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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청년|노라는 퇴사 후 어떻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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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1-28 13:52 조회1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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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는 퇴사 후 어떻게 되었는가?





문 탁



1. 왜 평범하면 안 되나요?


요즘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핫하다고 한다.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드라마에서 니체 책으로 독서토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소리를 듣자 더 궁금해져서 기어코 찾아보게 되었다. 다행히 요즘엔 드라마를 정주행하지 않고도 원하는 장면만을 검색해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결국 난 그 문제적 장면, 대학병원 의사, 로스쿨 교수 등 상위 0.01%의 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모두 손에 들고, 겉으로는 “아름다운 캐슬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유산을 전수하기 위해”, 실제로는 자녀의 ‘생기부 독서리스트’에 단 한 줄을 올리기 위해 모여 앉아 있는 그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정말 빵 터졌다. 간만에 장르적 쾌감을 제대로 맛봤다고나 할까. 이 작가, 혹시 천재 아냐? ㅋㅋ


드라마 속에서는 자사고쯤 되는 학교를 공동으로 수석 입학한 두 아이가 이 책에 대해 정 반대의 리뷰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는 니체가 자뻑의 대가인데 자뻑을 부정하지 않는 그 관점이 너무 신선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니체는 적을 갖되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 가지라고 했는데, 그래서 자기가 정말 싫어하는 자신의 경쟁자가 오히려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진정한 벗임을 알았다고, 그 경쟁자를 통해 자신을 극복하는 위버멘쉬가 되겠다고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반면에 다른 아이는 니체는 뒷골목, 씨름판, 링을 가리지 않고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 어퍼컷을 날린 사람 같다고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살고 긍정적으로 산다면 친구를 내 발전에 이용하니 어쩌니 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존재가 될 수 있고 그것이 위버멘쉬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작가는 아마 두 아이에게 정 반대의 캐릭터를 부여한 듯 싶었고, 이런 풍자드라마의 성격상 앞의 아이에게는 오답을, 뒤의 아이에게는 정답을 할당한 듯 싶었다.






그러나 지난 6개월간 몇몇 친구들과 니체의 바로 그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본 나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그 책에 대한 반응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식으로 그렇게 전형적으로 나뉘진 않는다. 특히 이번에 나는 10대부터 50대까지 함께 이 책을 읽었는데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 위험한 니체의 책에 대한 반응이 대체로 세대별로 좀 나뉘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생각해보면 ‘기존의 통념을 부수고’, ‘강자가 되어’, 자기가치를 창조하며’, ‘위험하게 살 것’을 부추기는 이 책에 대해, 가진 게 많은 40대 이후는 불편해하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시퍼런 청춘들은 환호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좀 달랐다. 집도 있고 종교도 있고 가족도 있는 중년층들은 오히려 니체의 충고를 통해 자신의 가족주의를, 집이라는 우리시대의 물신을, 제도화된 신앙을 의심하는 반면에 젊은 친구들은 끊임없이 니체에게 반문하곤 했다. 이들은 니체에게 왜 평범하면 안 되는지, 왜 연민, 동정이 문제가 되는지 궁금해 했다. 아니 단순히 궁금한 걸 넘어 “니체 씨, 왜 이렇게 완고하신가요?”라고 볼멘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왜 안일함 그리고 나약함은 안 되는가? 나약하고 안일하면 신에게 의지하게 되거나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더 큰 나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가 되면 안 되는 것인가? 편안함을 맹신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적당히 괴로울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을 건데 짜라투스트라는 계속해서 고통을 기다리거나 고통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꼭 편안함에서 나와야하는 걸까? 나는 나의 나쁨이, 예를 들면 누군가를 욕하는 것이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아무 논쟁 없는 모래알이 되는 것. 이것을 짜라는 싫어한다. 물론 나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렇게까지 완고한 건 왜일까?.... 군중이 되는 건, 생각 좀 안하면서 사는 건, 고통 좀 덜 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건 안되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완고할까?” (김새은, 문탁네트워크 <니체액팅스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토론을 위한 리뷰메모)


물론 이런 반응이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혹은 이 책에 대한 독해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넘어가도 되는 것일까? 혹시 이것은 ‘평범지향’ 혹은 ‘평범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청년 트렌드의 한 단면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또 이런 트렌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2. ‘쓰담쓰담 토닥토닥’의 정치학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라는 가사의 <양화대교>(2014년)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자이언티라는 뮤지션은 음원계의 절대강자로 떠올랐다. 자이언티에 이어 작년에는 혁오밴드가 가장 힙한 뮤지션으로 등극했다. 이제 젊은이들은 저항적인 포크나 록 혹은 신나고 발랄한 댄스음악 대신, 조근조근 내 귀에 대고 말하듯이 노래하는 창법을 선호하고, 내 머리를 쓰담쓰담하고 내 어깨를 토닥토닥해주는 듯한 노랫말을 좋아한다. 크고 전형적인 이야기 대신 각자의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 ‘좋아요’를 누르며 소통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이제 직장에서의 성공 대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고액연봉을 원하는 대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장기하의 말대로 산업화 세대들이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이야기이기 때문에, 꼰대들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저항성마저 느껴”진다. 이제 드디어 인디감성을 지닌 신인류가 출현하는 것일까?


“‘평범’, 그것은 나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나의 ‘평범’은 ‘평균’과는 무관한 것이다. 사실 나는 평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평균적 삶’을 거부함으로써 나의 평범을 구축했다. 미래를 불안해하고, 남들만큼 갖지 못함에 안타까워하고, ‘좋은 삶’의 궤적을 따라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평균적 삶의 태도’에 대한 경멸 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평균적 삶’에 정면으로 저항하며 ‘자기만의 개성’ 따위를 과시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나는 이 모두를 비웃으며 다른 길을 갔다. ‘평범’이라고 하는 제 3의 길을.

말하자면 일종의 인디적(?) 감성이라고나 할까? 주류에 편입되고 싶어 하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그것과 싸우려고도 들지 않으면서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겠다. 내게 ‘평범한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저항성마저 느껴졌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가사처럼, 게으르고 평범한 내가 ‘별일 없이’ 살고, ‘별다른 걱정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들이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깜짝 놀랄 만한 얘기’일 거라고 믿었다. 평범은 나의 무기였다. 평범 만세!” (정건화, 「평범의 냉소주의에 맞서」, 『청년, 니체를 만나다』, 북드라망, 39~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약간 망설인다.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평범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젊은이들에게, 직장에서의 일 만큼이나 개인적인 삶도 소중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흔쾌하게 박수를 보내길 여전히 주저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소확행이나 워라밸 같은 새로운 감성이 우리나라에서 출현한 것은 최근 몇 년이지만 사실 이런 인디감성의 역사는 훨씬 더 이전까지 올라간다. 슈마허는 일찍이 1970년대에 ‘작은 것’을 역설했다.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1973)는 책을 통해 고도성장에 대한 ‘안티’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반 일리치도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1974)같은 소책자를 통해 경제개발의 역기능을 급진적으로 문제제기했다. 이들은 공히 성장추구나 성공지향이 지구도 망치고 인간도 망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대기업 대신 소규모 작업장을, 대형 마켓 대신 작은 가게를 지향하자고 제안했다. 앙드레 고르스는 『에콜로지카』(2007)에서 이제 성장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화석연료에 의존하여 공장을 돌리고 물건을 대량생산하여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던 근대산업사회는 이미 끝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본주의 위기와 퇴조의 시기에 우리가 어떤 형태의 퇴각을 할 것이냐 라며, 그것이 야만적 형태를 띨 것인지 아니면 문명적 형태를 띨 것인지에 따라 앞으로 인류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나에게 문명적 퇴각의 롤모델은 예를 들면 우루과이의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 같은 사람이다. 그는 대통령 궁을 노숙자에게 주고 자신은 수도 몬테비데오 근처의 허름한 자신의 농장에 살면서 기사도 없이 낡고 작은 차를 스스로 몰고 다녔다. 대통령의 월급 1200만원에서 생활비로 80만원을 제한 다음(이것이 우루과이의 평균 소득이다) 남은 돈은 기부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조차 채소를 직접 심고 수확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먹거리를 삼는 채식주의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



그런데 과연 작금의 워라밸이나 소확행이 앙드레 고르스가 말하는 문명적 퇴각의 형태일까? 그러기에는 소확행이라는 단어의 원조였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 따위의 말들은 너무 반동적으로 여겨지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가 손수 해먹는 파스타나 콩국수 등은 농촌 판타지 먹방처럼 느껴진다. 급기야 BTS 멤버들의 소확행 리스트, 예를 들어 “공복에 우롱차, 루이보스티”(RM), “새로 나온 미디 장비를 구매할 때”(민슈), “열심히 운동했을 때 내 어깨가 넓어짐을 느꼈을 때”(석진) 등을 읽다보면, 이제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플라스틱 단어’(어디서나 쓰이고 있지만, 그래서 성형 가능한 재료처럼 점토처럼 쓰이고 있지만 결국은 어디에나 들어맞아 아무 의미도 없는 말)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는 카풀서비스 제도에 반대하며 숨진 택시기사의 이야기를 다룬 손석희의 <뉴스룸>에서 여전히 틀어지지만, 이제 자이언티는 양화대교 위에 서 있지 않다. 그는 국내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YG 더블랙레이블로 2016년 이적했다. ‘쓰담쓰담 토닥토닥’의 공감과 소통의 정서, 새로운 인디적 정서는 이제 대기업이 밀어주는 새로운 패션이 되어버렸다.



3. 노라는 떠난 후/퇴사 후 어떻게 되었는가


딸아이는 운이 좋은 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기가 원하는 직종에 취직을 했으니. 그런데 내 딸도 요즘 청년들이 그렇듯이 취업을 한 직후부터 퇴사를 하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자기는 순 ‘양아치 회사’에 다니고 있고, 선배들은 죄 꼰대이고, 일은 1도 재미가 없고... 퇴사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치는 듯 했다.


물론 퇴사를 하든 말든 그건 딸아이의 판단이고 선택일 것이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딸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좀 참고 다녀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 까이 꺼, 회사, 당장 그만두라고 말해야 하나, (참고로 고1 때 딸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징징거렸을 때,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만두라고 했었다. 하지만 딸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설득당해 학교에 그냥 주질러 앉았다) 솔직히 잘 판단이 안 섰다. 그래서 “이제 대학을 졸업한 너를 나는 전혀 부양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네 삶이니 입사든 퇴사든 네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쿨한 척했지만 사실은 인식부족! 그래서 지당한 말 뒤에 숨어 버린 비겁함!!


입사 3년차가 되어 가는 딸은 레퍼토리가 좀 바뀌었다. 당장 그만둘 것처럼 난리를 치더니 요즘은 ‘조만간’ 회사를 때려 치고 친구와 술집을 차리겠단다. 친구랑 테이블 두, 세 개 정도 되는 이자카야 같은 걸 차려서 야근하지 않고 (참고로 내 딸은 새벽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다) 소박하게 사는 게 꿈이라는 것이다. 그 때 난 딱 감~~이 왔다. 아, 이들은 21세기판 노라, 하지만 이제 집이 아니라 회사를 뛰쳐나가는/나가고 싶어 하는 노라들이구나, 라는!


알다시피 노라는 입센의 유명한 희곡 『인형의 집』(1879)의 여주인공이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가정이라는 새장에 갇혀 인형처럼 지내던 전업주부가 자아실현을 선언하고 가정을 박차고 나선다는 이 이야기는 당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유럽뿐만 아니라 입센이 번역된 20세기 초의 일본, 중국, 조선 공히 노라를 모델로 삼는 신여성들이 새로운 여성주체로 등장하여 개성의 자각, 자아의 실현을 외치기 시작했다.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인 신여성 나혜석이 쓴 <인형의 家>(1921)라는 시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 기뻐하듯 /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 그들을 기쁘게 하는 / 위안물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 의무같이 /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 사명의 길로 밟아서 / 사람이 되고저......

노라를 놓아라 / 최후로 순순하게 / 엄밀히 막아 논 / 장벽에서 / 견고히 닫혔던 / 문을 열고 / 노라를 놓아주게 (나혜석, 「인형의 가(家)」,1921)



그런데 당대 모든 신청년, 신여성들이 집을 나서는 노라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부추길 때 루쉰은, 아니 루쉰만이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루쉰은 1923년 12월26일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이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이다. 노라가 되고자 하는 신여성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 루쉰이 했던 질문은 “노라는 마침내 떠났습니다. 떠난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루쉰은 아마 노라에게는 “실제로 두 가지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첫 번째 길은 바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새장에서는 물론 자유롭지 못하지만 새장 문을 나서도 매가 있고 고양이가 있으니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더구나 새장에 갇혀 있는 동안 날개도 마비되고 나는 법도 잊었다면 어디를 어떻게 날아갈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두 번째 길은 돌아오지 않고 밖에서 계속 걷는 방법이 있겠지만 “각성한 마음 이외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노라는 - 여기에서 루쉰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만일 제군들처럼 자홍색 털실 목도리만을 가지고 떠났다면 그야 너비가 두 척이든 세 척이든 관계없이” 라고^^ - 그 길에서 필경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라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길에서 굶어죽지도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손가방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라의 삶에서 고상한 꿈만큼이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경제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투쟁이, “참정권을 요구할 때보다 더 극렬한 투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경제권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고상한 참정권과 거대한 여성해방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번거롭고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일이란 작은 일이 더욱 번거롭고 어려운 법입니다.” (1923.12.26,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무덤』, 그린비 전집1, 246쪽)


나는 이제 가정이라는 새장이 아니라 회사라는 새장에서 뛰쳐나오려는 21세기 노라, “매일 퇴사를 결심하는” 내 딸에게 뭔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새장에서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이, 그러면서도 굶어죽지도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냐고.


큰 성공을 꿈꾸진 않지만 불안하지 않은 미래를 바라며, 퇴근 후 가족과 저녁 한 끼, 혹은 친구와 영화 한편 보기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사회가 좀 더 공평하고 공정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소박한 내 딸들에게 말하고 싶다.


큰 성공을 꿈꾸든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든, 안정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어떤 미래를 말하든 미래를 말하는 것은 허망한 노릇이라고. 또한 그대들이 이야기하는 “공평하고 공정한 사회” 같은 것(EBS, <2017 시대탐구 청년> 3부-평범하고 싶다)은 답이 아니라고. 공평하고 공정한 사회가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노 답’인 세상에서 뭔가 정답을 찾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21세기 노라들의 손에 들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솔직히 나라고 무슨 정답이 있겠냐만은, 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위로가 아니라 지성이, 갑과 을이라는 개인들 사이의 공정한 계약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20세기 노라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손가방 - 지성과 우정을 만들어가는 N개의 길 - 을 마련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시 루쉰에게로 간다. 현실을 “독사처럼 칭칭 동여매고 원귀처럼 찰싹 달라붙어” 분투(이것은 결코 ‘노오력’이 아니다!!)하는 수밖에.


짜라와 6개월간 씨름하면서 연극까지 만들어 무대에 섰던 새은이는 이제 배려, 원만함, 평범함 등이 자신의 인정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청년, 니체를 만나다』의 정건화 작가 역시 자신의 평범주의가 냉소와 피로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이제 기만으로서의 삶을 직면하고 그것을 명랑하게 겪어 내보겠다고 한다. 나는 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기꺼이 이들과 함께 노 답인 진흙탕 현실 속으로 GO, GO!!


“무엇을 사랑하든 - 그것이 밥이건, 이성이건, 나라이건, 민족이건, 인류이건 - 독사처럼 칭칭 동여매고 원귀처럼 찰싹 달라붙어 24시간 내내 그칠 때가 없는 자만이 희망이 있다. 그러나 너무 피곤하다고 느낄 때에는 잠시 쉬어도 괜찮다. 하지만 쉬고 난 후에는 다시 한 번 해야지. 두 번, 세 번...혈서, 장정, 청원, 강의, 울기, 전보, 회의, 만련, 신경쇠약, 이런 건 죄다 소용이 없다.................

우리는 신음과 탄식, 흐느낌, 애걸을 들어도 놀랄 필요가 없다. 독하고 매운 침묵을 보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 독사처럼 주검의 숲속을 꿈틀꿈틀 기어 다니고 원귀처럼 어둠 속을 내달리는 게 보이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참된 분노'가 곧 다가오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난날을 앙모하는 자는 지난 날로 돌아가고,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자는 세상을 벗어나며, 하늘에 오르고 싶은 자는 하늘로 오르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려는 자는 떠나야 한다!......” ( 1925.5.5., 「잡감」, 『화개집』, 그린비 전집4,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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