는 행위를 통해 차이를 겪어가는 ‘힘의 세계’다. 니체의 눈으로 우리의 일상을 보면, 우리 삶의 똑같은 일상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사람’들로 가득했던 일상이, ‘행위’들로 가득해진다. 어떤 행위는 힘을 잃기도 하고, 어떤 행위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활동성’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장의 주인은, ‘행위 하는 자’, ‘힘을 발휘하는 자’, ‘고귀한 자’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시공간의 주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있다. 회의에 기막힌 아이디어가 나올 때, 세미나에서 화두가 던져질 때 등 분위기를 전환하는 순간 주인도 바뀐다. 한 공간을 살펴봐도 재밌다. 주방의 주인은 밥을 할 때는 ‘밥 당번’이 주인이 되고, 식재료를 정리할 때는 ‘주방 매니저’가 주인이 되고, 배고픈 친구가 냉장고를 열 때는 ‘배고픈 자’가 주인이 된다. 기존에 감돌고 있던 공기를 바꾸는 행위! 그 행위를 하는 자가 주인이 된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가치 기준을 세웠을 때, 공부하는 사람의 ‘덕목’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그려두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갖춰야 하는 면모들을 하나씩 채워가고 있던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선’에 상응하는 카테고리들을 세세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니체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주체의 세계의 한계를 짚어준다. 주체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주체들이 존재하는 만큼 제각각의 ‘선’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것이 개인이든 공동체든 상관없다. 수나 크기의 문제가 아닌 것! 이 세계에서는 ‘누구’에게 좋은 것인지, ‘누구’에게 이득인지를 살필 수밖에 없다. 또 그러다 보면 옳고 그름의 문제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은 모든 주체가 그렇듯 상상으로 덧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주체의 세계는 허구의 세계라는 것! 친구들과 ‘공부’ 그리고 ‘좋음’을 논하려면, ‘행위’의 세계로 가야 한다.



자, 이제 니체의 ‘좋음’이 작동하는 ‘힘의 세계’로 이동해보자. ‘공부하는 행위들’이 움질움질하는 세계로! ‘행위’의 세계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굴러가는 세계다. 이 세계에서만 우리는 스스로 느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차이를 겪을 수 있다. 우리의 행위가 ‘차이를 통해 고양 시키는 행위인가?’를 묻고, 겪는 것.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 바로, 이것이 ‘좋은 공부’이지 않을까.




2021. 6. 5. / 글고평 2학기 ; 도덕의 계보학 1논문 중간글쓰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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