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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청백전 인절미] 시즌 7 <죽음 앞의 인간>2 (62/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이달팽 작성일20-03-22 15:50 조회35회 댓글0건

본문

2020.03.18 (s.7 2주차)

: <죽음 앞의 인간>

참여자(6): 현정희, 이윤하, 최세실리아, 김보라, 김성아, 이용제

죽음 앞의 인간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책은 중세의 중반-후반기를 그리고 있고, 지난주보다 독해가 조금 어려워졌으나

세미나는 참 재밌는데요 !

저 같은 경우에는 살면서 이렇게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본 적도 말해본 적도 없구나 하는 것도 느껴졌습니다.

아리에스를 통해서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말을 해보고 있는 중이니

6주 동안 매번 다양한 이야기와 만나기를 바라봅니다.


저희의 이번 세미나의 과제(?)는 중세 초기의 죽음에 대한 감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받아들임과 삶에 대한 즐거움이 온전히 모순이 아닌 채로 존재하는 감각..


중세에 죽음은 내세(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과 떨어져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세의 중기부터는 지옥이 부각되면서,

내세에 대한 담론의 변화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산 자들이 개입(기도를 하는 것)하려는 마음이 연옥을 만들기도 하고.

사물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은 정물화를 그리게 하고, 죽음을 '가진 것들과의 이별'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와 다른 그들의 죽음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죽음은 어떤지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왜 그리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지요.

책도 물론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태도가 이 죽음을 슬픈 무엇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죠.


중세 초기에는 개개인의 죽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에게조차도요.

누군가의 죽음은 그저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사는, 한 인간의 당연한 숙명이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태도는 동시에 삶을 현재적으로 사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서야, 그제서야 ‘삶’에 대해, 내가 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인식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삶이 끝나는 것을 슬퍼합니다. 갑자기 내가 살면서 한 것들, 살면서 더 할 수 있었을 것들을 아쉬워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내가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성아언니의 말이 인상 깊게 남습니다. 삶은 매순간 돌이킬 수 없는 사실들인데, 긴장이 없이 사는 것 같다, 늘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하며 살았는데,

모든 사건은 내 삶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 내 삶이 끝나도 괜찮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미완이 아니라 완결된 형태로 세심하게 정리하고 의미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삶은 매번 내가 가고 있는 마음의 행적, 행동의 궤적입니다.

이 마음들, 이 행동들을 대충 넘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후회하지 않을 방식으로 쓰고 행하는 것,

이것이 중세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배우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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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18. / 청백전 수요반 시즌 7 2주차 / 『죽음 앞의 인간』 3-4장 / 발제 이윤하



우리는 죽고 싶다, ‘나’로!


  2부 ‘개인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전,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사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보편적 믿음이다. 이를 전제한 채로, 서구의 중세부터 근대(17세기)까지 죽음과 장례문화는 여러 부분에서 변천해온다. 그러니까 사후세계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사후세계가 어떤 것인지 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변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성인일 수 있었는데!

  사후세계가 보편적 믿음이었다면, 그 믿음을 그냥 편하게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을까? 지옥에 떨어지지 않겠다고 수백, 수천 번 미사를 집행하고, 벌벌 떨 바에야(?)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좀 말이 안 되고 요상한 딴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실제로 중세 초기에는 (중기-후기와 다르게) 사람들이 지옥에 갈 걱정을 딱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서 죽으면, 즉 교회의 신도라면, 모두 죽음 이후 안식하며 예수의 재림=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면 된다. 그때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빛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중세 초기에는 교회의 평신도와 성인의 구분이 없었다. 공동체 내부의 모든 사람들이 빛의 세계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3세기 즈음부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의 ‘심판’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상의 종말에는 최종 심판이 이뤄지는데, 신이 죽은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 행했던 선업과 악업을 저울로 계량해서 천국에 갈 영혼과 지옥에 갈 영혼을 나누는 것이다. 이 심판 앞에서 신도는 물론이고 수도사들조차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가... 이 고통스럽고도 집요한 생각이 앞으로의 온갖 죽음에 대한 이미지들과 장례문화를 만들었다.


개인이 죽는다

  심판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이후 어떻게 재판관 천사가 나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냈다. 각자의 행위들이 기록된 장부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고 체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징후이기도 했다. 각 개인의 모든 행동은 초월성이라는 무한의 공간, 표현을 달리 하면 인류의 집단적인 운명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고가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부터 인간의 모든 행동은 개인화된다. 인간의 삶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숨결, 혹은 하나의 에너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삶은 인간 개인의 모든 생각과 말, 행동의 총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략) 한권의 책으로 요약되며 낱낱이 세부화시킬 수 있는 사실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졌다.                    _ 『죽음 앞의 인간』 p201


  인간의 ‘개인화’가 죽음에서도 나타났다. 중세 초기, 인간의 죽음은 초월적인 시공에서 먼지하나가 스러지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신과 그 신이 만든 우주 속에 한 인간의 ‘전기(傳記)’가 주목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의 죽음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류가 살고 죽는 흐름 속에 끼어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의 역사가 오롯이 평가받게 된 것이다. ‘하나의 삶’은 개인의 행동과 생각의 집합이며, 그것은 조목조목 따져지고 평가받을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오만하게도 ‘자기 자신의 행동’으로 지옥에 갈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그 벌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옥에 넣을 수도 있다는 불안 속에 살기 시작했다.


우리는 먼지로 죽을 수 있나?

  중세 말기가 되면 죽음은 ‘한 존재의 소멸’임과 동시에, ‘가진 것’과의 이별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죽음은 다른 맥락으로 이야기가 될 텐데, 아리에스가 어떻게 근대, 현대까지 이야기를 끌고 올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 책의 3분의 2가 남은 지점에서 지금 우리의 죽음과 연결 짓는 질문을 가져오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먼지로 죽을 수 있나? 중세 초기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감각했듯이 아담의 수많은 후손으로, 큰 바다의 물방울로 죽을 수 있나? 그러기에는 ‘나’의 인연은 너무 질기고 ‘나’의 욕심은 너무 큰 것 같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려면 죽는 게 정말 별일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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