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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니체 | ‘내면’을 만드는 앎, ‘내면’이 만드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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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삼봉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5-05 17:02 조회4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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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만드는 앎, ‘내면’이 만드는 삶

< 청년하라! 정직하라! > - 2

신근영 (남산 강학원 연구원)

앎의 지식화, 내면의 탄생

지식으로 축소된 앎은 더 이상 삶을 문제 삼지 않는다. 당연히 조형력도 중요치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지식들을 더 많이 얻는 것. 교육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식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집어넣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소화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계속해서 지식이란 것을 밀어 넣는 것, 그것만이 문제다.

그렇게 우리는 소화되지 않는 앎으로, 지식들로 가득찬다. 어떤 것 하나 행위로 직접 이어지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부딪히고 있는 지식들. 이 지식더미들의 소란을 우리는 우리의 ‘내면’이라 부른다.

현대인은 결국 엄청난 양의 지식 돌맹이를 몸에 달고 다니는데, 이 돌맹이는, 동화에서 말하듯이,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 안에서 덜커덩거린다. 이 덜커덩 소리를 통해 현대인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외면과 일치하지 않는 내면 그리고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외면이라는 기묘한 대립이 현대인의 특성인데, 고대의 민족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배고프지도 않은데,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변혁적인, 바깥으로 몰고 가는 동기로 작용하지 못하며, 일종의 혼동의 내면 세계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것을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다. (프리드리히 니체, 『반시대적 고찰』 2부, 이진우 역, 책세상, 318쪽)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들. 소화되지 않아 그득히 찬 지식더미들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내면의 정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내면과 외면의 괴리 속을 떠돈다. 왜 아는데 안 되는 것이지요?, 라는 질문. 앎과 행의 불일치, 앎과 삶의 괴리! 이런 대립은 근본적으로 앎을 지식화하는 근대적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현상인 것이다.

더욱이 근대적 인간으로서 우리는 내면성을 ‘나’와 일치시킨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근대를 연 명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적 인간에게는 실제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나라고 여긴다. 결국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지식 소유의 정도이며, 행위는 그 내면을 따라주지 않는 말썽쟁이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행위하는 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생각하는 나’로 자리하게 된다.



우리는 소화되지 않는 앎으로, 지식들로 가득찬다.
어떤 것 하나 행위로 직접 이어지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부딪히고 있는 지식들. 이 지식더미들의 소란을 우리는 우리의 ‘내면’이라 부른다.

이제 우리는 끊임없이 내면을 떠도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내면에 들어가 고민을 하고 있노라면 무언가를 내가 행하고 있다는 기분. 그래서 하나의 행위를 하려면 반드시 내면으로 들어가 고뇌하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꺼내와야 진짜라고 여기게 되는 것. 하지만 그것은 실상 자신의 앎이 아직 소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소화되지 않는 지식 더미들을 뒤적거리면서, 그것에 때로는 짓눌리고,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 퍼즐에 속상해하면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겨우 하나의 지식을 끄집어 내어 실행시켜보지만, 막상 현실에 들어가면 무력하기 그지 없는 앎. 그래서 언제나 후회막급으로 끝나는 고민.

내면에는 뱀과 같은 느낌이 자리 잡고 있다. 즉 토끼 한 마리를 통째로 삼킨 다음 조용히 햇볕에 누워 가장 필요한 동작 외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뱀의 느낌 말이다. 내면적 과정, 그것이 이제 문제 그 자체가 되고, 그것이 진정한 “교양”이 된다. 지나쳐 가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교양이 소화 

불량 때문에 파멸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만을 가지고 있다. (같은 책, 318쪽)


둔감하거나, 경박하거나

그렇다면 내면성을 가진 근대적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우리는 여기서 근대라는 세계를 잠시 살펴봐야 한다. 근대를 표현하고 있는 ‘역사’는 진보주의다. 그것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역사로 보았다. 모든 것이 재빨리 뒤로 밀려나 지나간 것이 되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새로운 것들. 근대적 앎 또한 이와 맞닿아 있다. 지식은 태어나자마자 곧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내달린다. 배움은 뒤로 쌓여가는 지식더미들과 새롭게 밀려오는 지식들 사이에 짖눌릴 수 밖에 없는 형국이 된다.

이렇게 앞뒤로 압박해 오는 세계에서 내면의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두 가지다. 우선 첫 번째는 둔감해지기 전술. 내면의 인간은 이미 소화불량 상태다. 더 먹는다는 것은 무리다. 당연하다. 살려면 그 수밖에 더 있겠는가. 내면의 인간은 자신과 만나는 것들에 무관심해진다. ‘그놈이 그놈이지 뭐’라며 시큰둥해하기. 그 무엇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그는 어떤 것 하나도 삶으로 깊이 들여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꾸미지 않고 말한다면, 밀려 들어오는 양이 너무나 엄청나고, 낯선 것, 야만적인 것, 폭력적인 것이 “무서운 덩어리로 뭉쳐서” 너무나 강력하게 젊은 영혼을 습격하여, 그는 의도적으로 둔감해야만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 정도다. (같은 책, 349쪽)

두 번째 전술은 관람자가 되는 것이다. 이 역시 첫 번째 전술처럼 더 이상 무언가를 들여놓을 수 없다는 것, 하여 자신 앞의 것을 삶의 문제로 가지고 오고 싶지 않다는 것과 관련된다. 내면성으로 그득한 존재가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면 가장 부담없는 것들로 먹겠다는 것. 그래서 근대의 인간은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흥밋거리를 찾게 되며, 나아가 모든 것을 그런 흥밋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피로한 미각”에는 “최신의 자극제”가 약이 되는 법.

내면과 외면의 이런 대립은 외면적인 것을, 야만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거친 욕구에 따라 성장했을 때보다 더 야만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밀려오는 것을 제압할 만한 어떤 방법이 천성에 남아 있겠는가? 있다면 단 하나의 방법, 가능한 한 가볍게 받아들여 다시 재빨리 제거하고 내던져버리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실제 사물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약한 인격”이 생겨난다. (같은 책, 320쪽)

소화력을 키우지 못한 채 우걱우걱 넣는 지식은 오히려 소화력을 약화시킨다. 요컨대, ‘약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약한 인격은 ‘겪는다는 것[파토스, pathos]’이 어떤 것인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겪음’이란 자신 앞의 것이 몸으로 밀고들어와 몸에 새겨지는 것이자, 삶을 만들어가는 체험이다. 이 체험에는 조형력이 필수다. 하지만 약한 인격의 소유자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배워본 적이 없다. 그저 지식을 습득하는 것, 지식을 소유하여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만을 알 뿐이다. 하여 모든 것을 “유랑하며서 즐기는 관람자가 되었으며, 큰 전쟁도 대혁명조차 한 순간이라도 변화시킬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놓여 있다.”(같은 책, 326쪽)



더 먹는다는 것은 무리다. 당연하다. 살려면 그 수밖에 더 있겠는가.
내면의 인간은 자신과 만나는 것들에 무관심해진다.
그 무엇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그는 어떤 것 하나도 삶으로 깊이 들여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교육에 의해 탄생한 약한 인격은 점점 더 삶의 재료가 되는 것들을 잃어간다. 그는 둔감함으로, 때로는 경박함으로 삶을 만들어갈 경험들을 쳐내게 된다. 그렇게 그는 점점 더 “삶에 소질이” 없어진다.



나를 믿지 못하는 나

뭐 그런 둔감함이나 경박함은 그려려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면과 외면의 괴리, 앎과 삶의 간극은 우리 자신에게 좀 더 해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생각은 굴뚝같은데 몸이 움직여주지 않아서 괴로웠던 경험을 떠올려 보자. 그때마다 얼마나 우리 자신을 책망했는지…. 이런 경험들이 하루이틀 쌓이다 보면 우리는 점점 소심해지고, 결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면, 우리는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더욱 조심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내면으로 들어가 그 안의 모든 쪼가리들을 모아 이리저리 고민을 하고 결정을 한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에 옮겨보려하지만, 이번에도 머리 속의 지식은 몸과 따로 놀곤 한다. 그렇게 다시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심한 경우에는 어떤 것도 나서서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본능을 파괴했고 잃었으며, 그의 오성이 흔들리고 그의 길이 황무지를 지날 때에, 이제 그는 “신적인 동물”을 신뢰하며 고삐를 늦출 수 없다. 그렇게 개인은 소심해지고 불안해지며, 더 이상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 그는 자신 속으로,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여기에서 이 말은 외부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식의 쓰레기 더미 속으로, 삶이 되지 않는 교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다. 외면 만을 본다면, 우리는 즉시 역사가 본능을 추방함으로써 인간은 온통 추상과 그림자로 변했다는 것을 간파한다. (같은 책, 327쪽)

지식화된 앎은 앎이 곧 삶이 되는 배움의 능력, 즉 조형력을 잠재운다. 우리는 이 조형력 대신 지식들의 편에 우리 자신을 놓는다. 하지만 지식은 삶에서는 무력하기 그지 없는 추상의 세계일 뿐이다. 하여 우리 자신은 추상으로, 실체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그림자 같은 자신에 대해 우리는 불안감을, 삶에 있어 소심함을 품게 된다.

세상에 대한 소화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연하게 대처한다. 설령 상처를 입더라도 그것으로부터 회복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소화력이 약한 사람은 작은 사건도 큰 상처로 겪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회복되는 일 역시 약한 인격의 소유자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된다.



지식은 삶에서는 무력하기 그지 없는 추상의 세계일 뿐,
하여 우리 자신은 추상으로, 실체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변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찍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같은 책, 293쪽)

니체는 말한다. 지자로서의 자신의 높이와 행위자로서의 자신의 낮음을 재어보라고. 우리는 계속해서 지식의 햇빛을 향해 걸어올라가지만, 한편으로는 혼동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거기서 삶의 받침목이 되는 것은 없으며, 있다면 거미줄 같은 지식인데, 그것은 붙잡으려하면 힘없이 찢겨나가는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앎과 삶의 분리는 우리가 우리를 믿지 못하는 힘으로 이어지며, 작은 상처에도 회복불능이 되어버리는 약한 인격의 불안감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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