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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3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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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호호미 작성일19-04-14 21:47 조회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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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강학원 / 청백전 / 원형과 무의식발제 / 2019.04.14. / 이호정



생명과정으로서의 정신



생명과정이자 자연으로서의 정신

칼 구스타프 융은 정신을 생명과정으로 보고, 그것의 본질을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대어 고찰하고자 한다. ‘생명과정을 다루는 그가 정신에 대해 묘사하는 말들에는 어딘가 묘한 데가 있다. “정신은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우주의 훼방꾼이다.”, “정신은 세계의 회전점이며 세계가 존재하는 커다란 조건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주어진 자연의 질서에 대한 개입을 의미한다.” 이 같은 말들에서 그는 정신을 자연과 연결 짓고 있다.

19세기 이후 프로이트로부터 무의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그의 제자였던 융 역시 정신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로이트에게서 무의식이 의식된 마음의 문턱 아래에 있는 부속물에 불과했다면, 융은 그것을 원형이라는 자연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럼으로써 무의식이 의식과의 갈등을 빚어내는 과정을 정신이라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정신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생리적인 것에 대립되는 무의식적 요인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억압된 원초적 욕망들이 잔뜩 쌓여있는 낡은 창고쯤으로 보았다. 한때 그의 제자였던 융은 무의식적 정신의 성질을 밝히는 데 있어 프로이트가 도움을 준 것은 딱 한 가지였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충동영역과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충동은 호르몬에 관한 현대적 학설에 의해 생리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단지 내분비계의 생리적인 활동에 의해 구성되는 것에 불과한 걸까? 라는 물음이 바로 칼 융이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의식에서 그것과는 다른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예외 없이 충동영역에서, 그리고 충동영역의 기질적 토대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로 그런 까닭에 심혼 그 자체는 생리적 화학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혼은 무생물의 본성을 지배하는 엔트로피 법칙과는 달리, ‘생명과 더불어, 자연법칙의, 즉 통계적 질서를 더 높은’, ‘비자연적상태로 변환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연 요인이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 원형과 무의식, , 39)


융은 정신에서 심혼을 발견한다. 그는 충동을 상부기능 하부로 나눈 자네의 용어를 빌려 사용하면서 충동의 근원은 기능의 하부를 지배하고 이와는 반대로 상부는 기능의 주로 정신적 부분에 상응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 정신적 부분에 해당하는 게 심혼이다. 인간은 불변하는 근원적 충동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와 동시에 심혼이라는 자연 요인에 의해 존재적 변이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혼은 생명속에서 나타나는 일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을 더 높은’, ‘비자연적상태로 변환시킨다. 생명은 무기물 상태에서 유기물의 복합성을 창출해내며 알려져 있는 물리적 자연법칙으로는 도출할 수 없는 고유의 법칙성을 갖는다.’ 융은 생명에서 발견되는 비자연적인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정신은 우주의 훼방꾼이라는 표현을 쓴 걸까? 그가 말하는 심혼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처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은 자연법칙이라는 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써의 요인이다.



정신적인 것에 영향을 주는 의지

그렇다면 이렇게 생리적인 것에 대립되는 정신적인 것을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인가? 하는 게 융의 다음 질문이다. 차근차근 질문을 밟아나가는 성실한 학자 칼 융은 충동의 상부기능 하부간의 구별을 들여다본다. 하부라는 기능 부분은 호르몬과 결부된 부분으로써 강박적 성격을 띤다. 생리적 활동에 의해 어째볼 수 없이 반응되는 부분인 것이다. 반면에 정신적인 것이라 표현되는 상부, 즉 심혼은 강제적인 성향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충동에 반대되는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고찰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이란 기능의 유일한 결정자로서, 기능을 하나의 기제로 경직시키는 본능의 형식과 그 강박성으로부터의 기능의 해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조건이나 성질은, 기능이 외적 내적 제약에서 벗어나 더 폭넓고 자유롭게 사용될 때, 다시 말해 기능이 다른 근원에서 동기 유발된 의지에 사용되려고 할 때 시작된다.

(같은 책, 40)


이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은 충동이라는 기능의 유일한 결정자가 된다. 정신적인 것은 충동을 그 강박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기능이 강박 때문이 아닌 다른 동기에 의해 추동될 때 기능은 훨씬 더 폭넓고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 정신적 조건과 성질이 시작된다.

그리고 융은 여기에서 충동의 기능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써 의지를 이야기한다. ‘의지는 의식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제한된 에너지 양을 의미한다.’ , 의식의 영역을 뜻한다. ‘정신적인 것안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펼치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의식에 해당하는 의지에 대해 덧붙이는 말이 재밌다.


의지는 기능의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알아야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의지는 충동력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드리쉬가 아는 것 없이는 원하는 것도 없다라고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 자의는 다양한 가능성을 직시하는, 선택하는 주체를 필요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신은 본질적으로 맹목적 충동과 의지, 혹은 선택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같은 책, 42-43)


의지적인 것은 충동이라는 무의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이 필요하다. 의지는 무의식의 기능이 폭넓고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알아야한다. 무의식의 새로운 용법에 대한 앎 없이는 의지 역시 무의식적 충동에 잡아먹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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