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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니체 | 니체의 ‘아니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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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2-31 00:00 조회43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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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아니오’, 그 후



영(남산 강학원 연구원)


18세, 니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자기극복이며, 여기에 니체의 자유가 있다. 그에게 자유란 아무런 제약도 없는 상태, 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락함이 아니다. 자유는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 한계 위에서 분투하는 것. 요컨대, 한계에 대한 저항이 자유다. 하지만 한계는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그곳에만 존재한다. 자유로운 자에게만 한계 또한 있다는 것. 하여 자유가 만들어내는 저항, 그것이 한계다.


이처럼 운명과 자유는 함께 간다. 운명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고, 자유가 있는 곳에 운명이 있다. 그렇기에 니체는 결코 운명을 피해가려 하지 않았다. 운명과 마주한 싸움이 자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가 그 싸움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싸움 그 자체가 자유이며, 하여 자유는 과정으로서만, “갖고 있으면서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서만 실현된다. 니체는 이 자유를, 종착지 없는 과정으로서 싸움을 살았다.


평생에 걸친 니체의 싸움은 그 모습을 달리하며 계속된다. 때로는 예술을 자신의 무기로 삼기도 하고, 때로는 학문이 무기가 되어 싸움을 이어간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넘어야 할 산이 되는가 하면, 자신 안의 기독교적 뿌리가 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니체의 싸움은 아주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는 운명에 대해 더 이상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는 싸움법을 찾아낸 것이다.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내가 되는 자유


니체의 새로운 싸움을 보기 전에, 잠시 니체의 ‘자기극복’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니체에게 자유는 자기 극복이다. 그런데 이 자기극복이란 말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끊임없이 너를 계발하라는 이 사회의 닦달을 다시 한 번 니체에게서 만나는 듯한 피로감이랄까. 자기극복이 우리가 흔히 듣는 ‘자기계발’이라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계발이야말로 자기극복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의 양식이다.


자기계발은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 하면 더 완전하게 만들어나갈까에 있다. 지금의 나에게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그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 그래서 자기계발이란 언제나 ‘더 나아진 나’가 그 목적이다. 요컨대, 진보한다는 것이 자기계발이다. 하지만 니체의 자기극복은 부족한 것들을 채워나가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니체에게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로서 완전하다. 거기에는 그 어떤 부족, 결함은 없다. 그렇다면 니체가 극복하라는 한계는 무엇일까.


그 한계는 간단히 말해 나 자신이다. 나는 나로서 완전하게 보고, 듣고, 말한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나로서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나의 테두리 안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한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나인 한, 옆집 순희가 보는 식으로, 듣는 식으로, 말하는 식으로, 보고, 듣고, 말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나로서 완전하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의 나야말로 한계라는 것. 이것이 니체가 넘어서고자 한 우리의 한계다.

 

그렇기에 니체의 자기극복은 지금의 나를 떠나는 것,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순희가 되어서, 철수가 되어서, 어린아이가 되어서, 노인이 되어서, 때로는 니체가 되어서, 때로는 고양이나 강아지가 되어서 세상을 만나는 것. 그렇게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내가 되어서, 보고, 듣고, 말하는 것! 멋지지 않은가. 매일같이 지금의 내 눈으로만 만나던 세상이다. 그렇게 내 눈에 갇혀 매일 보던 것만을 보며 지내는 일상이다. 그런데 순희든, 니체든, 고양이든 다른 눈을 갖게 된다면 그 앞에 펼쳐질 세상은 어떨까. 다른 눈을 갖는다는 것, 이보다 더 유쾌한 놀이가 있을까. 그렇게 내 눈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이보다 더한 자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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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눈을 갖는다는 것, 이보다 더 유쾌한 놀이가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토록 시시하게 지금의 나에 매달리는 것일까. 낯선 눈을 갖는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그 눈으로 너무나 추한 세상을 만나게 될까 두려워서일까. 어느 쪽이든 그 두려움이야말로 우리 앞에 놓인 자유의 걸림돌이다. 낯선 것은 낯선 것일 뿐, 나쁜 것도, 추한 것도 아니다. 설령 다른 눈으로 인해 추한 세상을 만난다 해도, 지금의 내 눈으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세계가 열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유다. 더욱이 그 추함이 이 세계가 가진 하나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세상의 진실 한 조각을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때야말로 진정 그 추함의 진실을 떠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니체는 이런 자기극복을 자신을 넘어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본다. 자기계발은 지금 자신의 차원에서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다. 그 길에는 더 많은 것이 펼쳐진다. 하지만 결코 다르게 보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높이 오른다는 것, 그것은 다른 조망권을 갖는다는 것이며, 다른 눈으로 세상의 다른 결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자기극복이며, 하여 자유는 언제나 비상(飛上)의 문제다.



오로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떼는 것.-그것은 결코 삶이 아니지!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독일적인 힘든 일!

바람에게 나를 하늘로 실어 올리라고 하고,

새의 날갯짓을 배워,―

바다 건너 남국으로 날아갔다네.

…(중략)…

벌써 나는 새로운 삶, 새로운 놀이를 위한

용기와 피와 활력을 느낀다네……

(니체, 《즐거운 학문》, 〈부록: 포겔프라이 왕자의 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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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자유는 언제나 비상(飛上)의 문제다.



│‘아니오’에서 ‘그렇다’로


자유로운 자, 그는 새로운 높이를 아는 자이다. 다른 눈으로 다르게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자이다. 그렇기에 자유롭기 위해서는,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가벼워야 한다. 니체는 이 가벼움으로 운명과 대면한다. 더 이상 운명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고, 운명이라는 바람을 통해 높이 오르는 날개짓을 터득한 것이다.


사실 니체의 ‘아니오’는 처음부터 운명에 대한 단순한 거부나 부정이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운명과 자유는 함께 간다고. 운명의 저항력이 자유를 만들고, 자유의 저항력이 운명을 만든다고. 그렇기에 자유를 원하는 순간 우리는 운명 또한 원하는 것이며, 자유에 대한 긍정은 운명에 대한 긍정일 수밖에 없다. 자유는 운명과 함께 오지만, 그 운명을 넘어서는 것이 자유라는 역설. 이 역설을 니체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에는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


운명에 대한 아니오는 나에게 다가오는 그 운명적 사건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운명에 대한 부정은 불가능하다. 운명을 없앨 수 있다면, 혹은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운명이 아니지 않겠는가. 니체의 아니오는 그런 부정이 아니라 운명적인 사건에 대하여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거부다. 운명에 묶여, 그 운명에 끄달려 가지 않겠다는 아니오. 요컨대, 그것은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아니오다.


니체는 이제 운명의 주인으로서 운명을 자기극복의 수단으로 삼는다.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운명을 이용하는 것. 그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사건들을 이용해 다른 존재로 이행한다. 병이 그를 엄습하면, 그는 병과 맞서기보다 병에 올라탄다. 병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세상의 모습, 그 새로운 눈을 병을 통해 얻는다. 기독교라는 자신의 운명에도 그는 올라탄다. 그 운명을 통해 그는 세상 그 어떤 이도 보지 못한 인간 욕망의 깊은 지층들을 보게 된다.


이런 일들이 니체처럼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역시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종종 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세미나라는 사건이 아니었으면 결코 읽어내지 못했을 책들이 수두룩하고, 강의라는 사건이 아니었으면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을 사유의 지층들이 있다.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들 덕분에 보통의 나였으면 넘지 못했을 산도 넘고, 친구들과의 다툼 덕분에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며, 사람 마음의 미세한 결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닥쳐오는 사건들을 통해 새롭게 열리게 되는 시공간,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이 경험.


그럼에도 분명 니체와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는 얼떨결에, 자각 없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이행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며, 우리는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온다. 반면 니체는 자신의 적극적인 힘으로, 스스로 자신을 떠나 다른 존재로 이행해 간다. 그렇게 그는 매번의 사건들을 통해 점점 더 높이 올라간다. 온전히 자기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올라간 그 높이만이 자신의 것이기에.


운명 앞에 놓인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운명의 놀잇감이 되어 세상을 부유하든지, 아니면 운명을 놀잇감 삼아 자유를 향유하든지. 니체는 첫 번째 길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운명에 대한 두 번째 길이기도 하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닥쳐온 사건들을 장애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이 아니었으면 가지지 못했을 눈들을 그것으로부터 찾아낸다.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내가 되기 위해 운명을 사용하기, 운명이 열어주는 그 길을 찾아내기. 이제 니체는 운명을 향해 ‘그렇다’라고 말한다. 아모르 파티, 운명에 대한 사랑! 하늘을 나는 새가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그 바람을 타고 높이 오르듯, 니체는 운명을 타고 위로 날아오른다. 운명을 놀이터 삼는 싸움으로, 즐거운 전사가 되어.


미끄러운 얼음

춤을 잘 추는 사람에게

그것은 천국.

(니체, 《즐거운 학문》, <무용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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