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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뭄조] 시즌10 <장자> 3/3 후기와 발제 (9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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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달달무슨달 작성일21-01-05 13:47 조회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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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 시즌 처음으로 '청백전'에 참여하게 된 온혜원입니다!

이번에 '장자' 발제와 후기를 맡게 되었어요. 개인 일정으로 오랜만에 참여하게 된 세미나였는데요..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자아성찰과 사유들을 하면서 지난 세미나를 놓친 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제 고민과 화두, 생각들이 방향을 잃고 이상한 곳을 헤메고 있을 때, 세미나원들이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

저로 하여금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아요.

이번 세미나에서는 어떤 과정을 통해 도에 이르를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이 이야기 했어요. 

장자가 이야기하는 도는 너무 까마득하게만 느껴져서, 언제까지 기심을 쌓아야하고, 

언제 기심을 버리고 도를 체득해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하지만 대화를 나누며 장자의 이야기가 단계적으로, 

'기심을 다 쌓았으니, 이제 도를 쌓자'는 식의 말이 아니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어요. 

기심을 쌓던 중,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을 거치며 부분적으로 도를 깨우치는 순간이 오고, 

또다시 기심을 쌓던 중 그렇게 도의 일부를 깨우치는 시간들을 거치며 

우리는 매순간 도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결국 '일단 많은 공부를 한 후 나중에 도를 쌓아야지' 가 아니라

매순간 도를 깨닫도록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 밖에도 나누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어 파편적이긴 하지만 정리해볼게요.

먼저 전체의 흐름을 보지 않고 자의식에 갇혀 '나'만을 바라보니까 과거와 현재에 갇혀있는 것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이 때문에 자의식과 인정욕망의 차원을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거라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세미나에서, 자의식이 나를 의식하는 첫 단계이기에 자의식은 필요하며, 

오히려 자의식을 부정하기보다 끝까지 밀고 나가다가 내려놓게 되는 방식이 

어쩌면 자의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데 더욱 효과적인 방식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이라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건 온 맘 다해 목표를 성취하려 애쓴 후의 실패에 미련이 없는 것이나,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연애를 한 후 아무 미련 없이 상대를 보내줄 수 있는 경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자의식을 엄청나게 키우고 키우며 나의 만족을 늘리려 해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면, 

이런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닫는 게 가능할테니까요.

이 밖에도 유가 사상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도가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요.

결국 현실과 이상을 모두 결합하여 땅과 하늘의 군자가 모두 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자를 읽으며 불안한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보다 안정되었지만 한편으로 석영 쌤이

'이 책을 다 읽고, 세미나가 끝난 후에 이 상태가 유지될 수 있을지.'라는 의문을 제시했을 때, 저 또한 제 자신을 믿지 못했어요.

어떻게 지속적으로 이런 성찰과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앞으로도 꾸준히 궁리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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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아십니까?

-편안한 나로 이르는 길-

도를 아십니까?’라는 문장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희화화되어 개그코드로 쉽게 소비되기도 한다. 이런 배경 하에서 라는 단어는 상당히 뜬구름 잡는 말처럼 여겨지기 쉽다.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의 언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자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하는 도란 무엇일지, 다시 알아봐야 할 것이다. 6편부터 부록에 이르기까지 장자는 다양한 이야기를 제시하지만, 결국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은도란 무엇인지, 도에 머무르는 이는 어떤 모습인지등의 내용이다.

장자에 의하면 ()는 ‘자본자근(自本自根)’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그것에 의지해 있지만 그것은 아무것에도 의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만물은 ‘유대(有待)’인데 반하여 도는 ‘무대(無待)’라는 것이다. 현대말로 하면 ‘자존(自存)’인 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라틴말로 ‘aseitas’라는 것이 있다. ‘스스로에 의함'이란 뜻이다. 도가 모든 존재의 근원(Ungrund)이요,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지금 ‘러함’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이런 도를 아는 이를 장자는 진인이라 칭하였다. “진인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라는 구절을 통해 죽음과 삶 모두를 의연히 받아들이는 자연스런 진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아래 구절은 이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여 보여준다.

진인은 무엇보다 ‘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대립, 상극, 이원론(二元論)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것도 저것도’ 하는 '하나 됨’의 경지, 막히고 걸리는 것 없는 통전적(統全的)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한마디로 유연하고 탄력성 있게 생각하사람이다. ‘하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서로 이기려 하지 않는 경지’라는 것은 자연과 인위를 대치시켜서 자연만 따르고 인위는 배격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마저도 승화한 경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이 서로 감싸 안은 절대적 초분별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런 ‘양극의 조화’를 터득한 경지가 진인이 다다른 경지임을 말한 셈이다.”

한편, 아래는 도에 머무르는 이들이 예상 외로 범인들의 시각에서 존경받는 모습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물에서 사는 것들은 연못을 파주면 거기서 영양분을 받아 살아갈 수 있고, 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지 않고 가만두면 삶이 안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르기를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 잊는다.’ 했다. “그 이상스런 사람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상스러운 사람’이란 보통 사람과 비교해서 이상할 뿐, 하늘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소인이 사람에게는 군자요, 사람의 군자가 하늘에는 소인이라’ 한 것이다.

위와 같은 시각을 거쳐 세상을 바라볼 때, 사람과 사회에 대한 분별이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크게 고민하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지닌 속성은 일관되지 않으나 그럼에도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삶을 일구어 나간다. 돈이 많든 적든 소신과 자기 확신을 지니고 살아간다. 어떤 분야에서든 공부를 계속 해나가며 자신을 성찰하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성질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우리는 범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와 반대의 속성을 지녔음에도 훌륭해지고자 애쓰지 않는 이들을 이상하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자신의 확고한 기준없이 다른 이들 틈에서 적당히 살아가는 이들, 시간을 허투로 쓰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 한량처럼 보이는 이들도 하늘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는 군자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하늘의 소인이 사람에게 군자이고 사람의 군자가 하늘에는 소인이라 함은 우리가 타인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기준을 무효화한다. 모든 사람은 하늘과 땅에서 소인인 동시에 군자일 것이기에 완벽한 소인도 군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타인을 대할 때 보다 유연하고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하며 자기 자신도 편안히 대할 수 있게끔 한다. 내가 편안히 느끼는 내 모습이 설사 사회에서 제시된 바람직한 모습과는 결을 달리 하더라도 나는 하늘의 군자이겠거니 하며 웃어 넘길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겐 모두 남들이 보기에 이상스런모습 한두가지씩은 있지 않은가? 이러한 사고를 통해 도에 이르렀을 때 나와 세상을 편안히 대하는 여유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도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에 깊이 이르는 길은 우선 인의(仁義) · 예악(禮樂) 같은 이지주의(主知主義)나 윤리지상주의(倫理至上主義) 의식 구조를 버려야 한다. 『장자』에서 말한 기심(機心, 기계적인 마음), 이지적이고 관념적이고 계산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마음을 우선 잊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이런 것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생래적인 무지뿐이라면 잊고 버리고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획득함이 있고, 그 후 이런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 이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결국 도를 얻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마음, 기심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용문의 뒷부분에 중요한 문장이 등장한다. 바로 기심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 분석적 사고, 즉 기심은 후천적 학습을 통해 형성되는 경향이 많기에 생래적 무지를 학습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도에 이르는 첫번째 단계이다. 따라서 도는 비워져있던 머리와 가슴을 공부나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가득 채운 후, 다시 비워내는 과정을 거치며 깨달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쳐 도를 알고 진인이 된다면 좋고 나쁨의 분별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마음을 비운 채 자신의 천부의 본성에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아래는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인용문이다.

“새를 새 되게 하라”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천부의 본성이 있는 것. 이것을 무시하고 새를 사람으로, 그것도 이 이야기에서처럼 “국빈(國賓)’으로, 대접하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곤란 정도가 아니라 ‘새 죽이는 일’이다. 뱁새가 황새처럼 되는 것도, 황새가 뱁새처럼 되는 것도, 모두 무리이다. 그것은 각자의 천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남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 그대로 살고, 본성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보편적 인의예지를 뛰어넘는 도를 깨닫고 본성에 따라 사는 진인이 되었을 때에야 내적 성숙이 이루어지며 탄탄한 삶의 기술을 체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아래 문단에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도를 알게 된 다음에야 오히려 욕망해왔던 것을 얻고 뛰어난 실력을 얻게 되는 역설이 담겨있다.

“기왓장을 놓고 내기 활을 쏘면 잘 맞고, 허리띠 고리를 놓고 쏘면 주저하게 되고, 황금을 놓고 쏘면 마음이 혼란해진다. 기술은 마찬가지인데, 뭔가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어서 그 외면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무릇 외면적인 것을 중시하면 내면적 것에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달생(達生) 19 5)

달생(達生)」 편의 주제는 마음이 주객으로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모으는 것, 전일(專一), 전신(全神), 허심, 무심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 내기 활을 쏜 사람은 상품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 이런 마음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 이런 외적 조건에 좌우되어 흔들리는 것은 ‘술’의 단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목수 재경(梓慶)의 이야기에서 재경이 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할 수 있게 된 준비 과정 중의 하나가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고하는 생각을 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도’를 따르는 경지 이다. ‘궁술(弓術)’과 ‘궁도(弓道)’의 차이다. 1996년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대회 첫 금메달을 탈 것이라고 온 국민이 기대했던 한국 여자 공기총 선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국민의 기대가 너무 커서 정신적 부담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문단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장자를 읽으며 내가 나 되어,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않고, 사고와 욕망 등 모든 것을 비워낼 때에야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삶으로부터 건네받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욕심에 휘둘려 과도한 정신적 부담을 느낄 때에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일의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그간 차분히 갈고닦아왔던 실력이지 그날 내가 꼭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무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무지 마음을 비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혼자서 음악 공연을 하겠다고 홍대 등지의 라이브카페를 돌아다녔을 때, 욕심은 나의 목소리를 굳게 만들었고, 잦은 실수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한없이 우울해지고 나의 무능력에 좌절하곤 했다. 대학 입시를 치를 때 내가 꼭 가고 싶던 학과가 있어 유별난 노력을 기울였고 많은 실력을 쌓았음에도 시험 당일 꼭 합격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힘과 동시에 복통이 시작되었고, 사고는 경직되어 결국 공부했던 것을 잘 풀어내지 못했다. 그때 내가 도에 대해 알았다면 어쩌면 조금은 달랐을까?

이제껏 내가 분별해왔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내가 나쁘다고 생각한 상황에 처할 때, 혹은 처할 것이라 예상할 때마다 불안하고 우울해졌던 마음들이 스쳐지나갔다. 대학 합격은 좋은 것, 대학에 떨어지는 것은 나쁜 것이라 생각했기에, 시험날이 다가올 수록 극도의 스트레스로 매일 코피를 흘렸다. 학점 A+을 받는 것은 좋은 것, B를 받는 것은 실망스러운 것이라 생각했기에 성적 발표날이 다가올 때면 초조하게 성적 확인 페이지를 들락날락거렸다. 미래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없을거라 생각하면 막막하고 우울했고, 그것이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든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하는 것이든 대학 졸업과 동시에 바로 경제적 독립에 성공해야만 한다고 정해두고는 조급증을 부렸다. 연애를 하는데 상대를 자주 볼 수 없다면 나쁜 것이었고, 그래서 헤어지고는 헤어짐은 나쁜 것이라 여기며 나 스스로를 오래도록 힘든 수렁에 빠뜨렸다. 매일같이 몸에 나쁜 음식을 먹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때에는 성실한 다른 이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죽음과 삶마저도 같은 무게로 다루는 장자는 나의 짧은 생 동안 내가 경험해왔던 나쁜 것들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대상이라 여길 것이다. 그의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내가 겪어왔던, 혹은 겪으리라 예상하는 나쁜일들 중에 죽음만큼 무게감이 있는 일도 없다.

19살 이후로, ‘나는 이러해야만 한다는 몇 가지 속성들을 정해놓고서 쉴 틈 없이 살아왔다. 대체로 성취 지향적이었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불안하거나 허무했다. 보이지 않는 기라던지, 도라던지 하는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고, 몸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일은 개의치 않게 되었다. 내 몸이 도를 알고 가벼워져서 안이 텅 빈 느낌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몸 안에 냉기가 도는 텅 빈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장자를 손에 쥐고 읽고 있을 때에는 마음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 상황에 대한 비관이 비대해질 때, 그를 바라보고서 금세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 당장에 내가 갖고 있는 호불호를 없앨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지속적으로 들춰보다 보면 이렇게 되면 좋겠지만, 저렇게 되도 상관없지.’ 하는 정도의 여유는 지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비워냈을 때에야 비로소 천부의 본성에 따라 살 수 있다고 한다. 앞으로는 나라는 존재와 내가 꾸려갈 미래가 반드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고집을 버리고 가벼이 본성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꾸준히 의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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