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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청백전 인절미] 시즌10 <대칭성 인류학>1/2 후기 (99/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홈피지기 작성일21-01-11 20:28 조회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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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6 (시즌10, 9주차)

: <대칭성 인류학> 1/2

참여자(4): 이윤하, 최세실리아, 현정희, 이정하



청백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주까지 왔습니다! 처음 청백전을 시작할 때 정말 끝까지 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는데, 완주를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저희 수요반은 마지막 책으로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을 읽었습니다. 맨 처음 100권의 책을 고를 때, 근영샘께서 나카자와 신이치의 책은 후반부에 읽으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나카자와 신이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의 마지막권 <대칭성 인류학>은 저희가 꼭 뒤에 읽겠다고 남겨놓은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시즌에 마지막 주를 신이치로 장식하고 있는데요. 정말로 마지막에 읽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거쳐 왔던 레비-스트로스, 클라스트르, 로만 야콥슨, 신화들 그리고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들뢰즈와 화엄경 등등이 총 집결된 놀라운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더더 감동적이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책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하나 조금 열린 느낌이 듭니다.


일단 전반부에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우리 현생인류의 특징이 ‘대칭적 사고’를 하는 무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용어로 ‘무의식’인 것인데, 신이치는 이를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마음은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줄 압니다. 우리는 3차원의 세계를 인식합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전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화를 지니고 있던 사회에서는 고차원적 사고가 사회 체계 자체에 녹아있었다고 합니다. 의례와 증여등으로요.


그 고차원적 사고라는 것은 이것과 저것, 전체와 부분, 여자와 남자, 동물과 인간 등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전체로 사고하는 것입니다. 클라인의 병처럼 안과 밖이 하나로 이어져있는 토폴로지를 갖습니다. 이 사고를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역시 언어의 그물에 잡혀서 3차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차원을 오가는 사고를 하는 것이 나카자와 신이치가 ‘야생의 사고’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현대인들은 대칭적 사고를 정말 ‘무의식’에 눌러놓고, ‘이성’, 즉 비대칭적 사고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화를 가진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현대과학의 이진법과 신화의 이항 대립은 무척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과학은 비대칭으로, 신화는 대칭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큰 차이이지만요. 그럼에도 사용하는 도구는 같다는 놀라운 사실! 정하샘은 요새 재밌게 공부하고 있는 양자역학과 대칭적 사고와 비슷해서 신기했다고 하셨어요. 양자의 세계로 내려가면 파동임과 동시에 입자인 전자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신화의 세계에는 염소이면서 인간인 것이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무의식!에 이 대칭성을 사고하는 능력이 잠재해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어쩌면 우주를 인식하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우주를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감각기관이 더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저는 정말 두근두근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무의식을 깨울 것이냐.. 신이치는 불교를, 국가 사회 이후의 대칭적 지성으로 제시할 예정입니다(다음 세미나 분량에서요). 남은 내용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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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5 / 청백전 수요반 / 시즌10 | 9주차 / 대칭성 인류학 / 발제 이윤하


우리 마음은 대칭성을 원한다


지난 시간 우리는 인디언 사회를 들여다보며,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과연 우리가 이렇게 ‘정체’된 듯한 사회에 살고 싶은가, 하는 의문을 품었었습니다. 그런데 나카자와 신이치는 자신 있게, 우리의 마음이 전체성 속에서 살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류’이기 때문이지요.


고차원적 사고를 하는 무의식


나카자와 신이치는 현생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뇌 구조가 변화하며 영역 중첩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동물은 동물을 사고하는 영역에서, 인간은 인간을 사고하는 영역에서 사고되는 것을 넘어서, 각 영역이 칸막이를 허물고 서로 횡단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유동적 지성’이 생겨난 물질적 바탕입니다. 이제 인류는 곰과 인간의 결혼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유동적 지성’이 바로 프로이트가 발견해낸, 또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무의식’이라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에는 이 무의식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내몰아 억압시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 또한 이 무의식을 ‘억압’된 것으로만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무의식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기층이라고 말합니다. 현생인류는 길어진 유년기 동안 이 무의식을 발달시킵니다.

우리가 인간의 특징으로 꼽고는 하는 이성, 합리성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는 무의식이야 말로 현생인류를 특징지을 수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한 공간에 하나의 사물을 놓는 3차원적인 사고 체계라면 ‘유동적 지성’, ‘무의식’은 고차원적 사고 체계입니다. 인간이면서 염소, 인간이면서 범고래인 존재를 충분히 사고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이 길이 단단히 막혔는지 그런 사고가 어떤 것인지 잘 와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잠재력이 있다니?!)

무의식이 생기면서 우리의 언어도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네안데르탈인도 의사소통으로서의 언어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쓰는 언어는 단순했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죠(곰이 온다 등). 그렇지만 현생인류의 고차원적 지성은 3차원적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을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로 비유(은유와 환유)라는 것(신화)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3차원의 세계에서 마음은 고차원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비대칭과 대칭의 ‘복논리’


재밌는 것은 이러한 대칭적 사고와 3차원적인 비대칭적 사고가 인간의 마음에서 음과 양처럼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자기’를 구분하지 않고 전체성 속에서 사고하는 대칭적 사고, 전체를 세밀하게 분할해서 구분하는 비대칭적 사고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우리 마음의 기본 구조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는 극도의 비대칭적 논리로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우리의 대칭적 무의식이 갈 곳은, 아주 좁은 영역이거나 병리적인 영역(분열증)일 뿐인 것이지요.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런 ‘극도의’ 비대칭성이 우리가 만족스러운 삶을 꾸리기에 어려운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현생인류의 ‘마음’은 유동적 지성의 발생으로 형성된 ‘무의식’을 원초적인 기층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사회 전역이 교환 원리 일색이 되어버린 그런 사회에서는 불행을 느끼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현생인류에게 행복은 항상 무의식이라는 ‘마음’의 기층의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현생인류가 행복을 느낄 때 항상 거기에는 대칭성, 다차원성(고차원성) 개체와 전체의 일체감 등, 증여의 원리와 관련이 있는 많은 특징들이 절묘한 작용을 하게 마련입니다.

_나카자와 신이치,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p112


자본주의의 원리인 ‘교환’은 비대칭적 사고입니다. 하나의 물건에도 다차원적인 가치들이 달라붙어 주고받아지는 ‘증여’의 논리와 달리 ‘교환’은 하나의 가치척도(화폐)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증여로 관계를 맺을 때에는 신뢰나 감정 등의 잉여가 발생하지만, 교환을 할 때에는 돈만 주면 되는 쿨!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 쿨한 관계를 어느 정도는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증여의 논리가 오히려 귀찮은 것 같기도 하고요. (7장에 가면 자본주의 속에서 느끼는 행복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대로 대칭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값을 따져 물을 때보다 마음을 내서 선물을 건네는 것이 더 기쁘고, 세상 속에 단독자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물을 때보다, 우주 속에서 나를 인식할 때 더 편안합니다. 물론 비대칭적 사고만을 갈고 닦아온 우리에게 후자의 장을 생성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

신기한 것은 비대칭성이 대칭성 위에 올라타면서, 종교에서는 일신교, 경제 영역에서는 자본주의, 정치의 영역에서는 국가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세 가지 모두 같은 토폴로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표적 일신교인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역시 고차원적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부의 증식이 그것이죠.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현생 인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로 칼을 베듯, 극도의 비대칭성 속에서도 대칭성을 떼어놓을 수 없나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러한 ‘일’의 원리를 뚫고 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다시 신화적 사고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전진’하여 또 다른 대칭적 지성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불교와 함께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 될 예정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열광을 다스리는 지혜의 복주머니(p68)”가 될 지성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또 그것이 단순히 생리적인 것(뇌 구조)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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