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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클래식 | 천개의 고원 | 지난 10년간 대체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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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1-15 14:46 조회2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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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감이당)

  골목에서 한 아이가 정신없이 놀고 있다. 순간, 한 모퉁이에서 트럭이 돌진해 온다. 아이는 갑자기 커다란 외침을 듣는다. “빨리 피해!”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선다. 세월이 한참이 지난 뒤, 그 아이는 승려가 되었다. 쉰이 넘은 어느 날, 참선을 하다 삼매에 들었다. 순간 눈앞에 한 아이가 골목에서 트럭에 치일 뻔한 장면이 나타난다. 노승은 전신으로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빨리 피해!” 결국 그 옛날 자신을 구해준 목소리는 수십 년 뒤의 ‘자기’였던 것.

(고미숙, 『계몽의 시대』, 2014, 북드라망, p15~16)?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구하다니. 현재라는 시공간은 단순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중첩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이 승려가 되어 자기를 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런데 단순히 목숨을 구했다고 해서 온전히 자기를 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자기구원은 ‘삶’ 자체를 구하는 것! 거기에는 출가를 감행할 정도의 수련(修練)이 필요하리라!

구원의 환상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일요일 아침, 성경책을 들고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예배가 끝나면 성경학교에서 유치부 교사를 했고, 오후에는 기타를 치고 찬양을 하며 길거리 전도를 했다. 저녁 늦게까지 성가대 연습을 하고, 철야 예배까지 드린 후에 집으로 귀가했다.

  잘 결정되고 판이 잘 짜여진 영토들의 놀이 전체, 미래가 있을 뿐 생성은 없다. 이것이 삶의 첫 번째 선이다. 그것은 견고한 분할선 또는 그램분자적 분할선이며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373)

들뢰즈와 가타리는 점과 점을 이었을 때 나타나는 ‘선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삶을 바라본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선이 존재하는데, 그 첫 번째 선이 ‘견고한 분할선’이다. ‘나’와 ‘교회’를 잇는 선을 오로지 친구들과의 친목활동으로만 절단-채취했다.

솔직히 말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심은 전혀 없었다. 목사님의 설교는 지루했고, 심지어 매주 들고 다니는 성경책(내가 만난 최초의 ‘고전’임에도 불구하고!)은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그토록 교회를 열심히 다닌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친구들과 하는 활동은 매우 선(善)해 보였고,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대체 어떤 구원을 갈구했을까. 교회에서 연애하고 결혼을 하는 것! 가족이 다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로운 가정을 꾸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길 원했다. 이것이 나만의 기도 제목이었으며, 삶의 목표이자 구원의 환상이었다. 신앙심은 없었어도 교회에 꾸준히! 열심히! 헌신하면 부자도 되고, 내 꿈도 이루고,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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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분할선에는 안정된 미래만 있을 뿐 생성이 없다. 왜냐하면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 결정에 따라 친구, 가족, 삶의 목표를 항상 동일한 가치관으로만 절단-채취해야 한다. 그래야 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한 선 안에서 삶은 맹목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라 굳게 믿었다.

교회와 ‘결별’하다

스무 살이 되고 친구들이 한창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모습이 걱정되셨던 할아버지는 고모에게 전화해서 나를 부탁했다. 예기치 못한 고모의 호출에 서울 남산 밑 후암동에 위치한 ‘수유+너머’라는 곳으로 향했다.

건물 3층으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긴 복도가 나왔다. 두리번거리며 복도 끝 우측을 돌아보니 넓고 세련된 카페가 나왔다. 나는 그곳에서 조용히 앉아 고모를 기다렸다. 가족 모임 때나 봤던 고모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나는 이곳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주방일과 카페매니저를 하는 것이 나의 주 업무(?)였다.

  균열은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생기지만 정말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다.” (…) 또한 이 선은 모든 사물들을 작동시키지만 다른 단계와 다른 형식을 통해, 다른 본성을 가진 분할과 더불어.

(「세 개의 단편소설」, p380)

수유+너머는 일종의 공부 공동체였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공부하는 곳이라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분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누가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인지 그 경계가 불분명했다.

“그것은 유연한 분할선 또는 분자적 분할선인데,”(「세 개의 단편소설」, p374) 견고한 분할선이 동일한 것으로만 절단-채취한다면, 두 번째 선인 유연한 분할선은 다른 선과 연결 접속하여 ‘상호 보안’적으로 절단-채취된다. 교회는 교리와 목사님을 중심으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위계가 분명하다. 그러니 교인과 목사의 위치는 바뀔 수 없다. 그런데 이곳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여러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들에게 공부란 단순히 지식만을 쌓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배운 것을 새롭게 기획하고 만들어 서로의 위치를 바꿔가며 나누는 것을 의미했다. 스승과 학인의 경계를 허무는 공부가 있다니. 그동안 생각했던 ‘공부’라는 이미지가 확!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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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주방 활동을 해야 한다. 밥 앞에서는 나이, 학벌의 기준은 무의미했다. 내가 놀랐던 지점은 바로 여기다! 밥을 중심으로 공부와 일상이 공유되면서 지지고, 볶고, 웃고, 떠들고. 온갖 사건 사고가 수시로 일어났다.

유연한 분할선은 다양한 사물들과 연결 접속하여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영화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하고 (…). 나는 거기에 보조 역할을 하며 새로운 ‘코뮤니티’를 경험했다. 교회에서 했던 수동적인 활동보다 여러 사람과 능동적으로 기획하고 작업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었다.

  하나는 잘 결정된 집합들 또는 원소들을 작동시키는 커플들의 내부적 관계들이고, 다른 하나는 항상 자기 자신의 외부에 있으며 국지화하기 힘든 관계들로 이는 차라리 사회 계급, 남자와 여자, 이런 저런 인물들을 벗어나는 흐름들과 입자들에 관련되어 있다.

(「세 개의 단편소설」, p381)

‘유연한 분할선’은 견고한 분할선 위에 어떠한 외부적인 힘이 개입될 때 그려진다. 무엇보다 수유+너머에서 나의 내면을 가장 많이 두드렸던 것은 ‘책’이었다. 그 중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그동안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구원의 환상이 작은 입자들처럼 깨지고 흩어졌다.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신이 죽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지? 자신의 존재와 운명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 이때부터 희미하게나마 내 삶에 많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다닐 수 없었다.

생성이 곧 구원이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유연한 분할선’이 더 나은 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선에서도 진정한 생성이 없기 때문이다. 생성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선을 뜻하며, 거기에 진정한 자기구원이 있다. 수유+너머를 만났고, 교회와 결별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내 인식에 많은 균열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균열이 내 삶에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기구원은 불가능하다.

감이당에서 공부한지도 어느덧 7년이 흘렀다. 여러 강의와 세미나가 있었고, 2년간 ‘대중지성’에서 몇 편의 에세이를 썼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철학과 만나 글을 쓰고 있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세 번째 ‘도주선’을 그리라고 한다. 이 선을 그리기 위해서는 꾸준한 수련(修鍊)과 실천이 필요하다. 감이당과의 접속은 수유+너머를 만나 생긴 균열의 틈 사이로 흘러나온 질문들을 하나하나 글로써 구체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저자들은 말한다. ‘무기를 가지고 도주하라!’ 나는 지금 글쓰기를 무기삼아 도주의 선을 그리고 있다.

  진정한 단절은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은 과거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 개의 단편소설」, p380)

글쓰기가 왜 도주선일까. 그 첫 번째는 과거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단절’은 과거를 정확히 기억해서 없애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어떻게 하면 유쾌하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다. 철학을 만나면서 유년기의 우울한 사건들이 지금은 재미있는 글쓰기의 소재로 변주되고 있다. 생성은 여기서 일어난다. 나의 언어로 새롭게 재구성된 이야기가 유년기 때 느꼈던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내가 만약 교회를 계속 다녔다면 어땠을까. 엄마의 부재, 아버지의 무능(이전 글 참조)은 나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고, 항상 열등감과 죄의식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신이 나를 구원해주길 갈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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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한 편의 글은 하나의 실천을 행하게 한다. 무엇이든 저장하려는 나, 식욕이 절제되지 않았던 나, 보험이 최고의 안전장치라고 믿었던 나를 들여다보며 글을 썼고, 그것들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실천의 가능성을 체험했다.(이전 글 참조) 위에서 말했듯이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중첩되는 지점이다. 스님이 과거 위험에 처한 자신을 보았듯이, 현재의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글쓰기다. 현재 내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를 보아야 나를 구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글을 쓸 때마다 깊숙한 내면의 자의식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겪는 괴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저자들이 말하는 도주선의 어려움은 이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도주선을 발명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도주선을 삶 속에서 실제로 그려낼 때에만 그것을 발명할 수 있다. 도주선,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 아닐까.

(「세 개의 단편소설」, p389)

들뢰즈와 가타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선’을 단편소설과 콩트로 예고한다. 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설명한다면, 콩트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로 미래를 가지고 현재를 설명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소설이고 콩트인 현재를 어떻게 구성하고, 구현해 내느냐가 과거와 미래의 나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구원이란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려있다. 꼭 글쓰기가 아니어도 좋다. 내가 가진 ‘무기’가 현재의 나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를 구하는 ‘외침’이자, ‘생성’이고, ‘도주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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