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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 후기 (62/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소담상 작성일20-03-24 16:19 조회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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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두 번째 후기입니다.

이번 주에는 드디어!! 청백전의 뉴페이스가 찾아왔는데요!


따란~ 바로 (멋지게 파마를 한) 연주샘입니다~

청백전 시간을 7시로 착각하여 지각을 할 뻔 했으나다행히 충무로역 근처에 있어서 10분 만에 달려왔다고 합니다ㅎㅎ

(뛰어와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V는 잊지 않지요~)

그렇게 해서 연주샘까지 8명의 청년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


이번 세미나에서는 뱅퇴유 아가씨에 대한 얘기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자친구와 노골적인 애정표현을 즐기는 그녀를

프루스트는 사디스트라 칭합니다.


뱅퇴유 아가씨의 마음 안에서는, 악은,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듯 순수하고 완전한 악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와 같은 사디스트들은 악의 예술가이지, 타고난 악인과는 다르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국일미디어, p.232-233)

 

뱅퇴유 아가씨의 여자친구는 그녀에게 창문을 열어 놓고 남들이 보든 말든 애정표현을 하고

아버지 사진에 침을 뱉을 수도 있다는 과격한(?) 선언을 합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이에 역정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말들을 즐기기까지 하죠.

이에 프루스트는 뱅퇴유 아가씨가 막무가내라서 그렇기 보단

오히려 너무나 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여자친구의 과격한 말에서 쾌락을 느낀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도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불쾌하다고 느끼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건 우리가 무의식중에 자신의 선의 위치에 놓고

악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디스트들은 반대로 그때 일어나는 격정을

일종의 쾌락으로 향유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중요한 건 선, 혹은 악이라기보다는

그 사이의 온도차이고, 그때 불러일으켜지는 감정 자체라는 것이죠.

정말이지 그들에겐 악의 예술가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싶습니다.

 



그리고 메제글리즈 쪽도 게르망트 쪽도, 나로서는 우리가 동시에 평행하게 보고 있는 갖가지 잡다한 생활 중의 한 가지, 가장 격변으로 가득 찬, 가장 이야깃거리가 풍요한 생활의나는 정신생활을 두고 말한다여러 작은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 틀림없이 그 생활은 우리 몸 속에서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며, 그 생활의 뜻과 양상을 우리를 위해 일변시켜 준 진리, 어떤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열어 준 진리의 발견을 위해, 우리는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 왔던 것이지만, 이 준비는 의식 없이 해 왔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진리는, 그걸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된 날이나 순간에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앞과 같은 책, p.259)

 

1권의 마지막에서 는 종탑을 보고 느낀 큰 기쁨을 느끼면서

단숨에 글을 써내려갑니다.

좀 길긴 하지만 그 부분을 한번 다같이 낭송을 해 보았는데요,

내용은 알쏭달쏭하지만 다들 좋다~’는 건 알겠더군요ㅎㅎ

프루스트가 말하는 과거는

흔하게 생각하는 좋지 않은 기억이라든가,

혹은 마냥 좋기만 했던 추억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현실과는 동떨어져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가끔씩 펼쳐보고 마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잠깐의 향수를 전해줄 뿐이었지요.

 

하지만 가 마들렌을 먹으며 떠올린 콩브레의 풍경은

크나큰 기쁨과 함께 어떤 진리를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 진리는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추상적인 기쁨을 언어로 붙잡는 글쓰기를 하면서,

닿을락 말락하는 긴장 속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창조된진리였습니다.

 

이 진리가 무엇일지는 아직 알쏭달쏭하지만

그것이 여태까지의 의 현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여러 여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서 찾으려 했던 어머니의 사심 없는 사랑,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아가위나무의 향기,

천의 얼굴을 보여주는 마르탱빌의 종탑.

 

그렇지만 책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내용들보다도

그것에 하나하나 가 닿는 프루스트의 시선이 참 따뜻해서

이 두껍고도 긴 책을 놓기가 힘든가 봅니다.

 



다음 주에는 새롭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를 읽어옵니다.

페이지는 114쪽까지~

그럼 다음 주에 뵈요!


************


진정한 악의 모습을 찾아서

 

내가 몽주뱅의 늪으로 혼자 산책을 간 날의 일이다. 관목 덤불 속에서 깜빡 잠이 든 나는, 일어나 집 안에 있는 뱅퇴유의 딸과 그의 여자친구를 목격한다. 뱅퇴유 씨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그의 딸와 그 여자친구는 뱅퇴유 씨의 사진을 면전에 두고 사랑놀음에 심취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뱅퇴유 씨에 대한 모욕을 안주 삼아서 말이다.

이 정도면 아침 드라마 11막의 단골 소재다. 우린 흔히 이런 사람들을 방탕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이라 쉬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는 참 많이 본다. 드라마 스토리가 막장일수록 사실 인기는 더 많다. 정작 스스로는 그렇게 살지 못해서 그런 걸까? 어쨌든 나쁜사람들을 보면서 일종의 즐거움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그들을 악인으로 보기보단 사디즘에 심취해있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사디스트들은 악의 예술가로 타고난 악인, 진정한 악인과는 결이 다르다. 심지어 그들은 덕스럽다고까지 말한다. 아니, 아무리 봐도 막장 드라마 주인공 뺨치는 그들이 어떻게 덕스럽다는 걸까? 그가 말하는 진정한 악이 대체 무엇이길래!

 

쾌락, 너 나뻐!

뱅퇴유 아가씨와 같은 사디스트들은, 너무나 순전히 감상적이며, 본디 덕스러운 존재여서, 그들에게는 육감의 기쁨마저 뭔가 나쁜 일, 나쁜 사람의 특권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국일미디어, p.233)

 

프루스트가 말하는 뱅퇴유 아가씨의 덕스러움이란 그녀의 금욕적인 면모를 말한다. 그녀는 대화를 할 때에도 자신이 하는 한 마디가 듣는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혹여나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하고 싶은 말도 편하게 하지 못했던 아가씨. 그녀의 이런 금욕적인 면모는 확실히 뱅퇴유 씨와 닮아있다.

뱅퇴유 씨는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자신이 직접 작곡한 피아노곡을 들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손님들 앞에서 기껏 준비한 악보들을 치워버리기 일쑤였는데,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까 봐서였다. 그런데 뱅퇴유 씨의 연주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진 않았을 거다. 그저 뱅퇴유 씨 자신이 스스로 욕망을 성취하는 걸 좋지 않다 생각했을 뿐.

금욕적인 사람들에게 쾌락은 그 자체로 뭔가 해로운 것으로 비춰진다. 쾌락이 정말 해롭다고 알고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의무처럼 쾌락을 억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쾌락과 의 절묘한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녀가 쾌락에 열중할 때마다, 쾌락이 평소 그녀의 덕스러운 영혼에 없던 고약한 사념을 동반해 와서, 이윽고 그녀는 쾌락에 뭔가 악마적인 것을 발견해, 쾌락을 과 동일시하고 말았다.”(앞과 같은 책, p.234)

그렇게 악은 쾌락의 면모를 띠게 되었고, 쾌락에 딸려오는 매력적인 모습으로서 이 탄생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은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 그것을 위해서라면 의무든 뭐든 저버리는 사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금욕주의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이다. 우리는 결코 의무를 저버릴 수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사람을 악하다 치부하지만 동시에 악(쾌락)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금욕적일수록, 아니 금욕적이기에 악을 원하게 된다는 이런 아이러니!

 

내 안에 악() 있다

뱅퇴유 아가씨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도덕상의 의무를 떨쳐낼 수 없었던 만큼, 그 의무를 어기는 것에서 거대한 쾌락을 느꼈다. 몸소 피하려 하던 쾌락을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은 분명 그녀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연인과 둘이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허니문을 즐길 수 있다니!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니! 눈부신 쾌락의 세계에서 쇠약해져 가는 아버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뱅퇴유 씨는 음악가였다. 유명하진 않았지만 한때 자작곡 작품집을 만드는 데 삶의 이유를 두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딸을 위해서 작품 생활을 접고, 말년에는 어떤 친지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이는 필시 그의 딸이 당시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연애를 했던 탓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뱅퇴유는 딸과 함께 살고자 했고, 그녀의 여자친구 역시 집에 들인다. 그는 그만큼 딸을 사랑했고 딸과 모든 것을 함께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고뇌 없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 어머니는 뱅퇴유 씨가 딸을 위해 부끄럽지 않고, 존경받을 만한 행복스러운 미래에 대한 단념’(앞과 같은 책, p.227)을 고통스럽게 견뎌냈다는 것을 알아본다. 그는 딸의 연애사를 책망하진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과 딸이 받게 될 사회적인 질타를 두려워했다. 콩브레 사람들이 실제로 그에게 그만한 적의를 품고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뱅퇴유 자신은 그로 인해 심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고뇌를 나눌만한 상대도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딸이라곤 쾌락에 빠져 물불 가리지 않는 상태. 그렇게 뱅퇴유 씨는 서서히 늙어 갔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고뇌를 알아주는 사람은 손에 꼽았을 것이다. 뱅퇴유 아가씨는 의무로 대표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알았지만, 그 역시 고뇌를 품고 있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만약, 자기 마음속에나 남들의 마음속에나, 남이 일으키는 고뇌에 대한 무관심이 있으며, 어떠한 명칭으로 불리든간에, 이 무관심은 잔인성의 무시무시한 항구적인 형태인 것을 판별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악을 이처럼 드물고, 이상하고, 낯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악의 나라에 이주하는 것을 이토록 아늑한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과 같은 책, p.234)

 

뱅퇴유 아가씨가 보여주는 이 무관심이야말로 진정한 악의 모습이 아닐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담고 있는 것. 한없이 순수하며 한없이 잔인한 이 무관심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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