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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인절미] 시즌9 <철학적 탐구> 3/5 후기 (88/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백수 작성일20-10-11 22:31 조회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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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07 (시즌9, 8주차)

책: 『철학적 탐구』 3/5

참여자(4): 이용제, 이윤하, 최세실리아, 현정희


  안녕하세요~ 시즌9 8주차는 『철학적 탐구』 세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책 앞쪽에서는 눈앞에 있던 의자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고 다시 사라지는 상황을 예로 들며 규칙성이 있어야 언어게임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언어게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규칙과 더불어 “정의에 있어서의 일치뿐 아니라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도 필요하다고 말하는데요, 그러한 일치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라고 부릅니다. 가령 ‘빨강’이라는 낱말로 어떤 색깔을 고르기 위해서는 빨강에 대한 정의와 판단이 일치해야 하는데, 일치란 사람들 사이의 합의나 동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가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삶의 형식이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암반과 같은 것입니다.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정의(定義)에 있어서의 일치뿐 아니라 (아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도 필요하다. 이것은 논리학을 폐기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측정 방법을 기술(記述)하는 것과 측정 결과를 발견하고 진술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측정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측정 결과에서의 어떤 항상성(恒常性)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42, 이승종 옮김, 아카넷, 265쪽>


  비트겐슈타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헤매던 중, 한 친구가 책의 내용과 관련해서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 하다가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끝내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는데요, 이런 경우에 비트겐슈타인은 뭐라고 말할까요? 내부가 아니라 표면을 보라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을 가져와, 마음속에 무언가가 있는데 설명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말하는 게 전부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어떤 생각이나 말을 하려고 하다가 중간에 기억이 끊겼다고 생각한 적이 자주 있었는데 그 빈 공간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는데요, 그는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애매한 사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제거하고 아는 것만을 기술만 함으로써 언어의 명료화를 꾀해 철학적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한 시대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유와 삶의 양식의 변화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보았고, 그런 신념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고 실험했다고 합니다. 온통 추상적인 표현을 가져다 쓰고,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책의 뒷부분에는 어떤 내용이 나올지 다음 주가 기다려집니다!



+발제 첨부

청백전 수요반 s9 / 8주차 / 『철학적 탐구』 §185-§362 발제 / 2020. 10. 07 / 현정희


전제된 것들


1. 규칙 따르기

  우리는 대수 공식에서 연속하는 이행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자연수열을 완전히 익힌 학생이 “+n”이라는 형식의 수열을 0, n, 2n, 3n…으로 적어 가도록 배웠고, “+2”이라는 명령에 따른 수열을 2, 4, 6, 8…로 적는다면, 그 뒤로 1000번대에서도 1002, 1004, 1006, 1008…로 적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공식에 의해 “그 이행들은 실제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1000을 넘어서부터는 1000, 1004, 1008, 1012…라고 적는다. 학생의 답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내가 학생이 사용한 게임과는 다른 게임으로 그 문제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가지 공식으로부터 “등등”의 규칙을 알아냈다고 생각(마치 토끼-오리 머리를 흘끗 보고서 저건 토끼라고 확신하는 것처럼)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더 읽어내려는 노력이 거기에서 그쳤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게임으로 보느냐에 따라, 가령 명령을 “1000까지는 2를 더하고, 2000까지는 4를 더하고, 3000까지는 6을 더하라 등등”으로 이해한다면, 1002뿐만 아니라 1004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규칙에 부합한다는 말인가?” ―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보여주는 것은 말하자면 규칙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어떻게 규칙을 따를 수 있는가?” ― 이것이 원인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면, 내가 그 규칙에 따라 그렇게 행위하는 일에 대한 정당화와 관련한 질문이다.

  내 근거들이 바닥났을 때 나는 암반에 도달한 것이고, 내 삽은 휘어져 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다만 이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17, 이승종 옮김, 아카넷, 254-255쪽>


  우리는 “x에 똑같은 수를 대입할 때 y에 대해 모두 똑같은 값을 산출해내는 방식으로 y=x²이라는 공식을 사용하도록 교육”받았다. 1000단위로 끊어지는 매 단계마다 새로운 결정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즉 우리가 하나의 공식을 보고 일치하는 답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동일하게 받은 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이미 전제된 것들로 인한 정당화라는 암반이 있어 우리는 답이 옳은지 틀린지 의심할 필요 없이 그저 그렇게 할 뿐이다.


2.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

  내적 체험에 대해서도 이런 정당화가 가능할까? 우리가 통증을 느낄 때 그 감각을 “아픔”이라는 낱말로 일치시킬 수 있는 건 그 낱말이 언어게임에서 사용되는 방식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이 느끼고 있는 “아픔”이라는 감각을 지닐 수는 없다. “아픔”이라는 내적 감각은 사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치통이 있을 때 우리는 그가 통증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이가 아플 때 얼굴 표정을 찡그리며 볼을 만진다. 이런 동일한 통증행위로 인해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사람이 치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적 감각에 동반하는 감각 행위인 찡그림은 사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감각뿐만 아니라 이가 아플 때 얼굴 표정을 찡그리며 볼을 만지는 것과 같은 감각에 대한 행위가 일치하는 것은 “삶의 형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3. 생각함과 말함

  우리는 대수 공식에 이미 앞으로 전개될 수열이 포함되어 있듯이, 우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말로 표현하기 전에 이미 정신 속에 존재했다고, 우리는 다만 그 표현을 찾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에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말이나 문장에 의미가 부여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을 미리 의도하는 것은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언어게임에 숙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더욱이 사적 언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한 낱말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미리 추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낱말의 작용을 지켜보고 배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제된 것들을 뒤집어 암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이 게임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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