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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조] 시즌7 <성의 역사3> 발제 (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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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한결 작성일20-03-18 22:14 조회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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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와 극단 사이의 중심 잡기

 

푸코는 성의 역사 2권에서 그리스 로마 시대 때 그들이 가진 성윤리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어 3권에서는 그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기원후 1~2세기 로마 시대에 등장한,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성윤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당시 로마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아의 테크닉'을 언급한다. 그들은 '자아의 테크닉',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과의 관계를 강화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의 성윤리를 다룰 때, 왜 그 시대의 자아의 테크닉에 관한 연구가 필요했을까? 그 점에 대해 푸코는 자아의 테크닉과 관련시키지 않고는 그 시대의 성윤리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마인들은 성의 문제 및 성적 쾌락을 통해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자아의 테크닉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이것의 핵심은 '자기배려'를 통한 '자제'였다. 여기서 '자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행사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행하는 우월함, 둘째, 가정 내에서 아내 및 집안 사람들에게 행하는 우월함, 셋째, 투쟁적인 사회에서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행하는 우월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때 자기에 대한 우월은 다른 두 지배를 이성적이고 절도있게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토대였다.(119p) 그러나 이런 자제의 윤리학은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같이 변화하게 된다. 변화의 첫째 원인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는 원칙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고(2'자기 연마'에서 다룸), 둘째 원인은 결혼관습의 변모와 정치적 틀의 재편성으로 인하여 개인이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형성시키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3'자기와 타인들'에서 다룸)

때문에 자신이 하는 모든 활동의 근본목적을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찾게 되는 '자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가령, 그리스 시대에서는 정치를 잘하는 것을 목적으로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필요로 했다면, 로마 시대에는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함에 있어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이 옮겨진 새로운 윤리학이 구축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제의 윤리학과 쾌락의 활용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다. 자제력의 의미가 과거 달라짐으로써, 성적 활동을 무한정 추구하거나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억제하고 제한하면서 적절히 활용하는 쾌락의 활용도 그 무게 중심이 자신과의 관계 맺기쪽으로 더 옮겨졌다. 로마인들의 성 윤리는,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문제의식 -에너지 소모로 인해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 성욕과 성적 쾌락이 갖는 강렬함에 절제를 잃을 것, 그것이 유발하는 각종 신체적, 정신적 문제- 을 가지고 가면서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보다 더 엄격해질 것을 요구했다.

때문에 로마인들이 생각한 성윤리에 입각한 성행위는 마치 매우 까다로운 수행처럼 느껴진다. 가령, 아이를 낳고자 한다면 성행위 전에 영혼은 고요해야 하고, 어떤 감정에서건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 하며, 육체는 어떤 점에서도 손상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또 성행위 직전에는 일정한 금욕과 엄격한 식이요법도 해야한다. 육체의 전반적인 정화를 통해 성 기능에 필수적인 평온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고요하고, 어떤 감정에서도 벗어나 있으면 열반이 아닐까 싶은데, 로마인들은 성행위라는 가장 감정적이고 극적인 순간에 이런 심신 상태가 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심지어 마치 쾌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아프로디지아(성행위와 성적 쾌락을 포괄하는 말)를 행하라고 한다. “정숙한 사람은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실제로 어떤 향락도 없다는 듯이- 성적 쾌락을 행사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쾌락 자체가 목적이라고 외쳐대는 현대를 사는 나로서는 당시 사람들의 성윤리가 신기하기만 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적 금욕주의와는 또 다르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을, 심지어 성행위의 순간마저도 그 감각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로서 임하려고 했던 로마인의 태도에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오늘날 섹스를 하기 앞서 이렇게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정성을 쏟으며 깊이 사유하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몇 이나 될까?’라고 스스로 묻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에 대한 이와 같은 극도의 조심스러움을 접할 때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성과 성행위는 최대한 자제해야만 하는, ‘부정으로써 정의될 수밖에 없는 무엇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라는 아쉬움과 의문이 든다. 성이 조심해야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되어 결국 이후에 기독교 금욕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절제와 극단 사이. 그 균형점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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