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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클래식 | 다른 성욕의 탄생 |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네가 좋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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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3-16 13:31 조회1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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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유욕의 화신, 연두 - 3)

이호정(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내가 사랑한 건 무엇?

나나 SKY 캐슬 엄마들이 연인과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소유를 확인받는 기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냥 그 느낌이 너무 좋을 뿐이다. 헌데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는 말로 쉽게 가려버린다. ‘널 사랑해서 그랬어~’ 그렇게 되면 모두가 그 소유욕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상대와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못 가져서 안달 난’ 상태 속으로 밀어 넣고야 만다.

과연 엄마들이나 내가 눈앞에 있는 아이 또는 연인을 정말로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는 걸까? 그 사람의 삶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는 걸까? 언젠가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이 내가 하도 요란하게 질투하는 걸 보시고는, 그 애의 이상형은 대체 뭐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누구를 그렇게 질투하는지 궁금하셨나 보다. 하지만 그 질문에 나는 뜸을 좀 들이다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몰.랐.기 때문이다!!

난 정말 몰랐다. 그 애의 이상형이 뭔지, 그 애가 어떤 사람을 좋게 보는지. 물론 연애 초반엔 꽤 궁금해 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궁금해지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저 애가 나만 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에 훨씬 더 시선이 가 있었다. 그러니까, 도무지 그 애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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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했던 건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 애였다. 나는 그 애에게서 그런 모습 말고는 보려고 하지를 않았다. 서글픈 일이다. 한때는 그 애에게서 느껴지는 배움의 열정 같은 면을 좋아하곤 했었다. 헌데 연두에게 사로잡힌 뒤로,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애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간에, 내 곁에 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러니 그 애가 조금이라도 나 아닌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확 나고, 정이 뚝 떨어졌다. 도대체 내가 사랑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런 점에서 ‘SKY 캐슬’은 묻히기엔 참 아까운 드라마다. 그 드라마는 우리에게 이런 연두의 힘이 얼마나 파멸적일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캐슬가 엄마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재엄마와 그 가족의 비극, 그건 결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아이를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부모의 마음이 영재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고, 어떻게 살고 싶어 하는지 하는 것쯤은 간단히 짓밟아버린다. 그러면서 아이가 자기를 몰라준다는 사실에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택한 엄마.

연인이건, 가족이건 이제 그 안에는 오로지 ‘나’밖에 없다. 관계를 생각해서 하는 말들도 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하는 것뿐이고, 상대를 생각해서 하는 일들도 전부 사실은 ‘내’가 원하는 일들이다. 영재 엄마는 영재를 생각해서 죽은 게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나’밖에 몰랐기 때문에, 영재에게 ‘내’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퍼 자살한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뭘 위해 ‘만나고’ 있는 걸까? 연인과 가족, 원래는 삶을 ‘함께 꾸려가기 위해’ 만나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이 관계는 연두가 너무나 살기 좋은 공간이 돼버렸다. 연인과 가족의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지 않다. 서로에겐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것만 잔뜩 요구하는 건, 상대에게는 엄청난 폭력이 될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나’밖에 안 보이는 세계, 도무지 내 앞에 있는 사람과는 만날 수 없는 곳에 갇혀 살고 싶은가? 연두를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봐야 한다. 그 놈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덕분에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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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vs 기계

자, 다시 기계가 출현했다. 기계는 우리를 아주 다른 세계 위에 데려다놓는다. 이들의 운동방식은 아주 경쾌하고, 재밌고, 역동적이다. 무시무시한 연두의 세계가 어딘가 한없이 무거운 것과 다르게, 기계의 세계는 가.볍.다! 욕망기계들, 닉네임으로 ‘부분대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의 가장 큰 특성은 ‘흐른다’는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다른 부분대상 쪽으로 흐르고 있다.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이면서도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짝짓기를 욕망은 끊임없이 실행한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이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다.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9쪽)

조각조각난 부분대상들은 짝을 지을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흘러 다닌다. 가만히 주의를 기울여보면, 우리의 몸 곳곳에서는 굉장히 활발한 활동들이 벌어지고 있다. 귀-기계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주파수를 수신하려고 요리조리 쫑긋거리고 있고, 코-기계는 시도 때도 없이 침입하는 온갖 냄새들을 분석해내느라 허리가 휘어진다. 이들은 늘 무엇과 ‘만나고’ 있다. 어떤 흐름에 접속해서 다른 흐름을 생산하고, 그 흐름은 또 다른 흐름에 의해 절단된다. 귀-기계가 BTS의 이야기에 접속함과 동시에 입-기계는 자신이 입수한 뜨거운 소식을 마구 뱉어내는 흐름을 생산하고, 그것은 또 다른 귀-기계의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만나고 만나는 만남의 대연속! 실제로 우리의 몸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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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욕망을 이렇게 구성하지 않는다. 연인이나 가족을 향해 있는 욕망을 떠올려보라. 상대가 ‘이랬으면 좋겠다’거나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하는 불평만을 계속해서 생산한다. 그리고 그게 ‘나의 욕망’이라고 여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욕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현상을 ‘욕망의 수로화’라고 말한다. 욕망에 어떤 길이 정해져버린, 욕망이 특정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결정돼버린 몹시 안타까운 일이라고. 사실 그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욕망은 이제 무언가를 활발하게 만나는 힘이 아니다. 아직 충족되지 않은 어떤 것, 채워지지 않은 무엇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욕망’을 생각할 때, 무의식적으로 ‘근원적인 결핍’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예속하는 자본주의는, 바로 이 ‘결핍’을 이용한다. 자본주의는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나’의 욕망은 어딘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목마르다. ‘나’는 특정한 어떤 것을 욕망하는 존재이며, ‘나’에게는 욕망한 대상을 ‘갖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렇게 되면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는 일이 곧 삶이 된다. 삶의 본질이 ‘소유’가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욕망기계들을 소유머신으로 만들어야만 지속가능한 체제다. 교환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가지려는’ 힘이 작동해야만 ‘자본’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보기에 자신의 안위에 가장 위험이 될 만한 놈은 바로 ‘욕망기계들’이었다. 이놈들은 도대체가 한군데 머물러 있지를 않고 여기저기 뻗어가며 흘러 다녔다. 워낙에 짝짓는 걸 좋아하는 놈들이라서, 얘네한테는 뭘 좀 가지라고 해봤자 먹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발명한 게 바로 ‘나’다. 파편화된 욕망기계들을 싸그리 몽땅 하나로 묶어 ‘나’에 가둬버리고, 바로 이 ‘나’의 삶이 있을 뿐이라고 주입하면 게임 끝. 이제 모든 ‘나’들이 욕망하는 방식은 동일화된다. “뭔가 부족해, 날 좀 채워줘, 어딘가 헛헛해. 그러니까 난 이걸 먹을 거야, 저걸 가질 거야. 그걸 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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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욕망하는 걸 ‘갖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그게 ‘나’를 채워준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타자와 만날 때에도 ‘나’를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쏠려있다. 나의 연애가 딱 그랬다. 처음에 나는 그 애에게 활짝 열리며 ‘나’에게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듯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연애의 공간을 ‘나’만 들여다보고 있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이제 이런 연애를 거부한다. 나를 열리게 해준 이 고마운 인연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꾸려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진짜 사랑을 하고 싶다. 소유와 결핍 없이 사랑을 한다는 거, 멋진 일이지 않을까? 어디 기대려고 만나거나 불안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상대와 만나고 있는 순간만이 있을 뿐인, 바로 그 만남 자체에만 마음을 다 하는 그런 사랑.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무수히 올라오는 ‘결핍’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자식, 진짜 쎄다. 얘가 하는 말은 너무나 절대적이고 진짜인 것만 같다. “넌 부족해~” 이 말 말이다. 난 아주 오랫동안 내가 ‘존재적으로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외모적으로도 다른 친구들은 다 예쁜 것 같은데 나는 너무나 매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고, 말도 잘 못하고, 하여간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게 거의 없는, 그런 ‘부족한’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런 식의 결핍은 생활 곳곳에서 수시로 올라왔다. 학교에서, 가족 사이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연애에서. 그런데 놀라웠던 건, 이런 결핍을 느끼는 게 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친구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 인터넷 웹사이트 속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지, 하나같이 다 비슷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못 찾겠고, 헛헛하고, 불안하고, 나만 못난 것 같고……. 내가 보기엔 매력이 넘치고, 충분히 멋지고, 생명력 넘치는 사람들이 저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내 머릿속엔 조금씩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나도 저들이 보기엔 멀쩡한 거 아닐까? 근데 나는 혼자 왜 이러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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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우리를 ‘소유’로 이끄는 주범이다. 내 안에서 연두가 망동하는 데에는, 이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 이름은 바로 ‘변태 도덕론자 호미미.’ 앞에 붙은 수식어는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우선은 이 친구의 정체를 소개한다. 호미미는 연두가 서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는 기생충 같은 애다. 호미미가 있어야만 연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알아둬야 할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했듯이, 우린 ‘기계’다. 하지만 자본주의 공장 아래에서 기계들은 오직 ‘연두’로만 작동하고 있다. 흐르지 못하고 꽉 막혀 있는 연두들. ‘나’밖에 모르게 된 연두들. 연두들에게서 ‘결핍’이라는 호미미를 제거해야만 다시 기계들로써 흐를 수 있다. 그렇다면 자, 이제 만나보자. 나의 오랜 고질병이자 연두들의 조력자, 변태 도덕론자인 호미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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