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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학교 고전평론반
읽고 쓰는 것으로 삶을 일군다! 고전적 사유와 밀도 있게 접속하며, 글쓰기와 존재적 성찰을 연결하는 인문 고전 리라이팅 과정

글쓰기학교 고전평론반 글고평

5주차 안나카레니나 후기

게시물 정보

작성자 이달팽 작성일21-09-10 13:45 조회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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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차 글고평 1교시 <안나 카레니나> 후기입니다! 후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월요일이었는데ㅠㅠ 벌써 금요일이 되어 내일이 수업이네요.. 

마침 빈형과 같이 강독을 맡아서, 레빈의 흐름과 안나의 흐름을 각자 따라가며 강독을 구성해보았습니다. 한 명씩 해도 역시나 어려웠는데요^^, 하나의 또렷한 ‘해석’이 나오려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쉽지 않았습니다. 뭔가 안 되고 있다는 것만 뚜렷하고 말이죠.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2권으로 와서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해 초, 글고평을 시작하기 전에는 강렬한 1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2권을 읽어갈수록 톨스토이가 자신이 사유하고자 하는 것에 깊이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점점 <안나 카레니나>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달까요ㅎㅎ

  

빈형과 저의 부족한 강독으로는 그 진가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문샘과 근영샘께서 대신 환히 밝혀주셨습니다.ㅠㅠ 먼저 빈형은 레빈이 죽어가는 형을 통해 ‘죽음’을 마주하는 부분을 강독해주었습니다. 레빈은 이 장면에서 자신이 철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알아내보려고 했던 죽음을 눈앞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만납니다. 레빈은 이때 키티를 보며 죽음을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웁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죽음을 알고, 인생을 아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니콜라이 형에게 죽음이 임박하는 상황은 키티와 결혼생활을 한지 서너 달 즈음 되었을 때인데요. 이때까지 레빈은 키티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불만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자질구레’한 일들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레빈이 보기에 키티는 우리가 흔히 ‘살림’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만 빠져있고 진짜 중요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레빈이 갖고 있던 이상적인 결혼생활과 실제 결혼생활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키티의 그 ‘자질구레’한 관심이 갖는 힘을 레빈은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보게 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이상과 관념의 세계가 ‘현실’ 앞에서 깨져감을 느낍니다. 그런 레빈의 변화는 키티와의 결혼식 장면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5부 4장, p410) 레빈은 결혼에 대한 자신의 온갖 생각,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공상, 이 모든 것이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가 오늘날까지 풀지 못하고 있고 지금은 자기를 위해 수행되고 있는데도 오히려 알 수가 없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차츰 느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을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 결혼 ‘생활’, 가정 등에 대해 레빈의 머릿속에서는 오래 전부터 제법 치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요. 키티와 만나 실제 ‘생활’에 돌입하면서, 레빈의 발은 점점 더 땅에 밀착해갑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큰 문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레빈의 질문은 그가 땅에 발을 붙여가면서 풀려나가지 않을까, 3권을 기대해봅니다.


레빈이 이렇게 자신의 이상과 다른 현실 앞에서 자기 이상과 관념을 깨나가는 사람이었다면 안나는 그와 반대였는데요. 그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브론스키와 외국으로 떠나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는 장면입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남편에게서 벗어나 얻게 된 둘 만의 시간! 인데, 이거 참 어딘가 기묘합니다.


브론스키를 보는 안나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집니다. 또, 브론스키는 안나가 자신의 정식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이 없도록,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한껏 노력합니다. 그런데 브론스키는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이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고, 방향을 잃은 채 자신에게 그때그때 올라오는 ‘변덕’을 마치 삶의 목표인 양 착각하고 붙잡으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온갖 것을 손에 잡아보았다 말았다 하던 중, 원래도 소질이 좀 있었던 그림 그리기에 취미를 붙여보았습니다. 이것저것 자기가 좋아하는 화풍을 따라 그림을 그리고, 안나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화가 미하일로프라는 존재가 툭 튀어나옵니다. 미하일로프는 자신의 작업에 진지한 예술가로, 브론스키는 그의 후원자로 자처해볼까 생각하기도 하고, 그림도 사고, 안나의 초상화를 부탁하기까지 했지요. 미하일로프가 안나의 초상화를 그리러 둘의 팔라초에 왔을 때 브론스키는 미하일로프에게 자기 그림을 평가 받으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하일로프는 (처음 만났을 때의 안나의 사려깊은 태도가 마음에 들었음에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아래 대목에 그려지는데요.


(5부 12장, p455) 그는 브론스키가 그림을 장난처럼 생각하는 것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 그를 비롯한 모든 아마추어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멋대로 그려댈 충분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것이 불쾌했다. 누군가가 밀랍으로 큼직한 인형을 만들어 그 인형에 키스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만일 그 사람이 인형을 가지고 와서 사랑에 빠진 남자 앞에 앉아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애무하는 것처럼 그 인형을 애무하기 시작한다면, 그 남자는 틀림없이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와 똑같은 불쾌한 감정을 미하일로프는 브론스키의 그림을 볼 때마다 경험했다. 그는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얄밉기도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서술은 브론스키의 그림에 대한 것이지만, 문샘은 이 부분을 브론스키와 안나의 사랑 자체에 대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고 하셨어요. 미하일로프가 그린 안나의 초상화는 브론스키 생각에는 ‘나만큼 안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찾아내지 못할 표정’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빛났다고 해요. 그런데 반대로 브론스키는 그 그림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표정을 안나로부터 볼 수 있게 되었죠. 브론스키가 그린 안나의 초상화도 훌륭했지만, 미하일로프의 그림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는지 브론스키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그림을 보고 더 이상 안나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브론스키와 안나는 서로를 사랑하는 데에는 어떤 의심도 없고, 서로를 정성껏 위하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실제로 버리기도 했었죠. 이 장면이 펼쳐지는 곳은 심지어 이 둘을 방해하던 남편과 어머니 등등도 없는 이탈리아입니다. 그럼에도! 왜 미하일로프는 이들의 사랑이 ‘아마추어’로, ‘인형을 애무하는 것’으로 보였을까요?


레빈과 키티가 꾸려가기 시작한 신혼생활과 다르게 안나와 브론스키의 생활은 '위태로워' 보입니다. 두 커플의 가장 큰 차이는 ‘생활’의 유무였습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에게는 생활이 없었습니다. 할 일도, 시간을 채워나갈 일상도, 만날 사람도... 삶이라는 것이 ‘사랑’만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요? 톨스토이는 그것이 ‘현실’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잠시잠깐의 환상일 수는 있지만요. 톨스토이의 분석에 따르면 ‘사랑’만으로 사는 건 석달 정도 가능합니다^^.


‘삶’을 이루는 수많은 층위 중 하나로 ‘사랑’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그럴 때에 ‘사랑’이 정말 서로를 살리고,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미하일로프가 그들에게서 ‘밀랍’을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사랑을 지켜가고 있는 브론스키와 안나를 보면 안타깝습니다ㅠㅠ.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안나는 몇 달 만에 아들 세료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꿀 떨어지는 환상이 깨짐을 느낍니다. 자신의 현실, 무엇을 잃었는지, 어떤 생활-삶을 자신이 버렸는지 깨달았을 때 찢어지는 슬픔과 고통이 밀려옴을 느끼죠. 그 슬픔을 자신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감당해낼 수 없었던 안나는 그것을 외면하고, 브론스키에게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합니다. 깨진 환상을 놓고, 현실에 발을 붙이기보다 환상과 다른 현실에 결핍감을 느끼며 그 결핍을 채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안나는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믿음이 결국 죽음으로 무너지는 것은, 톨스토이의 어떤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강독이 끝나고 나루에서 근영샘이 해주신 이야기를 조금 첨부합니다. 저는 안나가 그 시대 다른 여성들이 ‘적당히’ 살았던 것과 다르게,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사랑에 자신을 던진 그 강인함과 타협 없음이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안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텐데요. 톨스토이는 여기에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에 근영샘이 멋진 답을 주셨는데요(ㅠㅠ) 사랑은 삶을 구원할 수 없는 것 같다(안나를 보면 알 수 있죠.) 그렇지만. 삶은 사랑을 구원할 수 있다. 흑흑.. 감동적..8-8.. ‘산다’는 것이 우리의 사랑까지 구원해낼 수 있다는 것이죠! 레빈과 키티의 결혼생활이 투닥투닥, 질투하고 싸우고, 상처주고, 고뇌하고, 비틀거려도, 그들에게는 삶을 지켜나가는 힘이 있고, 현실 위에 발 붙이고 살아가고자 하며 삶의 책임과 의무, 고통과 기쁨 모두 겪어나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 속에 둘의 사랑이 있지요. 



3권에서 펼쳐질 이야기가 기대되네요. 안나는 앞으로 점점 더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ㅠㅠ 

오늘 중간글쓰기 하시는 샘들 모두 힘내시구요!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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