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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청백전 인절미] 시즌3-축의시대 5,6장 후기 (23/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세실 작성일19-04-25 18:09 조회1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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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4

책: 축의 시대(5장, 6장)

참여자 : 성아, 지혜, 윤하, 보경, 세실리아, 정희, 엘림, 지향.



 발제문을 읽으며 대화를 나누고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발제를 시작하며 타이머 설정을 하였는데 초반에 잘 지켜지는 듯 보이다가 말을 하는 도중에 타이머가 울리는 일이 계속 생겼습니다. 특히 저는 입발제를 하며 맡은 챕터를 모두 설명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혼자 시간을 다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책 분량도 많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꾸 이어지고 이어지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타이머가 있으니 자꾸 급하게 마음을 먹게 되는 점도 있었지만, 확실히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던 것보다는 시간을 맞추어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5장 고난의 시대(기원전 600년~530년경)와 6장 공감의 발견(기원전 530년경~450년경)은 추방당한 이스라엘로 시작하여 자이나교로 끝을 맺습니다. 저번 시간에는 책에 서술된 순서가 아닌 나라를 엮어서 장을 오가며 읽었는데, 이번 주차에는 각 소단원마다 연결성을 가지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는 의견으로 책의 순서대로 함께 읽어나갔습니다.


 세미나는 엘림샘의 발제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엘림샘은 생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던 경험과 축의시대를 읽으며 느끼는 점을 토대로 발제문을 써오셨는데, 청백 세미나에서 종교를 주제로 함께 공부하는 것과 별개로, 현재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인절미 조에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더 재밌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와 현대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의 모습이 한데 섞여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기독교가 고난을 너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에 대체로 공감하였습니다. 야훼가 민족의 신이며 계속된 승리를 이어나가다가 실패를 했는데, 실패의 충격으로 우리가 야훼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는 말하는 모습과 추방당한 자들은 질서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다시 야훼의 뜻을 내면으로 가져오려는 것을 보며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종교의 힘? 또는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동시에 고통이나 상실이 종교화가 되면 한계가 있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용서를 구하면서도 병든자나 외부를 격리하고 경계지으며 내부를 단단하게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번 주에 함께 나누었던 은자가 제의를 내면으로 가져온 것처럼 신이 내면에 자리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면에 야훼를 모시는 것이 이렇게 하면 되겠거니...이렇게 살아가면 되겠거니...같은 느낌도 있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개신교의 등장은 구교의 타락에 의해서였는데, 현대에는 자비나 신성보다 자본을 믿이 때문에 종교나 영성에 대하여 더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뿐아니라 현대에서는 종교에서의 독실함이나 무언가를 절실하게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비아냥거리게 되는 기괴함이라고도 보여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러한 가치들이 이제는 비이성적이라고 보여지고, 비종교인과 종교인들은 서로가 각자 틀에 갇혀서 극단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발제문에도 나와있었던, 축의 시대 309쪽에 나온 '실질적 도움'이라는 것에 모두 흥미를 가졌는데, 감정적인 응원이나 공감이 아니라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부분에서 성아는 최근 실질적 도움을 받은 일화를 이야기 했습니다. 축의 시대를 읽는 과정에서 20분으로 나눠읽기를 실행하고 있던 중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정희언니가 나타나 핸드폰을 가져가 주었다고 합니다. 책을 읽기 어렵다고 감정적으로 공감해주며 읽기가 많이 힘들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을 가져감으로 책읽기를 실질적으로 도와줬다며 이야기했는데, 모두가 웃으며 아, 이거다!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시가 너무 재밌었고, 강렬해서 단박에 납득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고 말해지는 부분은 요가가 나오는 챕터였습니다. 지혜쌤은 요가의 유례가 남·여가 사랑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큰 고통을 느껴서 요가가 탄생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축의 시대가 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요가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프레임을 넘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수행이었습니다. 이에 윤하는 그런데 왜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있는 그래도 보려는게 인간의 본능같다/지루함이라는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다/같은 대답이 이어졌습니다. 머리말에 저자가 말한 인간이 의미를 찾으려 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도 들고, 의미화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서 의미를 가지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이 더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이야기들이 남았으니까 더 읽으면 알겠지? 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는 독특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자기중심이 개인주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외부로만 향하거나 내부로만 향하게 하지 않는 것 같고, 영성-정치라는 코드가 신기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일부러 종교나 삶 속에 배치했는데, 연극을 통해 비극을 받아드리는 것을 보고 아, 이것이 고통의 극한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자이나교에 입발제자 윤하는 이건 모든 걸 금욕했다, 그리스를 보며서 여기가 극이겟지 했는데 더한 극-극-극이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자이나교의 극한! 중에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고통을 이겨내는 가혹한 생활 방식은 땅속에 목만 내놓고 머리카락을 한 올씩 뜯는다! 같은 것이었는데, 끊어지지 않는 카르마의 굴레가 얼마나 극심한 공포였는지부터가 이해하기 어려워서 약간 우스운 코드가 되기는 했습니다. 자이나교가 말하는 카르마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조차도 유익한 카르마를 다 소진하면 죽고 지상에서 낮은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신조차도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함으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면, 좋은 카르마만을 쌓을 수는 없을테니 그 고리를 벗어난 완벽한 진공상태를 얻고자 할 것 같습니다. 


 다음 발제자이기 때문에 세미나가 끝날 즈음 농담으로 나온, 이스라엘은 예수 기다리고 인도는 붓다 기다리자! 라는 말에 마냥 웃을 수는 없었지만 다음 세미나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 엘림샘 발제문 첨부합니다.

백전 시즌3 / <축의 시대> 5, 6/ 2019.04.24 / 김엘림

 

고난이 있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다

 

모태신앙인 나는 기독교에 대해, 그리고 종교에 대해 늘 의문을 품어왔다. 태어나자마자 나에게 주어진 기독교라는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늘 궁금했다. 개개인의 자아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성전을 짓고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신을 믿을 수 있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나의 할머니께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할머니께선 재산의 많은 부분을 교회에 봉헌하시고, 가족의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백일기도를 나가셨다. 그리고 감사한 일이 생기면 감사헌금을 하시고, 교회에 행사가 있으면 봉사헌금을 하셨다. 매일 밤마다 기도를 하시고, 머리맡엔 늘 성경이, tv에선 기독교 방송이 나왔다. 축의시대를, 특히 이스라엘부분을 읽을 때마다 눈앞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발제를 핑계 삼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추방당한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발상의 전환

5장과 6장에 걸쳐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 모습이 그려진다. 이 장들엔 야훼의 이야기를 하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나는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보며 현재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기독교의 뿌리를 찾으려 시도했다.

이스라엘의 축의시대는 뭔가 모순적이지만 바빌로니아에게 정복을 당하며 시작이 된다. 힘이 없는 유다왕국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가 싸우는 그 사이에서 늘 휘둘렸다. 20년이 넘는 긴 싸움은 결국 바빌로니아의 승리로 돌아갔고, 유다 왕국의 왕 여호야긴과 백성 8천명은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을 당한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의 추방생활이 본격화 된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엄청난 고난의 시기를 겪게 된다.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어머니는 아기를 죽여 삶아 먹었으며, 잘생긴 청년들은 시커먼 얼굴에 뼈만 앙상한 몸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배회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공허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기에 몇몇 사람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할 수 있었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교양인, 288~289)

 

무릎을 탁 쳤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상의 전환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추방된 자신의 처지에서 비관과 우울에 빠질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힘든 상황이기에 더 강렬히 열망할 수 있고 더 신실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 진실과 마주하기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56장의 이스라엘 부분에서 미움, 증오, 복수등과 같은 감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언자 예레미아가 전한 야훼의 메시지는 이렇다.

 

나에게 쫓겨 사로잡혀 가 사는 그 나라가 잘되도록 힘쓰며 잘되기를 나에게 빌어라. 그 나라가 잘되어야 너희도 잘될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교양인, 290)

 

자신들을 추방시킨 바빌로니아를 원망해도 모자랄 판에 그 나라가 잘되길 바라라니! 이를 현대적으로 비유하면 마치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일본이 더 잘되기를 바라라는 말과 비슷할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 그리고 예레미아는 반항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일관되게 바빌로니아를 지지했고 지금 상황에서 야훼를 외치고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고 이럴 때일수록 고통스럽지만 사실을 인정하고 진실을 마주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뿐이다. 그는 자기 시대의 공포, 분노, 슬픔에 마음을 열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구석구석을 침범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축의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적으로 강해지고 내면의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안에서 영적인 혼란과 야훼에 대한 분노에 몸부림치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예언자 에스겔은 그곳에서 야훼의 여러 환상을 본다. 환상 속에는 야훼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고 더러운의식을 거행하고 다른 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유다인이 나온다. 하지만 야훼는 약속한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도록 해주리라. 그들의 몸에 박혔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리라. 그래서 나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을 지켜 그대로 실행하도록 만들겠다. 그제가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교양인, 298~299)

 

에스겔은 야훼의 메시지 속 유다인의 잘못을 그대로 전달하고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개개인의 가까운 곳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비록 현재 우리는 우리 땅에서 추방당한 존재들이지만 야훼가 우리와 함께하기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p'로 등장하는 성경을 편집한 사람 또는 학파에게 이어진다.(p의 존재는 추정될 뿐이다.) 그리고 6장에서 2의 이사야로 등장하는 예언자 또한 그 영향을 이어 받는다. 두 사람이 성경을 편집할 때의 세세한 표현법은 다르지만 결국 큰 뜻은 하나다. 이스라엘 민족이 추방을 당한 이유는 신성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를 하면 야훼는 언제나 우리 안에 함께 하실 것이다. 우리의 땅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말고 우리와 같은 나그네 또한 멸시하면 안된다. 약자의 슬픔을 공감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오염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을 직면하고 고난을 통해 희망을 바라보자.

그리고 강하게 믿는다. 언젠가 모든 이들이 야훼의 힘을 알게 될 것이고 자신들의 땅을 되찾을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야훼는 곧 유일한 하나님이다.

 

야훼는 당당하게 선포한다.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으냐?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교양인, 367)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일신교의 형성 과정과 우리 할머니 세대와 비슷한 점들이 많다고 느꼈다. 할머니는 어린시절 일제강점기를 겪으시며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나오셨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도 가난에 허덕이고 6.25전쟁 중 많은 피해를 보셨다. 일본에서의 소수자로서의 삶, 한국에서의 약자로서의 삶. 이러한 세대적 상황 속에서 편찮으셨던 할아버지 그리고 자식 셋을 키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강한 힘. 바로 믿음 아니었을까? 할머니께서는 매일 성경을 읽으시며 추방당해 힘든 삶을 살지만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고 마음 속 하느님을 품고 살았던 유다인들과 평생을 함께하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해 안 되는 행동들이 그 사람에게는 아주 절실한 문제였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종교의 영향력에 대해 다시금 느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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