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기획 연재

기획 연재

청년클래식 | 다른성욕의탄생 | 안녕, 완벽했던 내 반쪽! (2)

게시물 정보

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21 17:35 조회137회 댓글0건

본문

3장 사방이 막힌 방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묻다. -2)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미움에 묶인 노예

내 기분대로 하는 것, 그걸 다 받아주는 것! 내가 그를 칭했던 ‘운명의 반쪽’이란 말 뒤에는 이런 게 숨어있었다. 연애의 이런 그림은 종종 당연한 것으로 얘기되곤 한다. 흔한 공주 대접, 왕자 대접이다. 하지만 내 기분에 맞는 것을 찾아다닌다는 게 인생에 있어서 어떤 걸까? 나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혹은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라면 평생 행복할 거야’라는 전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좋을 땐 꽉 붙잡았다가도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다른 것, 즉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떠나버릴 태세를 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굉장한 선택권처럼 보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 안에서 하나도 자유롭지 않았다.

현세의 삶은 견딜 수 없어 보이고또 다른 삶은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으니증오스러운 누추한 감방을 나와비로소 증오하는 법을 배우게 될또 하나의 새로운 감방으로 보내지기를 청한다거기엔 신께서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 수인(囚人)이 옮겨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는 이 사람을 감금하지 말아라그는 나에게로 오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거라는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꿈 같은 삶의 기록, 2017, p.422

카프카는 이런 식의 삶의 태도를 감방을 전전하는 수인의 모습에 비유했다. 이곳이 싫다며 증오의 마음을 품은 수인은 자신을 다른 감방으로 보내주기를 청한다. 그곳에 행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아니, 사실 수인은 다른 걸 노리고 있다. 그의 마음에는 이렇게 도망 다니다 보면 언젠가 신, 그러니까 초월적 존재가 (다른 감방으로 이동하는 중에 기적적으로!)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스스로는 감방에서 나오려는 노력을 하등 하지도 않고, 초월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습. 다른 말로 하면 삶에 대한 미움을 가득 품은 채, 현재 자신의 삶을 끔찍한 것이라 여기고 앉아서는 주인님이 ‘너 이제 행복해 지거라’라는 명령을 내려주길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자신의 행복을 이렇게 남에게 의탁하다니. 이건 영락없는 노예가 아닌가!

이런 건 우리 일상에서 흔하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 예측불허로 닥쳐올 때, 그리고 그것이 탐탁지 않거나 불편할 때. 우리는 사건들을 ‘나의 삶’으로서 긍정하기 위해, 그 사람을 나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힘을 쓰는가? 대충 미움과 찝찝한 감정을 남기고 다른 데로, 또 다른 데로 이동하며 ‘그래도 나에게 맞는 어떤 곳에선 행복할 거야’, ‘그래도 나와 맞는 어떤 사람과는 아무 문제없을 거야’라고 믿으며 살아가지 않는가?

prison-553836_640

감옥에서 신(神)을 버리기

수인에게 초월적 존재의 구원이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을까? 그가 신의 구원 없이도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자신이 처한 감방이 증오스럽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미워하지 않으려면, 원망하지 않으려면, 슬퍼하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야 한다. 우선 첫 번째는 그러고자 하는 결심, 부정적 감정을 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우스운 일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속에는 살던 대로 살면서 신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노예적 습관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사건, 나와 상대, 그 작동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카프카는 우리가 죽고 싶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단지 산다는 것 말고 그 뒤로 어떤 것들을 바라고 있길래 우리는 죽고 싶을 정도로 삶이 싫을까? 그것을 인정하고 바라보기 싫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며 도망가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굳게 결심을 했다. 그러니 이제 이런 전제들을 깨트려야 한다. 살고 싶도록. 살고 싶다는 것은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다는 것이다. 새로운 공부든 프로젝트든 같은 감방에 앉아있는 동료 죄수에게 악수의 손을 내미는 것이든. 그렇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전제를 깨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부정적 감정에서 빠져나온다. 동시에 위축되었던 신체는 활력을 되찾는다. 전제를 내려놓고 사유를 변화시킴으로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곳 공부공동체 사람들의 글쓰기도 이러한 시도의 도구이자 과정 자체였다.

writing-923882_640

불쑥 올라오는 감정을 바라보는 것, 그 감정의 길을 관찰하여 나의 전제와 세상의 작동방식을 배우는 것,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내는 것, 그것은 말 그대로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이것은 삶에 필수적인 힘이다. 아니 이것이 세상을 거부하지 않고, 이곳을 ‘살아가는 것’ 자체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그와의 연애 안에서 나는 상대의 감정에 대해서도 내 감정에 대해서도 탐구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감정을 내려놓거나, 지켜보거나, 바꾸어볼 필요도 없었다. 살아가는 힘, 삶을 긍정하는 힘, 스스로 기쁨을 만드는 힘이 현저히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런 상태인 줄도 몰랐다. 이런 내가 그와의 이별에 무너져 내리고, 또 오랫동안 그를 그리워한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다. 아마 그가 계속 내 옆에 있었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답답함을 느끼며 철문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을 것이다. 누가 나를 구속하거나 답답하게 만든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가 에너지를 늘 능동적으로 쓸 수 없어, 신체가 활력을 얻을 수 없어 갑갑한 것이다.

반면 그는? 나는 아직도 헤어지고 이틀 뒤, 내가 부재중 전화와 문자로 행패 아닌 행패를 부렸던 그 날, 나를 달랬던 그의 문자를 기억한다. ‘헤어지는 마당에 이런 말하는 게 구차하게 느껴지지만 정말 사랑했었다’는 나의 문자에 그는, ‘너를 정말 사랑했고 이렇게 말하는 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내게 정말 할 수 있는 만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도 내가 한없이 미울 때도 많았을 거다. 지긋지긋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나를 만났고, 나는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자 그의 삶으로 들어온 사건이었다. 최선을 다해 그것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내 옆에 우직하게 서 있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을 다했을 때, 그는 그렇게 홀가분히 떠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사랑 방식을 존경한다. 다시 그때와 같은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애써 그를 잊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로부터 사람을, 나아가서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싶다. 평생 그를 잊지 못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사는 법’을 배움으로서 그와의 만남과 이별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끝까지 그를, 내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hand-819279_640
평생 그를 잊지 못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사는 법’을 배움으로서 그와의 만남과 이별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끝까지 그를, 내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