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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하라! | 청년에세이 | 뗏목 위의 여정, '되어가는 나'로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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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0-18 23:24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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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보겸(청년공자 용맹정진밴드)

청용에서 매주 보는 1200자 암기 재시험을 치르던 중 머리가 새하얘졌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머리는 가동을 멈추고, 대신 불안 회로에 깜빡, 불이 들어왔다.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마음과 그러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에 대한 자책과 부끄러움이 올라왔고, 그 와중에 내야하는 벌금의 액수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났다. 그런데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 이게 울 일인가, 싶었다. 시험을 못 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나는 내가 잘 해내지 못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거지?

잘 해야 한다는 마음에는 나는 항상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최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상이 따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내가 속한 환경에서 좋은 위치와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규율과 규칙을 지키면서 학생의 ‘본분’을 따르면 인정받을 수 있었다. 외부에서 옳다고 말하는 기준을 잘 따르는 것이 곧 내 존재를 표현하고 인정받는 방식이 되었을 때,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누리는 것이 언제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헉은 그 최선의 것, 옳은 것이 내게 정말로 이롭고 좋은 것인지를 되묻게 한다. 학교와 사회에서 옳다고 말하는 정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떳떳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르는 쾌와 불쾌를 인정하면서 결정하는 자로 살아갈 때 더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헉은 어떻게 자신에게 정말로 이로운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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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 위에 오르기

우리는 결국 세상에 이 뗏목처럼 아늑한 곳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딴 장소라면 너무 좁아터져서 숨 막힐 것 같았지만, 뗏목 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여러분도 뗏목에 한 번 올라 보시면 알 것이다. 그곳이 얼마나 자유롭고 느긋하며 편안한 장소인지 말이다.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현대문학, 220쪽>

헉은 더럽게도 재미없는 규칙과 예법을 따지는 과부댁에서의 생활과 학대와 폭력에 자신을 방치시키는 아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발한 탈출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강 위를 둥둥 떠내려가던 뗏목을 타고 훌쩍 떠나버린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살짝 헛웃음이 났다. 내가 속해있던 장을 떠나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어? 아니, 헉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과부댁에서의 생활, 주일학교, 그리고 숲속에서의 생활은 시간이 조금 지나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헉은 익숙함과 편리함에 속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헉은 변화를 원했고, 빳빳하게 풀 먹인 옷, 푹신한 침대, 금화를 가지는 것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껏 나는 좋은 조건을 갖추면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험난한 여정을 잘 헤쳐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튼튼한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배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에 시간을 쏟느라 정작 내 여정이 시작되었는지, 어디로 흘러가야하는지는 뒷전이 되었다. 헉은 외부의 기준에 따라 덧입혀놓는 멋진 배가 없어도 그 자체로 재미있고 파란만장한 여정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오히려 ‘나’라는 상을 유지하기 위한 집착과 소유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뗏목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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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나는 좋은 조건을 갖추면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험난한 여정을 잘 헤쳐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튼튼한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따르는 삶

그렇다면 헉은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가능해진다.

마음을 따르는 일은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들 앞에서 ‘올바른 일’과 대치되며 헉의 양심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올바른 일’은 여과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강력한 힘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여기에 대해 토를 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헉 역시도 19세기 미국에서 흑인이 누군가의 노예 혹은 소유물로 취급되었던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망친 흑인 노예를 찾는 남자들이 배를 수색하려 할 때, 그리고 왓슨 양에게 짐의 위치를 알리는 편지를 썼을 때에도 처음에 헉은 올라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짐을 이들에게 넘겨주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올바른 일’을 해서 짐을 넘겨준다고 자신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꺼이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마음이 옳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거짓으로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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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가는 나로 마주하기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짐을 다시 훔쳐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그리고 혹시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그 일 역시 하고 말 것이었다이왕 발을 들여놓은 이상그것도 영영 들여놓은 한나로선 철저하게 사악하게 되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허클베리 핀의 모험현대문학, 400>

 

매 순간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때그때 적절한 행동(같은 책, 176)을 하기로 마음을 정하자, 헉은 짐을 위해 철저하게 사악해지는 것조차 꺼리지 않는다. 남들이 ‘옳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정말로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과정은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과정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나와 너라는 경계 너머의 길이 열린다. 헉이 짐을 위해 자신의 마음 전부를 오롯이 쓰는 것은 분명 시혜적인 시선을 베푸는 동정과는 다르다. 동정은 타인을 위해 베푸는 듯 보이지만, 견고히 세운 내 입장 안으로 그 사람이 넘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나로서 살아가기에 취해야만 하는 자기 입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입장만을 견고히 세워나가며 크고 견고한 배를 만들수록 배에 태운 타인을 그 배의 주인처럼 여기는 것은 어려워진다.

외부에서 옳다고 말하는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을 따르며 너와 나를 구분하는 잣대를 내려놓을 때, 짐을 도망친 흑인 노예가 아니라 뗏목 위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라는 관계의 배치 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홀로 여정을 떠나 처음 짐을 마주했을 때 반가웠던 마음, 서로의 존재 덕분에 이젠 쓸쓸하지 않게 된 그 마음 그대로 상대를 소중히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때의 나는 상대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 내부로 끌어와 마주하면서 또 다른 입장의 내가 ‘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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