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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인절미] 시즌 6 <우파니샤드>2 (5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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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초록나무 작성일20-02-08 19:18 조회280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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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5(경전읽기 7주차)

 

: <우파니샤드>

참여자(5): 현정희이윤하, 최세실리아공태경이용제

결석자(1)문보경


  이윤하샘의 질문에 대해 발제 당시에 충분히 만족스럽게 답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후기 작성의 자리를 빌어서 답해드리겠습니다. 윤하샘의 질문은 제 발제문 속 고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왜 제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문제’를 오랜 시간 고민해왔는지 물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전공인 철학을 공부하며 여러 철학자들의 주장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철학자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 엄청나게 모순되는 주장을.

중국 춘추시대의 공자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첫 구절로 시작되는 논어 첫 구절에서부터 보이듯 배움(學)을 가장 강조하는데 노자는 배움을 끊어야 근심이 사라짐(절학무우絶學無憂)을 역설합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묵자는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갈아 없어진다 해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이로울 수 있다면 하겠다.”고 맹세하지만 양주(楊朱)는 “내 몸의 털 한 가닥을 뽑으면 온 세상이 잘된다고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같은 전국시대의 허행은 지체 높은 왕도 몸소 농사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맹자는 머리를 쓰는 자가 따로 있고 몸을 쓰는 자가 따로 있음을 지적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 라파엘로의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의 묘사를 생각해봅시다. 서양 고대의 수많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더러는 서있고 더러는 앉아도 있는 가운데 가장 중앙에 나란히 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킵니다. 플라톤은 이상(理想)적인 철학 경향을, 그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경향을 가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근대 유럽의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와 같은 대륙 합리론자들은 로크, 버클리, 흄과 같은 영국 경험론자들과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합리론자들은 그들 사이에서조차 서로 다른 이론(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단의 잠’)을 펼칩니다.

우리가 세미나에서 이번 시즌에 함께 읽은 불경들과 우파니샤드는 비록 저마다 성립된 시기를 달리하지만 모두 고대 인도에서 기원한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차이가 보입니다. 우파니샤드는 우리에겐 영원불변 참자아인 아트만이 존재하며 만물에 영원불변의 브라만이 내재함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연기설(緣起說)과 그것이 보다 발전한 공(空)사상이 담겨있는 불경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주장하며 참자아(自我) 아트만을 부정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주장하며 브라만을 부정하여 브라만교의 사상을 근본부터 부정합니다.

그런데, 또한 이러한 불교의 근본교리는 서양 전통 주류 철학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플라톤은 영원불변의 이데아의 존재를 역설했고 그를 계승한 로마시대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는 영원불변의 일자(一者)의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다시 그리스도교의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어져 영원불변의 신(神)으로 발전합니다. 근현대에 이르러 프랑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와 같은 혁명적인 변화가 생기지만 서양 전통 주류 철학이 생각하는 진리의 존재란 모두 이데아나 일자, 신처럼 영원불변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영원불변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리는 이러한 서양철학의 경향과 완전히 모순됩니다.

이처럼 철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확신보다는 수수께끼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어떤 철학자의 말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하는 말 다르고 저 사람 하는 말 다릅니다. 심지어는 같은 철학자도 초년기에 한 말 다르고 만년기에 한 말 다릅니다.(대표적으로 남송南宋의 주자朱子. 그래서 조선 후기의 송시열宋時烈의 작업을 이어받은 한원진韓元震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를 완성해 주자의 같고 다른 말을 정리합니다.)

그럼 대체 누구의 말이, 누구의 철학이 옳은 것일까요?

어떤 철학자가 어떤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펼치든 모든 철학의 결론은 가치론과 윤리학입니다. 그리하여 그 결론은 저의 오랜 고민인 ‘사람은 무엇으로(또는 어떤 가치로) 사느냐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정신적 가치로 산다는 철학자, 물질적 가치로 산다는 철학자. 또는 이상적 가치로 산다는 사상가, 현실적 가치로 산다는 사상가. 내적인 가치로 산다는 사람, 외적인 가치로 산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마다 사람이 서로 다른 가치로 산다는데 무엇이 옳은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극적 질문. 그 답은 오랜 시간에 걸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문제’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해온 이유입니다. 부디 윤하샘께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답이 되길 바랍니다.




2020.2.5./ 청백전 수요반 S6/ 7주차

/우파니샤드(138쪽~237쪽)/ 발제자: 공태경

 

 

발제문 제목: 말씀이냐 떡이냐?

 

 

1, 두 개의 가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에겐 오랜 고민이 있다. 바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문제’이다.

흔히 현대에 와서 이분법은 서양에서 온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 인도, 중국 같은 동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자주 쓰였다. 얼마 전에 청백전에서 도반(道伴)들과 함께 읽은^^ 대승기신론의 저자인 인도 승려 마명(馬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는 아슈바고샤)이 진여문과 생멸문을 구분 짓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물론, 둘의 구분을 다시 ‘일심一心’으로 통합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퇴계(退溪)의 이분법도 대표적이다. 그는 기대승(奇大升)과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엄밀히 구분할 것을 역설했다. 주자(朱子) 또한 그렇다. 그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을 반드시 분리시켜 생각해야함을 강조했다.) 나는 이분법이 상당히 문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효과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분법으로 나의 문제를 고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물질, 근대 유럽의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 불교의 마음과 몸, 기독교에서의 영육(靈肉), 즉 영혼과 육신, 성리학적 형이상학에서의 리(理)와 기(氣), 또한 성리학적 가치론에서의 천리(天理)와 인욕(人慾), (얼마 전에 청백전에서 도반들과 함께 읽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논서(論書)인 마명(馬鳴)이 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진여문과 생멸문, 마르크스의 상부구조(上部構造)와 하부구조(下部構造).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의 예시들을 관찰하다보면 나의 문제의식이 보일 것이다. 전체를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사람은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들로써 사는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들로써 사는가? 또한 내(內)적인 가치로써 사는가? 외(外)적인 가치로써 사는가? 도반 여러분^^ 우리 모두 계속 고민하고, 고찰하고, 사유하고, 사려하고, 생각해봅시다.ㅋㅋ

 

북송(北宋)대의 성리학자 정이(程頤, 호號는 이천伊川)는 “굶어 죽는 것은 사소한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라고 했다. (진래, ‘송명 성리학’, 28쪽)

 

명나라(明)의 양명학자 왕간(王艮, 호는 심재心齋)은 ‘가난 때문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다면 결국 근본을 잃은 것이므로 바른 학문이 아니’라는 취지의 가르침을 펼쳤다. (김교빈, ‘동양 철학 에세이2’, 224쪽)

 

“정신이냐 물질이냐? 천리(天理)냐 인욕(人慾)이냐?”는 철학의 중요한 문제이다. 성리학자 정이의 경우 철저하게 정신과 ‘천리’를 따를 것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유교의 중요덕목인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매우 강조한 것이다. 내 몸(身)과 사람의 욕심(人慾)을 죽여서라도 반드시 도덕(仁)와 하늘의 이치(天理)의 완성을 이루자는 것. 반면 양명학자 왕간은 이러한 성리학에 반대하여 밥 먹는 일과 생계, 물질 특히, ‘인욕’을 무시하는 학문은 근본을 잃은 바르지 못한 학문임을 역설했다. 두 사람의 주장이 분분하다.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

 

달라이 라마가 말하길 "인생의 막판에 죽음을 맞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자기는 혼자 죽어가야 하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아서 앞으로도 살아갈 테니까,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됩니다.

그 마지막 작별의 순간, 애정으로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위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애정으로 지켜봐 준다면 죽는 사람도 편안히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인생이 시작된 순간부터 인생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달라이 라마의 일본에서의 강연록 ‘자비의 힘’, 25쪽)

 

조선말(朝鮮末)의 큰 선비 최한기(崔漢綺)가 ‘재교(財敎,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란 뜻)’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는데 최한기의 제자 김수실이 붙인 ‘후서(後序)’만은 남아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잘 생각해보면 재리(財利)란 삶을 영위하고(, 태어나서부터)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까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왕이나 귀족은 물론, 여염의 서민들도 다 그 사이에서 움직이니 예의와 재용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재용을 힘쓰면서 인의를 돌아보지 않는 것도 천박한 일이지만, 인의를 말하면서 재용을 의식하지 않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한형조, ‘왜 조선유학인가’, 318쪽)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사랑은 인생이 시작된 순간부터 인생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어떻게 보살핌과 배려를 받으며, 슬프고 힘들 때 어떻게 위로와 지지를 받으며, 살아가면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으며, 어떻게 사랑하는 이들의 곁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겠는가?

또한 김수실의 말처럼 재리, 즉 금전,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해 물질적인 것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또한 죽고 나서까지. 장례를 치러 죽은 자를 떠나보내야 하니까.)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금전과 음식 같은 물질이 없으면 우리는 무엇을 입으며(衣), 무엇을 먹으며(食), 어디서 살며(住), 어떻게 장례를 치르겠는가?

“사랑이냐? 재리냐? 그것이 문제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 4절)

 

말씀이란 앞의 인용문을 읽으면 알 수 있듯 초월적이고 정신적이며 내적인 가치이다. 떡이란 사실 서양 사람들의 주식인 ‘빵’이다. 옛날에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될 때 마땅한 번역어가 없어 할 수 없이 우리정서에 가까운 떡으로 번역된 것이다. 따라서 떡(=빵)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며 외적인 가치이다.

“사람은 말씀으로 사는가? 떡으로 사는가?”

 

나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자주 활용하면서도 둘을 분리하기보다는 양면을 두루 살피길 좋아한다. 그래서 여러 고민 끝에 얻은 나의 대답은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와 물질적인 가치, 그리고 내적인 가치와 외적인 가치 모두로 산다는 것이다. 한 가지라도 없어선 살 수 없다. 내 생각엔 사람은 말씀으로도 살고 떡으로도 산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떡으로만 살 수 없어서 말씀이 없어도 못 살고, 한편으론 떡 없이도 못 산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五餠二魚,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의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어쩌면 이 기적은 사람은 말씀으로도 살지만, 떡 또한 삶에 있어서 필수요소임을 가르쳐주시려고 펼치신 것이 아닐까? 말씀과 떡, 둘 다 절대적으로 우리 삶에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앞에서 인용했던 달라이 라마와 김수실, 두 사람의 말을 좀 더 생각해보자. 역시 사랑과 재리(財利), 곧 정신적인 가치와 물질적인 가치, 그리고 내적인 가치와 외적인 가치 모두가 함께 해야 사람은 비로소 잘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앞에서 말했듯 사랑과 재리, 두 가지 모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라도 우리와 떨어져선 사람이 살 수가 없다.

우파니샤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적인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혼의 어둠 속에 빠진다.

내면세계만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외적인 세상만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길을 간다.

내면세계만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의 길을 간다.

그러나 행위와 지혜,

이 두 길을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위를 통해 죽음의 바다를 건너고

지혜를 통해 불멸에 이른다.

이것은 옛 현자들의 가르침이다.”

(이샤 우파니샤드, 218,219쪽)

 

우파니샤드의 이 구절이 나의 오랜 고민을 해결하고 심금을 울렸다. 외적인 것만 추구하면 어둠 속에 빠진다. 그렇다고 내적인 것만 추구해도 더 깊은 어둠 속에 빠진다. 두 길은 서로 다르다. 각각 행위와 지혜라고 불린다. 그러나 두 길, 행위와 지혜를 결합하면 죽음의 바다도 건너고 불멸에 이른다. 우파니샤드가 나의 고민에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었다.

 

 

2, 두 개의 가치, 인도와 조선 역사의 경우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인도철학 전통 전반이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가치와 내적인 가치를 심각할 정도로 편향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1세기 이슬람 세력이 유입되기 이전까지, 인도에선 정통 역사서가 집필되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역사기록 또한 완전한 역사서를 완성시키기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도반들께서도 우파니샤드를 함께 읽으면서 우파니샤드의 편(編)들마다 저자의 생애는커녕 때로는 저자의 이름조차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이처럼 인도인들의 이상주의(理想主義)적 성향은 세속적인 가치, 곧 역사나 사회에 대한 지향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인도철학에는 사회철학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의 제자백가를 읽어보면 처세서인지 정치서인지 모를 정도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 고찰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이 인도 불교를 받아들이며 인도의 이상주의적 성향도 받아들이지만(대표적으로 성리학이 이러한 인도의 이상주의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학문이다) 중국의 기본 바탕은 역사와 사회를 지향하는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중국은 이십사사(二十四史)라고 불리는, 고대사부터 근세사까지 오랜 중국역사를 한 치의 끊어짐 없이 다루는 정통 역사서(正史書)가 전해지는 것이다.

다시 우리가 우파니샤드를 함께 읽으며 느낀 것들을 생각해보자. 대체로 모든 편의 우파니샤드들이 내 안의 참자아(아트만)와 만물에 내재하는 브라만을 깨달을 것을 역설한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라는 매번 우파니샤드에서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 우파니샤드의 스승들은 오직 참자아(아트만)와 브라만을 알아야하며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보면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사제인 브라만이 왜 카스트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여 왕이나 귀족보다도 높은지(나의 오랜 의문이었다. 어떻게 왕보다도 높지?) 알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구조에서 사(士, =선비)계급이 가장 높은 이유와 같다. 또한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저술 ‘국가’에서 철학자가 최고 통치자계급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인도철학의 경향과 조선 성리학의 경향이 서로 비슷하다. 물론 성리학이 동북아시아에서 생겨난 철학이니만큼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인도철학의 경향과 비슷하다. 둘 다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의로움(義)과 이로움(利)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인도나 성리학이나 모두 의로움을 택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철학이 정신적인 가치나 의로움을 더 강조하겠지만, 문제는 역사적으로 두 나라의 철학사(哲學史)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한쪽만을 추구하는 폐단이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경우는 우파니샤드를 읽어봤으니 알 것이다. 오직 참자아(아트만)과 브라만을 추구한다. 우파니샤드의 한참 뒤에 나온 힌두교 6파 철학 중 상키야-요가학파에서도 오직 정신적인 실체인 ‘푸루샤’를 추구하고 물질적 현상을 배격할 것을 논한다. 또한 인도의 철학이란 대부분이 가정과 사회와 같은 속세를 떠나 수행하는 출가자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초월적이고 정신적인 해탈과 구제에 대해선 수많은 대답이 마련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적이고 속세적인 사회와 정치에 대해선 충분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조선 성리학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의로움과 이로움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유교에서 의로움과 이로움을 논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즉 얼음과 숯이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원시유학(原始儒學,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의 통일 이전 춘추시대의 공자와 전국시대의 맹자, 순자의 유학사상)의 맹자부터가 이로움을 버리고 오직 의로움만을 택할 것을 몹시 강조한다. 맹자 첫 구절에서부터 알 수 있다. “맹자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먼 길을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장차 어떤 이로움을 주시려는 겁니까?”라고 말하며, 왕이 베푼 온갖 귀한 대접을 받고 초청된 맹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양나라 혜왕. 맹자는 정중하게 초청받아 오는 길에 왕에게 받은 귀한 대접이고 뭐고, 왕과 처음만나서 얘기하는 것인데 첫인상이고 뭐고 앞뒤 따지지 않고 왕에게 강하게 태클을 건다. “왕께서는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맹자같이 자기주장 강한 사상가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러한 전국시대 맹자의 전통이 송나라 성리학에게까지 이어진다. 이는 조선 성리학도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이로움을 배격하고 검소하다. 우리나라의 궁궐이 그렇게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담백한 아름다움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의로움만 추구하면서 이로움을 너무 무시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은 이로움을 추구하는 상공업의 발전을 충분히 이루지 못했다. 이는 조선후기 세금제도인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의 폐단과 맞물려 나라를 몹시 약하게 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결국 근대화에 실패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인도 또한 근대에 산업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너무 자세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무 과하고 거칠게 말하는 것이지만, 조선과 인도는 너무 정신적인 가치만 추구하다보니 물질적인 부분에 결핍이 있었고 이러한 불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사회는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가 균형을 이루어야 발전하고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조선과 인도의 이러한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교훈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깐!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아시아적 가치와 현대 동아시아 국가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포인트를 생각해봐야합니다. ‘현대 인도의 경제 발전과 인도의 잠재력의 바탕’이라는 포인트도.)

 

(◎여기서 질문?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정신적인 가치와 물질적인 가치 모두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언젠가는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딜레마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씀이냐 떡이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배고픈 소크라테스냐 배부른 돼지냐? 정이(程頤)의 말처럼 굶어죽느냐 절개를 포기하느냐?)

 

(◎ 여기서 질문?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만물에 브라만이 들어있다고 그렇게 강조하면서, 인도에 천민 계급인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이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그들에게도 브라만이 내재할 테니 그들 역시 신성한 존재일 텐데요. 이전에 고미숙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보니 그들에게는 경전의 가르침을 귀로 들을 자격조차 없다고 들었습니다. 한 마디라도 듣는 순간 귀를 멀게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천민에겐 가르침을 배워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행복에 이를 자격조차 없다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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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백수님의 댓글

백수 작성일

긴긴 발제문~ 흥미로웠어요!
각각의 특정한 상황에서는 모두 필요한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그 상황들을 연구해보면 어떨까요?

초록나무님의 댓글

초록나무 댓글의 댓글 작성일

흥미로우셨다니 기뻐요^^ 네, 좋은 생각이네요 연구해보겠습니다~

이달팽님의 댓글

이달팽 작성일

이렇게 긴 답변!ㅎㅎ 감사합니다
저도 샘의 질문에 같이 질문하게 될 정도로!
샘은 무엇으로 사시는지.. 이제 그게 궁금해지네요.. !

초록나무님의 댓글

초록나무 댓글의 댓글 작성일

ㅎㅎ세미나하면서 계속 고민하고 얘기나눠봅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