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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5 <나의 투쟁>3 발제 (4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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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쓰담쓰담 작성일19-11-10 17:05 조회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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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파시즘, 고립에서 자라나는 힘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 정당을 창립하고 정치 활동을 해 나가고 있을 무렵, 독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단일국가가 아니었다. 베를린에서 떨어진 도시에서는 분명 중앙집권 세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들은 중앙집권 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지방의 주권을 주장했다. 그들이 말하는 주권은 분명 독일이라는 나라에 귀속된 것도, 아리아 인이라는 인종에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독일인이라는 자각, 인종적으로 우월한 아리아 인이라는 의식은 당시에도 분명 날 때부터 당연했던 게 아니었다. 그건 히틀러에 이르러서야 부각되었던, ‘만들어진의식이었던 것이다.

파시즘이 횡횡하던 히틀러의 시기와는 너무도 다른 이 시공간에서 보면, 그들이 집착하는 국가에 대한 맹목이나 우월한 인종으로서의 자부심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집착하는 대상은 다를지언정,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것이라면 얘기는 한참 달라진다. 지금 내가 보기에 별 것도 아닌 것에 과거의 독일인들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듯, 나 또한 어떤 경로를 따라 그 당시의 독일인이 보기에 별 것도 아닌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을 맹목적이게 만드는 그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고립에서 자라나는 힘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진실로 위대한 것은 모두 공동전선에 의해 쟁취된 것이 아니라 항상 단 한 사람의 승리자의 성과였다는 것이다. 공동전선의 결과라는 것은 벌써 처음부터 장래의 붕괴, 또는 그 이상으로 이미 도달한 것을 잃을 싹을 가지고 있다. 진실로 세계를 변혁시키는 그런 위대한 정신적 혁명은 일반적으로 다만 단일조직의 거대한 투쟁으로만 생각할 수 있고 실현되는 것으로서, 결코 공동전선의 계책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A. 히틀러, 나의 투쟁, 흥신문화사, p.338~339)

 

히틀러는 정당을 설립하면서 자신들이 이끌어갈 나라에 대해 구상한다. 그야말로 정치 형식부터 제도까지. 그 기초에서 그가 독일은 연방국가여야 하는가, ‘단일국가여야 하는가, 라고 물을 때 정답은 단연 후자다. 그는 일관되게 오직 한 인종에 의한, 한 나라의 창립을 주장한다. 순수하고 강력한 단 한 명의 승리자. 놀랍게도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그 단 한 명의 승리자를 생각하며 모종의 짜릿함을 느꼈다. 한 명의 압도적인 승리자, 이건 나에게도 너무 익숙한 이미지가 아니던가?

우사인 볼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결승선을 통과할 때, 김연아 선수가 실수 하나 없이 신기록을 달성할 때, 어떤 수재들도 범접할 수 없는 천재가 활약하는 영화를 볼 때 등이 딱 이런 이미지일 것이다. 그냥 1등도 아닌, 2위 이하의 사람들과 압도적인 차이를 벌리는 승리자를 생각할 때, 묘하게도 내 기분은 고양된다. 설령 내가 그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그 이미지 자체가 어떤 쾌감을 주는 것이다.

이 승리자는 자신은 마치 다른 수많은 경쟁자들과는 태초부터 달랐다고 느낀다. 이 강력함은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드러나는 게 아니다. 이것은 천부적인 것이다. 어떤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순수한 힘. 주위 사람들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냈을 때에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힘이다. 승리자에게 타자는 이 순수함을 더럽히는 존재다. 그가 정말로 약해지거나 더럽혀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힘 자체가 고립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고로 강할수록 고독한 게 아니라, 고독할수록 강하다!

그렇게 주변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방식으로 우리는 강해진다. 파시즘이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건 그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만큼(더 나아가 즐거움을 느끼는 만큼), 파시스트들은 스스로가 강하다고 느낀다.

이런 파시스트들의 심리는 내가 승리자들의 이미지에서 느끼는 고양감과 얼마나 다를까? 혹은 내가 일상 속에서 학벌로 누군가를 누를 때,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할 때 느끼는 쾌감이 파시스트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결론은 당연히 다르지 않다. 사실 그때마다 나는 상대들을 학살하고 있다. 설령 그들을 학살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미시-파시즘을 묻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대중들이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그럼에도 왜 그걸 깨닫지 못했는지가 계속 궁금했다. 어떤 한 가지에 몰입하다보면 사람의 생명 같은 건 무시하게 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대중은 결코 하나의 가치만을 좇다가 다른 가치를 무시하게 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자신의 즐거움만을 찾다가 타인을 무시하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하기를 바란다. 그 무관심에서 하나의 가치가, 자신의 즐거움이 나오기 때문이다.

잔인함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나의 즐거움과 쾌감이 곧 잔인함이 될 수 있다. 이 병적인 쾌감을 멈추기 위해서는 순간마다 자신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혹 지금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 고립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 이 끊임없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만이 미시-파시즘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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