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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뭄조] 시즌9 <몽테뉴 수상록> 발제와 후기 (8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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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아 작성일20-09-15 14:33 조회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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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5주차 발제와 후기를 맡은 성아입니다. 이번 시즌 몽테뉴 수상록을 읽는 마지막 주였는데요. 훌훌 가벼운 말투의 몽테뉴를 읽으면서 그동안 유쾌했고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벌써 떠나보내려니 조금 아쉽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몽테뉴와의 만남이 계속 될지! 기대되네요.

나는 자신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심려하듯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남의 것을 빌려옴이 아니고, 자신의 것으로 충족되기를 원한다. (같은 책, 691쪽)

제가 씨앗문장으로 가져온 구절은 바로 윗 문장입니다. 평소 자의식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로 자의식을 없애야 돼, 없애야 돼, 중얼중얼 주문을 외다 보니 ‘자신의 것’ ‘내 것’이 들어가는 문장만 봐도 덜컥 부정적인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자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몽테뉴는 ‘자신의 것으로 충족되기’를 말한다니? 몽테뉴가 꿋꿋하게 세우고 싶어하는 ‘자신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시작된 발제문이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랬습니다: 1) 우리는 ‘남의 것을 빌려’온 생각이나 기준을 곧잘 내면화하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 이런 착각에서 빚어진 주체성이 아니라 진짜 주체성이란, 즉 몽테뉴가 말하는 ‘자신의 것으로 충족’되는 삶이란 살든 죽든 ‘늘 내 키를 바로잡는’ 태도다. 라는 것이었는데요, 첫 꼭지에 들어간 비유가 설득력이 없었으며, 첫번째 꼭지에 대한 내용을 쓰느라 두번째 꼭지의 내용이 제 말로 풀이되지 않았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져서 정작 핵심적으로 생각을 밀고 나가야 했던 부분을 보지 못햇던 것 같아 스스로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세미나에서는 특히 2권 13장 <타인의 죽음 판단하기>와 17장 <교만에 대하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주고 받았습니다. ‘뼈 때리는’ 말이 줄줄줄 이어졌는데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담담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너무 중하게 여기기 때문, 이라고 몽테뉴는 일갈합니다. 정작 우리는 홀몸에 불과하며 세계에 있어서 티끌만한 존재인데, 스스로에 대해서 부풀려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몽테뉴가 인용한 플리니우스의 말이 인상 깊었는데요, “푸른 하늘과 우리 사이에는 우리의 죽음 사고 때문에 별들이 소멸할 정도의 교분은 없다”라니… 어린 시절 삼국지에서 어떤 장수의 죽음을 별이 지는 것으로 알아보고 탄식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저는 그 장면이 너무 멋있어서 저 자신도 별에 비견할만한 몸집있고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었는데 플리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건 허풍스럽고 교만한 인간이 하는 착각인 것입니다.

몽테뉴는 자기 자신을 너무 중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넘어서 “사건들이 내게 맞춰 오지 않으면 내가 사건들에게 적응해 나간다”고 유쾌하게 대처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사건을 입맛대로 돌려놓기 때문에 과하게 열심히 노력하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죠. 제 자신에게는 최악으로 상황이 치닫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인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사실 나에게 가해지는 변고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니까요.) 중세 유럽의 귀족 몽테뉴가 어쩜 이렇게 동양의 성인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네요.

이렇게 5주 간의 걸친 몽테뉴와의 만남이 마무리가 되네요. 다음주에는 팡세를 읽고 만납니다. 모두 다음주에 뵈어요!


2020.09.08. / 청백전 화요반 / 『몽테뉴 수상록』 / 김성아

늘 내 키를 바로잡기란

책을 읽다 보면 나를 가장 들들 볶는 것이 사회도 돈도 부모도 아니라 내가 가진 자의식이라는 점을 자꾸 되짚게 된다. 그 자의식을 버리는 일은 내가 당장 어떻게 뿅 고쳐놓을 수 없는 타인과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유일하게 정확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의식에서 벗어나자’라는 구호만을 반복, 또 반복하면서 정작 엄밀하게 물어본 적 없었던 질문이 있다. 그래서 ‘자의식’이 뭔데? 내가 생각할 때, 자의식은 곧 ‘내가 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헛된 생각이나 욕심’ 정도로 풀이된다. ‘자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렇다면...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일체 하지 않는 것 정도 될까? 이렇듯 거칠고 듬성듬성하게 자의식과 해방을 정의하고 있던 차에, 몽테뉴의 에세이는 좀 더 구체적인 언어로 내가 실천해야 할 바를 정리하게 해주었다. 어떻게 해야 진짜로 내가 나를 다르게 살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리얼하게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강도질하는 마음으로 ‘윤리’ 쌓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유독 재밌었던 부분이 있다. 바로 몽테뉴가 자신의 집이 강도의 공격을 피해갈 수 있었던 비법을 소개하는 구절이다. 몽테뉴는 “잠가 둔 곳은 절도를 유인한다. 강도범은 열려진 집을 놓아 두고 지나간다”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하며, 방어 태세를 너무 철저하게 갖추는 것은 되려 강도들에게 그 집을 침범하려는 동기를 불어넣게 된다고 설명한다. 경비가 삼엄하면 할수록 강도들은 그것을 뚫고 공격해 들어가는 일을 용감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는 용감하게 행하여진 일은 무엇이든지 영광스러운 일로 간주’되기 쉽다.

“징벌은 악덕을 깨뜨리기보다도 조장한다. 이런 것은 착한 일을 하려는 의지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것은 이성과 훈련의 성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나쁜 짓을 하면서 들키지 않을 마음의 의지만 가꾼다.” (『몽테뉴 수상록II』, 몽테뉴, 동서문화사, 680쪽)

비단 강도와 집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다그치고 질책할 때에도 비슷한 원리가 작동한다. 자신의 나쁜 버릇을 들추며 자기 자신을 망신 주고, 그러면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며 겁을 주기. 몽테뉴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방어적이고 징벌적인 방식은 효과적일 수 없으며, 금지되어야 하는 일이 지속되게 만든다. 우리가 무섭게 으름장을 놓으면 놓을수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금지된 일을 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한히 변명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앞으로 이기적으로 손익 계산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한다면,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다짐했다고 하자. 금지와 징벌을 무겁게 설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무서운 감시자인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게 적합한 태도 아닐까?”라든가, “이건 손익 계산을 한 게 아니라 최소한의 자기방어일 뿐이야”라든가. 창의적인 변명이 난무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진정으로 바꿔보려고 했던 본래 의도는 다만 나쁜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잔머리 굴리기로 전도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착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고되게 고민을 하고 있으니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윤리를 지키고 있다고. 마치 강도들이 뚫기 어려운 경비를 뚫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영광되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징벌과 도망의 굴레를 넘어서

우리의 심령은 드러내 놓고 보여 주기 위해서 자기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눈밖에 다른 어느 눈도 들여다볼 수 없는 내부에서 연기한다. 거기서 심령은 죽음과 고통의 공포와 수치의 공포에 대해서까지 우리를 비호한다. (『몽테뉴 수상록II』, 몽테뉴, 동서문화사, 689쪽)

나는 자신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심려하듯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남의 것을 빌려옴이 아니고, 자신의 것으로 충족되기를 원한다. (같은 책, 691쪽)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했던 생각을 정리하자면, 상당히 모호하게, “이거 자의식이니까, 나쁜 거 아닌가?”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광대한 범위에서 자의식을 정의했으므로, 나는 왠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시선을 중시하는 듯한 몽테뉴의 주장을 경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나에 대해 헛되게 기대했던 것이나 엄격하게 금지했던 것이 오롯이 ’자신의 눈밖에 다른 어느 눈도 들여다볼 수 없는 내부’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남처럼 나 자신을 징벌적으로 통제하려고 했었고, 그 기준 역시 내가 정해놓은 것이 아닐 때가 많았다. 말하자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걱정이 곧 내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그 자체였을 뿐이다. 몽테뉴는 빌려온 남의 것으로부터 분리된 ‘자신의 것’을 오히려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곧은 길은 그것이 곧기에, 또 내가 좇는 것이 아니라 해도 결국 따져 보면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가장 좋고 유익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좇을 것이다. (...) 저 옛날에 뱃사람은 심한 폭풍을 만나서 바다를 다스리는 신 넵투누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오 신이여, 그대가 원하거든 나를 살리라. 그대가 원하거든 나를 죽이라. 그러나 나는 늘 내 키를 바로잡을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II』, 몽테뉴, 동서문화사, 690쪽)

이번에 몽테뉴를 읽으면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던 구절이다. 몽테뉴가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신의 것’은 남의 시선을 그대로 옮겨와서 나를 나쁜 사람, 혹은 착한 사람으로 재단하려고 노력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지금껏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의식’이라는 것은, 그 이름으로부터 예상하게 되는 정의와는 달리, 나를 어떤 사람으로 결론 지으려고 하는 ‘남의 시선’이 나의 시선으로 체화된 것에 다름 없다. 그와 같은 징벌적인 자기 통제가 오로지 결과, 혹은 평가만을 놓고 왈가왈부한다면, ‘자신의 것’을 고수하는 일은 살든, 죽든, 결과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키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뱃사람의 태도와 가장 비슷할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경험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좋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림이 ‘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가 좋기 때문에 행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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