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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3 <원형과 무의식>2 후기(2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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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쓰담쓰담 작성일19-04-23 13:51 조회1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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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3 2주차 세미나 후기입니다.

저희는 저번 주에 이어 칼 구스타프 융의 원형과 무의식을 읽었는데요, 이번 주 세미나는 5명이서 단출하게 진행하였습니다.

자연 언니와 다영은 중국 여행으로 빠졌는데, 영우샘은 책이 너무 어렵다고 하여세미나를 그만두셨습니다ㅠㅜ 아마 다들 똑같이 어렵다고 느꼈을 텐데 아쉽네요

프로이트에서도 그랬지만 확실히 개념어가 많이 등장하는 책은 더디게 읽히더군요.

그래서인지 이번 주 발제자였던 저는 발제 분량을 못 채우고 제출하고 말았습니다. (눈물)

이번에 읽었던 부분은 집단적 무의식과 그 내용인 원형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집단적 무의식은 대체 무엇이냐? 융은 프로이트가 내세웠던 무의식 개념을 또 다르게 바라보았습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압하는 충동, 개인적인 정감으로 바라본 반면, 융은 무의식이란 의식에 의해 억압되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이라 말하고 그와는 다르게 보다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무의식을 집단적 무의식이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집단적 무의식에서는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요?

집단적 무의식은 우선 의식과 또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식에 끊임없이 침투하여 정신적 사건을 일으킵니다. 현대의 의식이 외부 물질의 객관적 측면이나 이성적 사고를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고대 원시인들은 그런 객관적 설명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태양과 같은 외부적 관찰을 정신적 사건과 연결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런 정신적 사건, 심혼의 드라마가 곧 원시인들의 의식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신화, 민담에 등장하는 자연의 신비스러운 모습은 객관적인 자연이 아닌 그것을 관찰하는 정신의 사건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죠.

신화나 민담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사건, 혹은 심혼의 구체적 내용들은 다르지만, 그것들 속에 어떤 공통된 형식인 원형이 있다고 융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원형의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재밌는 건 이 무의식의 모습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에게로 간 모든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크게 놀랐다. 이 놀라움의 원인에 대해서 그는 꿰뚫고 나가는 빛을 보았는데 그것이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심장이 작은 조각으로 파열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공포에 질린 그는 즉시 얼굴을 돌렸고 땅에 쓰러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얼굴은 타인에게 섬뜩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 원형과 무의식에서 재인용, 솔출판사, p.113)

니콜라우스 수사는 성상을 보고 이와 같은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심장을 파열시킬 만한 공포라니, 요새는 이런 체험을 할 일도 별로 없어서인지 기괴하게 느껴집니다. 고작해야 성상을 보고 이런 환상을 볼 수 있을까요?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환상을 비이성적이라고 말하지만, 반대로 보면 우리의 신체가 무의식에 가닿기에는 너무도 무기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융은 이런 현대인들 상징적 의미의 빈곤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성이라는 선입견과 단견의 총체에 사로잡혀 정신적 사건, 즉 무의식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성(또는 지성)과 정신의 대비는 불과 물의 이미지로도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본래의 유산이 사라져버렸을 때,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표현하자면, 모든 정신 또한 불타는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정신이 무거워지면 그것은 물이 되고, 지성은 악마처럼 외람되게 이전에 정신이 앉아 있던 왕좌를 차지한다.(앞과 같은 책, p.122)’ 정신은 본디 아래로 흐르고 지성은 위로 솟는 성질이 있는데, 그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성과 정신이 분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수승화강의 원리가 떠오릅니다.

지성이 위로 승천한 현대인은 만물을 객관적으로 분별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이성의 지대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정신적으로는 터무니없이 빈곤해진 겁니다. 그런 지성과 이성의 눈에 정신이 담긴 무의식은 온갖 사악한 생각의 근원이 되는 장소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무의식에 더 다가가기가 힘들어지는데, 그곳을 바라보는 게 자신의 절망감과 무능력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어떤 모습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면 그 모습을 부정하고 숨기고 싶어집니다. 분별의 잣대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직시하는 걸 보기 힘들게 하는 겁니다. 융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 무력함과 유약함을 견뎌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돌파해야만 전 세계적으로 넓게 열린 집단적 무의식을 만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글쓰기도 무의식을 만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발제를 쓰다 만 것을 보면 정말 그 모습을 바라보기 싫었던 듯합니다

무력함과 유약함에서 어떻게 집단적 무의식까지 갈 수 있는지는 전혀 감이 안 잡히지만, 그래도 융이 쓴 말은 뭔가 멋있는 것 같아 마지막으로 인용해 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 오는 것은 예측할 수 없게도 무한한 크기의 엄청난 불확실성이며, 외양으로는 내면도 외면도, 위도 아래도, 이곳도 저곳도, 내 것도 네 것도, 선도 악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떠돌아다니는 물의 세계인데, 여기에서 교감신경의 영역, 모든 생명체의 심혼의 영역이 시작되며, 나는 이것저것으로도 분리될 수 없고, 내 속에 있는 타인을 체험하며 타인은 자아로서 나를 체험한다. (앞과 같은 책,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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