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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클래식 | 다른 성욕의 탄생 | ‘여자’가 되며 매력을 감추는 친구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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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4-13 20:45 조회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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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녀,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 2)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단절되는 우리들

계속 만남은 이어갔지만, 사실 졸업 후 1~2년 즈음 지나며 우리의 모임은 어딘가 변해가고 있었다. 첫째로 우리는 모두 때깔이 좀 좋아졌다. 예전 사진에서 발견되는 맨얼굴에 후줄근한 모습은 놀림거리가 될 정도로. 다들 수준급 화장 실력을 갖추고, 이런 옷 저런 옷 열심히 쇼핑하고 골라 입는 건 일상이자 취미가 되었다. 왈가닥 여고생들에서 나름 ‘여자’들이 되어갔던 것이다.

한데, 이상하게 우리 모임은 전만큼 생기가 넘쳐나진 않았다. 겉보기엔 비슷했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만나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또 만나면 왁자지껄했다. 크고 우렁찬 목소리와 웃음소리 같은 것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딘가 무거웠다. 웃음들은 종종,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짜내는 웃음들 같았다. 우리가 가장 크게 웃을 때는 과거에 친구가 했던 장난 등을 이야기할 때였다. 하지만 그러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웃겨도 같은 이야기, 같은 웃음을 반복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친구들이 ‘쌍커풀 수술 선언’을 해온 것은 그런 와중이었다. 울퉁불퉁 어설프던 우리가 예뻐지고 근사해지고 매끈해지던 와중, 우리 모임이 조금씩 썰렁하고 무거워지던 와중. 그것은 우리 욕망의 벡터가 완전히 바뀌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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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수술, 화장품, 머리, 옷과 향수, 남자 얘기 등등이 언젠가부터 우리 대화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대화에 우리는 눈을 반짝이곤 했지만 어쩐지 ‘정말로 즐거운 느낌’은 아니었다. 아이러니다. 모두가 거기에 관심이 있어서 그 이야길 하는 거였는데 말이다.

뭐랄까, 서로를 바라보던 무리의 중심에 화장품, 향수 등등이 떡하니 들어와서 모든 관심을 싹 다 흡수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물건들이 스스로를 ‘더 멋진 나’로 만들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가꾸어 줄’ 그 물건들이 친구들보다, 그들과의 짝짓기보다 더 내 마음을 끌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 만나 새로운 리듬을 형성하는’, ‘나와 외부의 구분을 없애는’ 능력을 잃어버린 듯, 단절된 상태로만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개인들’이었고, 어쩐지 다들 ‘더 예뻐지고픈’ 모드였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 어떤 기준들이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옆에 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더 대단한 누군가의 눈에 선택받고픈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달라져 가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거기서 어떻게 방향을 틀어야 할지도 몰랐다. 예전과 같은 즐거움을 기대하며 다들 나름의 노력을 하긴 했다. 하지만 바뀐 중력장이 너무 세서 방향을 틀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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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무언가 ‘되어야만’ 하는, ‘더 예뻐져야 하는’ 개인들의 만남. 거기엔 충만함 대신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쫓고 있는 듯한 비루한 느낌이 자리 잡았고,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공존할 수 없는 ‘예쁨’과 ‘매력’

우리는 사람이 예뻐지면 더 매력적이게 된다고 생각지만 실생활에서 사건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예쁨’과 ‘매력’은 반비례하는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예뻐지기까지 했다!’는 tv 속 이야기다.

‘어떻게 주변과 스며들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 우리의 몸은 주변의 것들과 맞물리는 자연스럽고 능동적인 상태가 된다. 주변으로 활짝 열린다. 바깥의 변화나 분위기가 나에게 스며들어오고, 나도 바깥으로 스며나가는 상태가 된다. 온몸의 세포들의 활발한 짝짓기! 매력과 신체의 활기는 여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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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떻게 예뻐질까’가 우리를 지배하는 순간 우리의 세포들은 ‘예쁨’을 중심 목표로 하여 재배치된다. ‘예뻐지고 싶다’는 건, 온몸으로 짝짓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다.

‘얼굴’이란 무엇과도 짝짓지도 섞이지도 않으며 늘 자신의 모습을 지키는, 나의 신체성과 동떨어진 ‘이미지’같은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화장을 한 얼굴이기도, 내가 나라고 믿고 유지하고자 하는 나의 얼굴이나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주변’과 맞물리는 게 아니라 멋진 가면에 어울리는 ‘내 안에 세워진 기준’을 찾고 그 기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세포들의 짝짓기욕망은 바깥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내 안에서 공회전한다.

온종일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보여 지는지 생각하기 바빠 지금 이곳의 사건들, 지금의 공기, 떠다니는 말, 이곳을 채우는 기운과 분리되는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고립감에 시달리며 더 많은 ‘분장’이, 더 나은 ‘얼굴’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더 예쁜 나’, ‘더 멋진 나’를 만들면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짝짓기’를 암시하듯 색기가 넘치는 화장, ‘성욕’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옷, 거짓 ‘활기’를 띄는 웃음 등 기타 다양한 방법들이 여기에 총동원된다. 하지만 ‘얼굴’이 아무리 예뻐지고 화려해진다 한들, 그건 그만큼 세포들이 경직되고 짝짓기가 차단되었다는 뜻이다. ‘매력’이 있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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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곧잘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나를 꾸민다’는 착각을 하지만 이렇게 ‘나를 꾸미고 싶다’는 것과 ‘바깥과 만나고 싶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힘이다.

즐거워지기 위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다는 건 직감적으로 ‘사람들 틈에 있어야만’ 살맛이 나리라는 걸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여 더 견고한 ‘얼굴’을 만들어내는 것은, 큰 삑사리다.

물론 거짓 활기로도, ‘얼굴’로도 사람을 그러모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고립감, 비루한 기분과 헛헛함이 가시진 않는다. 온몸으로, 온몸의 세포들이 능동적으로 짝짓기를 할 때 생겨나는 즐거움을 ‘얼굴-이미지’를 꾸며내는 것 따위로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추억에 갇힌 우정

우리에게는 분명 ‘성의 활기’가, 접속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한데 이 능력은 어쩜 이렇게도 쉽게 증발해버리는 걸까?

우리는 학교라는 안전한 시공간 위에서 성의 활기를 향유 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책임감을 느끼거나 굶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입시’라는 강력한 표지판 덕에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또래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듯한 독특한 공간 위에서 펼쳐졌다. 그래서 서로에게 집중하는 게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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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학교를 나왔을 때, 우리는 갑작스레 내 존재를 증명해주고 나를 먹여 살려 줄 ‘내 자리’를,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에게 엄청난 짝짓기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른 채, 또 이게 살아가는 데 얼마나 귀중한 능력인지도 모른 채.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나를 만들거나,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로 나를 올려놓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뻐지고자 하는 노력’도 그런 노력 중 하나였다.

허둥지둥, 당혹감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살까?’ 따위의 질문을 할 능력이 우리에겐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 자연스럽게 그 길을 택했고, 또 자연스럽게 거기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 ‘각자의 길’에 ‘우정’이 따라와 주지 않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루트는 정말이지 자연스럽다.

‘이 각박한 세상’과 달리 낮은 문턱으로 우정을 가능하게 했던, 좋은 놀이터였던 학교는 한편으론 우리에게 그 정도의 우정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도록 하는 함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우정’을, 웃음꽃이 피어나는 ‘활기’를 언제나 ‘학창시절에나 가능했던 것’으로 묻어두고 아련해하는 데에 만족한다. 그리고 남은 생애 동안은, ‘얼굴’을 가꾸는 것이 우리가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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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그렇게 쉽게 포기할만한 게 아니다. 우정을 상실하는 게 너무 절절하고 슬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건 내가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고를 말하기 이전에 내 신체의 상태를,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말한다.

생각해보라. 당장에 할 수 있는 짝짓기를 굳이 거부하며 헛헛함 속에, 아련함 속에 살다니. ‘얼굴’에 집착하는 것은 얼마나 큰 삶의 낭비인가. 반대로 ‘얼굴’에서 벗어날 때, ‘선택받아야 한다’거나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거나 하는 것에서 벗어날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을까.

p.s. ‘나’라는 동아줄

다시 나의 슬픔으로 돌아와서 슬픔의 정체를 생각해본다. 나는 대책 없이 슬펐다. 아니,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슬펐다. 나 역시 ‘함께 갈 길’을 궁리하기보단 열심히 ‘나의 길’을 가는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친구들의 쌍커풀 수술을 보며 슬퍼했던 나는 친구들 중 누구보다도 더! 외모나 나의 이미지에 집착하던 사람이었다. 내 두 손은 ‘예쁜 나’라는 동아줄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러니 친구들이 변해갈 때 그들에게 내밀 손이 없었다. 나도 다르게 살아본 적이 없다. 이렇게 자신을 가꾸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엔 반론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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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친구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데. 그리고 나도 수술만 안 했지 기를 쓰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 멋있던 친구들마저 ‘나’를 가꾸며, 괴로울 게 뻔한 ‘여자 되기’의 길로 빨려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이렇게 괴로우면서도 아무 수를 쓸 수 없을 만큼, ‘얼굴’을 내려놓는 건 어렵다. 지금 내 인연들은 모두 내 ‘얼굴’에 매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이걸 놓으면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게 아닐까?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감각이 온몸을 뒤덮는다.

하지만 우정이란 건 정말 ‘완성된 나’의 끝에 있는 것일까? 당장에 ‘나’를 지키던 동아줄을 놓고, 타자에게로 두 손을 내밀 수는 없을까? 얼굴에서 미끄러져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되려, ‘무엇과도 짝짓기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닐까? 거기에만, 그 순간에만 활기와 충만함이 있다는 걸 우리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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