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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뭄조] 시즌8 <성의 역사 4권: 육체의 고백>4 발제와 후기 (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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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빈 작성일20-06-23 22:28 조회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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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드디어 청백전 시즌8, 성의역사 4번째 시간입니다. 성의 역사도 이제 마지막을 달리고 있는데요^^ 잘... 이해는 못 했지만 1권부터 4권까지 차근차근 읽어나갔다는 것에 너무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그리고 1, 2, 3권에서 푸코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을 왜 그렇게 열심히 탐구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쪼끔 풀린 것 같습니다!


저희는 1주차부터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윤리와 기독교의 윤리의 차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요. (저희가 이해한만큼 활기차게 ㅎㅎ) 고대 그리스의 윤리와 기독교의 윤리는 비슷하면서도 무언가 조금 다른 것만 같다는 둥,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비슷할지라도 나아가는 방향이나 마음쓰는 방식이 다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로 했던 것 같아요. 같아 보이면서 다른 그 미세한 차이는 무엇일까...? 하...지금도 궁금합니다 ㅎㅎ


그리고 이번주에는 푸코가 '결혼'을 주제로 쓴 파트를 읽는 차례였는데요. 기독교의 '결혼'... 참 복잡하고 난해했습니다. 지난 주제들, 속죄나 동정에 대해서는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이번주의 '결혼' 파트는 다들 힘들어 했는데요 ㅎㅎ. 그래서 세미나를 하면서 길을 참 많이 잃었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던 부분은 기독교의 종교가 보편화?되면서 수도생활의 금욕적 가치관을 이제 일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고, 새로운 이론과 해석들이 등장하는 부분인데요. 고행의 생활과 일반 사람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결혼'이었답니다. '결혼'은 '성행위'를 동반하는데요. 동정과 순결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기독교에서 '부부의 일상생활과 성행위'의 문제는 중요한 쟁점 거리가 되었습니다. 부부의 성행위는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성행위를 해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러면서 푸코는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서로 다른 해석을 보며줍니다. 저희는 그 중에서 크리소스토무스의 이야기를 주로 나눴는데요.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결혼은 타락 이후에 영혼에 대한 육체의 반항 속에서 존재이유를 갖는 율법이자, 또한 욕망을 굴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율법이다. 결혼은 그러므로 일종의 "구속복"이다" 결혼이 구속복이라니?! 저희는 결혼을 이렇게 정의하는 걸 처음에 경악했답니다. 결혼은 "무젤제의 자유"가 주어진 타락의 상황에 제한을 가할 수 있는 정지선같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겨나는 부부 사이의 윤리는 더욱 기이한데요. 부부는 서로간의 육체적 소유권을 갖게되고, 부부는 서로 다른쪽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부부 안에서 성을 해결하도록 합니다. 성을 거부하면 "사기행위"라는 표현도 쓴다고 하네요! 이러한 기독교의 윤리를 보면서 저희는 "이상하다, 우리 안에도 이런 게 있을까?" "이런 건 어떤 감각일까?" 알듯 말듯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ㅎㅎ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주에 리비도 파트를 읽으면서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했는데요! 다음주 리비도 파트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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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를 보다 놓친 지금의 내 세상

성의 역사 4권에 의하면 고대 기독교에서는 결혼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4세기 말에 이르러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번창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가 국가 조직과 상호적 관계를 맺기 시작한 데 있다. 기독교는 사회의 조직, 관리, 통제, 법규 제정 같은 여러 가지 역할을 떠맡으면서, 기독교가 영향을 주는 범위가 넓어진다. 이전에는 도시사회 밖의 수도 생활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일상생활’, 개인의 삶에 종교적 의미를 강화한다. 수도 생활과 일상생활의 가장 큰 차이는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가족이다. 이제 4세기 후반 기독교인들에게 부부에 관한 모든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된다.

결혼에 관한 기독교의 담론을 보면 고대 이교인의 결혼윤리와 가까워 보인다. “여자에게는 가사를 돌보게 했고, 남자에게는 국사를 맡도록 했다.”, “남편은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를 지도하고, 교육자 역할을 하면서 아내에게 미덕을 기르도록 가르쳐야 한다.”. . 하지만 푸코는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고대 이교인들에게는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던 생식에 관한 문제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크리소스토무스)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왜 생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내세를 위한 결혼제도와 생식

결혼은 육체의 생식과 마찬가지로, 타락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육체의 생식이 위로인 데 반해, 결혼은 육체의 욕망에 제한을 가하는 방법으로서, 타락으로 인해 무절제의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제시된 정지선과 같다.

(성의 역사4, 육체의 고백/ 미셸 푸코 / 나남 / 400p)

크리소스토무스는 결혼과 육체의 생식을 분리한다. 그리고 결혼은 육체의 생식과 마찬가지로 타락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결혼과 육체의 생식에 차이가 있다면, 육체의 생식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반면 결혼은 우리에게 제한정지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 크리소스토무스는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전체 역사가 시작되는 단계에서부터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결혼과 육체의 생식은 왜 분리될 수 있는가?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번식하고 번성하라라고 하셨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는 여자가 만들어지기 전의 일이다. 하느님은 혼자 있는 인간에게 번식하고 번성하라라는 계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생식이 천사처럼 순결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이렇게 보면 생식은 결혼제도 이전에 존재했던 것임을 의미하게 된다. , 기독교의 세계에서 결혼제도와 생식은 꼭 연결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만들어지고 (선악과를 먹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이 벌을 받으면서?) 타락된 세계가 시작되면서, 순결한 방식의 생식은 사라진다. 그래도 하느님은 인간에게 약간의 여지를 준다. “잃어버린 불멸의 영상으로서의 생식이다. 자손을 계속 이어나가는 육체의 생식을 통해서, 시간이 흘러 죽음에 도달했을 때 내 육신이 단순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부활할 수 있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써 육체의 생식은 위로가 된다. 그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기독교인에게 생식은 딱히 쓸모가 없다.

그리고 생식과 마찬가지로 타락 이전의 세계, 천국의 세계에서는 결혼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타락의 세계에 들어오면서부터 결혼이 필요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타락의 세계에서 결혼은 왜 필요한 것일까? 타락의 세계는 낙원과 반대로 육체적인 욕망이 들끓는 곳이다. “식탐, 성욕, 탐욕, 분노, 슬픔, 권태, 헛된 욕망, 교만등이 가득 찬 세계이다. 이들은 육체를 뒤덮고 영혼을 위협한다. 특히, 성욕이 그렇다. 급작스럽게 올라오는 성욕은 영혼의 평화를 방해하는 적으로 간주한다. 현세에서 이러한 육욕을 제어할 수 있어야만, 육체를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어야만 내세에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결혼은 육체의 욕망에 제한을 가하는 방법으로 존재한다. “결혼의 본질은 결국 제한인 것이다.

정리를 해보자면, 크리소스토무스에게 결혼생활에서 생식은 중요하지 않다, 생식은 불멸의 이미지를 주는 것으로 현세의 삶에 약간의 위로를 줄뿐이다. ‘불멸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내세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 생식은 내세와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결혼은 어떤가? 결혼 또한 시선이 내세에 가 있다는 점에서 같다. 크리소스토무스는 묻고 답한다. 결혼을 왜 하는가? “우리가 아내만으로 만족하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결국, 기독교인의 삶에 중심에는 내세가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의 생식은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혼 또한 내세의 삶을 위해서존재하는 것이다.

내세에서 현세

기독교에서 삶의 중심을 내세두고 살아간다는 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혼생활을 상상해보면 왠지 답답하고 재미없을 것만 같다. 허황된 꿈을 좇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삶의 중심을 현세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스스로 해보았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했다. ‘내세는 아니더라도 미래의 커다란 보상을 위해서지금을 소외시키기도 하고, ‘하느님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애를 쓰는 나의 모습이 비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대 이교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윤리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 비슷해서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의 중심이 현재에 있든 미래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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