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청백전

[뭄조] 시즌7 <성의 역사3> 발제 (61/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석영 작성일20-03-18 21:40 조회20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자기배려와 다른 주체들

 

정념이 아닌 관계성으로 표현되는 주체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는 기원전 2세기의 해몽에 관한 문헌, 아르테미도로스의 <해몽의 열쇠>라는 책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성의 역사라는 주제 탓에 누구나 기대했겠지만 이 이야기는 곧 성적인 꿈에 대한 해석 이야기로 나아간다. 꿈에서 누구와, 어떤 형태의 성관계를 맺었는지에 따라 그 꿈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도 종종 해몽을 한다. 헌데 그들의 해몽과 우리의 해몽은, 특히 꿈을 꾸는 주체를 그려내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예컨대 딸과 근친상간을 하는 꿈에 대해서, 혹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하는 꿈에 대해서(이 책은 남성적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남성들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꿈의 주체가 주로 남성으로 되어있다.), 지금의 우리라면 질색을 할 만 한데 <해몽의 기술>에서는 어떤 도덕적 평가도 하지 않고, 별다른 감정도 섞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언젠가 결혼할 것이고, 그리하여 다른 남자에게로 자신의 정액을 가져갈 딸의 몸속에 그러한 낭비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예고한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3-자기 배려, 나남, 2018, p.38)’ 하는 식이다. 그들은 단지 꿈들이 어떤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지만을 주목한다.

그것은 이 책에서 풀이하는 꿈들이 우리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꿈이 아니라(그런 꿈들도 존재하지만) 간접적으로-실제와는 다른 이미지로- 어떤 사건을 예측하여 드러내는 꿈들이며, 이런 꿈을 해석할 때 그들은 꿈을 꾸는 사람의 정념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특징, 예컨대 연령,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여부, 정치적 책임 유무 등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즉 꿈의 내용은 꿈을 꾼 사람의 욕망 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위치나 상황 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배와 복종뿐인 관계?!

꿈을 꾸는 주체든 깨어있는 주체든, 우리는 를 정념 차원에서 해석하는 데에 익숙하다. 예컨대 는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겪어온 것들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괄호치고, ‘관계성’, ‘위치’, ‘상황만을 통해 나-주체를 표현하는 것이 어딘가 어색하고 꺼려진다.

이 거부감을 나의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간단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내 거북스런 감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르테미도로스가 꿈에서의 모든 성행위를 우세와 열세의 게임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는 꿈에서의 성관계를 삽입을 중심으로 이해하며 한쪽 상대방에게는 행사해야 할 권리이며 다른 한쪽에게는 부과된 의무(같은 책, p.47)’로 보고 있다. 그 꿈에 대한 해석도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일어날, 꿈속에서 언급된일이란 바로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지배를 받거나, 정복하거나 정복을 당하거나, “상위이거나 하위이거나, 이용하거나 소비하거나, 이익을 끌어내거나 아니면 손해를 감수하거나, 유리한 처지에 있거나 피해를 입거나 하는 것과 같은, 행위 주체로서의 꿈을 꾸는 사람의 위치이다. 성적인 꿈은, 삽입과 수동성, 쾌락과 지출이라는 대단찮은 극작법 속에서 운명이 마련해 준 바대로의 주체의 존재양상을 말해 준다.

-같은 책, p.51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익 혹은 손해,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를 지배 혹은 복종으로 해석하는 것. 세상에 지배 아님 복종밖에 없다면 왠지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복종하지 않기 위해’, ‘지배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노력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을 것 같다.

모든 관계들이 결국 내가 다른 사람 머리 위로 올라가기 위한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관계 방식을 상상하기 위해, 차라리 정념 속에서 덜 명료하고 모호한 상태로 관계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하지만 가능하지 않은 바람으로 삶의 고양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런 나의 거부감은 어쩌면 이 책이 남성들을 위해쓰인 책이라는 데에서, ‘남성적 주체가 되고 싶지 않다-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반동적인(reactive)한 마음에서 올라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 삶이 안 좋은 건 피하고, 좋은 건 행한다는 긍정적 의미의 이기주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올라오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끝까지 모호하게 둘 수는 없다. 정말로 어떤 다른 관계방식이 가능한지 묻거나, 아니면 지배와 복종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정념에서 벗어난 관계의 확장

그도 그럴 것이 2장에 들어서서 정념에서 벗어나 자신이 해야 할 것-이성으로 영혼을 다스리는 것-을 하는 것이 어떻게 사회적 관계로 확장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지배-복종의 관계와는 많이 다르다.

 

자기에 대한 보살핌-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배려하도록 신경 쓰는 것-은 마치 사회적 관계들의 강화처럼 보인다. (...)

세네카가 루실리우스와 나눈 편지는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관계를 한층 더 돈독하게 해 주었으며, 이러한 정신적 유도장치를 점차 각자에게 이로운 공동의 체험으로 만들어갔다.

-같은 책, p.72

 

자신을 돌보는 일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 즐거움과 연결되면서 관계가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이미지와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 사이의 이 엄청난 간극은 어떤 오해에서 생기는 것일까?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