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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클래식 | 연암을 만나다 | 다시 한 사발을 먹을 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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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8-17 21:35 조회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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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스무 살 남짓의 연암, 혈기왕성했던 그 때, 《방경각외전》의 아홉 편이 지어졌다. 연암의 둘째 아들이 쓴 『과정록』을 보면 당시 연암의 성정이 잘 드러나 있다. 연암은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을 보면 참지 못했다는 거다. 그래서 평생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많았다. 한마디로 대쪽 같고 까칠한 선비였던 거다.

특히 연암은, 당시 권세와 이익을 좇아 벗을 사귀는 세태를 ‘미워’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노여움, 혹은 세태에 대한 삐딱한 시선으로 쓰여 진 글들이 《방경각외전》인 것이다. 「예덕선생전」도 그 중 하나다.

「예덕선생전」은 선귤자(이덕무)에게 따지러 온 제가 ‘자목子牧 이정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따져 묻는 내용인즉,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벗의 도란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줄을 같이 하는 형제와 같다’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엄 행수 같은 사람과 교분을 맺고 벗을 하려 하냐는 것이다. 엄 행수는 마을 안의 똥을 치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의 덕德을 칭송하는 스승이 부끄러워 그 곁을 떠나겠다고 하는 것이다. 선귤자는 웃으며 이에 답변을 한다.

이렇게 이 글은 ‘벗’에 대한 이야기로 문을 연다. 그래서 벗-사귐에 대해 말하려는 줄 알았다. 연암의 ‘우정론’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벗-사귐의 도리나 방법 같은?

하지만 연암이 말하려던 건, 단순한 우정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정론은 곧 존재론이었다. ‘누구와 벗할 것인가’는 곧 ‘내가 어떤 벗이 될 것인가’ 즉,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연암은 ‘예덕선생’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엄 행수’란 사람과 벗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어떤 면모를 가지고 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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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의 직업. 엄 행수는 똥을 모아 밥벌이를 한다. 이 직업이야말로 업을 쌓지 않는 직업이다! 사람똥, 말똥, 외양간의 소똥뿐만 아니라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따위를 주옥처럼 정성스럽게 모은다. 이렇게 긁어모아가도 누구의 염치에 손상이 가지도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 하더라도 해가되지 않고, 욕심을 부려 더 가지려해도 아무도 탐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없다…!

엄 행수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그것에 집중한다. 그는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끌리는 법이 없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다.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래서 그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엄 행수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보통 새우젓을 먹으면 달걀이 먹고 싶어지고, 갈포옷을 입으면 모시옷이 입고 싶어진다. 우리의 탐욕은 이렇게 끝도 없는데 반해 엄 행수는 그렇지 않다.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을 먹을 뿐이지. (중략)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엄 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이라 할 수 있겠지.

(박지원 지음, 「예덕선생전」,『연암집(하)』, 돌베개, 161~162쪽)

고귀한 삶이란 이런 삶을 두고 말하는 건 아닐까. 내가 어디서, 어떤 밥을 먹든 매일 먹는 밥 한 사발에 만족하고, 지금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할 일이 생기더라도 현재의 내 ‘분수에 맞는 삶’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힘, 이런 리듬을 갖는 삶. 이것이 엄 행수의 덕德이고, 그를 예덕선생으로 불리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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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감각에서 봤을 때, ‘분수를 안다’, ‘분수를 알라’는 말은 참 부정적으로 들린다. 나의 한계를 지어버리고, 나를 제한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을 스스로 한다면? 사실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 타고난 것 이상을 탐하며 살면 결국 병이 나게 되어있다. (때론 가봐야 그 한계를 알 수 있을 때도 있다.)

탐욕은 내가 타고난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하여 타고난 분수에 맞게 산다는 건, 내가 가진 한계 이상을 욕심내지 않는 것과 같다. 자기의 분수를 알면 자연스레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이다. 부러워한다고, 욕심 부린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암이 자신 스스로에게 그리고 벗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 같다. 분수에 맞게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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