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청백전

[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5 <나의 투쟁>1 발제 (44/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쓰담쓰담 작성일19-10-30 21:42 조회20회 댓글0건

본문

파시즘, 자신에게 공포를 심다

 

파시즘, 그 평범함에 대하여

청백전에서 나의 투쟁을 읽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은 ? 그래도 되나?’였다. 다른 출판사의 책 페이지 수가 막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자인 히틀러의 책을 읽게 되면 혹 그의 사상에 동의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난 번 책에서 파시즘을 작동시키는 원리는 특별한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파시즘과는 상관없다는 이런 생각은, 책을 읽으면서의 놀라움으로 또 찾아왔다. 책에 나타난 독재자의 모습은 생각보다평범했다. 그는 결코 날 때부터 유대인 극혐!’하면서 태어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더러웠고 외모도 초라했다. 육체적인 불결 이상으로, 이 선택된 민족의 도덕적 오점을 발견했을 때는 혐오의 감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A. 히틀러, 나의 투쟁, 홍신문화사, p.103-104)

 

유대인들을 혐오하기 위해 엄청난 이유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에 대한 신체적 불결함, 도덕적 불결함에서 싹을 틔웠다. 유대인들이 입는 옷에서 나는 냄새, 예술계를 장악해 독일인을 악평하는 비열한 계교, 매음 제도와 소녀 매매에 대한 유대인의 관계. 유대인의 이런 모습들은 나 역시 얼핏 듣더라도 얼굴을 찌푸릴 만한 것들이었다.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계기가 이렇게 평범한 것이었다니?

그렇다면 이런 사소한(?) 불쾌들이 쌓이고 싸이면 혐오가 되고, 결국 극단까지 이르면 학살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걸까? 대체 이 작은 불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공포를 피해 공포를 심다

대중 선동에 능숙했던 히틀러답게 이 책에서도 선전에 대한 그의 생각이 드러난 부분이 있었다. 대중은 멍청하므로() 선전은 가급적 간결하고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점도 인상 깊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가 선전을 통해 대중들에게 공포를 심으려 했다는 점이었다.

 

오스트리아나 독일의 만화 선전이 그랬던 것처럼 상대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실제로 적과 부딪친 독일 병사는 지금까지 자기들을 계몽해 온 것으로부터 속았다고 느낌으로써, 그 투쟁력이나 확고부동한 심적 자세를 강화하는 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영국인이나 미국인의 전시 선전은 심리적으로 정당했다. 그들은 자국민들에게 독일인을 야만인이라고 선전함으로써, 개개의 사병에 사전에 전쟁의 공포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환멸을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했다. 지금 자기를 겨누고 있는 무기가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주어진 계몽의 정당함을 재확인했고, 극악한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높이고, 아울러 정부의 주장이 옳다는 신념을 더욱 확고히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무기가 무서운 효력이 있다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적의 무기의 가공할 효력이 전부터 알고 있는 야만스런 적의 잔혹함을 증거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A. 히틀러, 나의 투쟁, 홍신문화사, p.103-104)

 

그는 적들에 대한 공포심의 극대화가 엄청난 투쟁력을, 확고부동한 심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의 공포는 어떤 환멸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보면 대중에게 불어 넣어주는 공포가 사실적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그 공포가 확신과 신념을 품어주기 때문에 히틀러는 공포심에 주목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확신은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자긍심을 가지게 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내 목숨이 위협받는다는 상상, 한없이 자신을 작아지게 만듦으로써 극악한 적에 대한 확신을 갖는 반동적인 힘이었던 것이다.

독일인들이 기존에 쓰던 선전 방식은 상대를 우스꽝스럽게 만듦으로써 자신을 드높이는 방식이었다. 히틀러는 이런 방식의 선전을 비판했는데, 여기에서는 환멸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의미, 스스로를 드높이는 가치는 언젠가 무너진다. 그는 이 기대의 저버림을, 환멸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희생이나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다. 몇 달이나 계속된 굶주림이나 목마름도 허사였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도 의무를 다했던 그 모든 순간도 허사였다. 그때 쓰러진 2백만의 죽음도 아무 보람이 없었다. 조국을 믿고 두 번 다시 조국에 돌아가지 않을 각오로 출정했던 수백만 병사들이 패배를 위해서 죽었단 말인가? (같은 책, p.121)

 

이 무의미와 환멸을 감당하지 못할 때 사람은 반대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기 위해 공포심을 만들어낸다.’ 일상에서도 목숨이 위협받고, 외부의 타자들은 모두 자신에게 공격적이다. 자신을 마땅히 위협받고 공격받을 만한 존재로 설정하는 것이다. ? 애초부터 자신에게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다면 적어도 환멸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 의미가 사라질 때의 허무함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니까. 대중들은 자신의 목숨의 안전을 바라는 것보다도 목숨의 의미가 사라지는 환멸의 순간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도 마찬가지 아닐까? 여성이라면 늘 누군가에게 성폭행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공포. 그에 따라오는 남성에 대한 혐오감. 끔찍한 성폭행 사건, 넘치는 성추행 사건들을 보면 우리는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의미가 박탈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끊임없는 성폭행 위협보다 자신이 성적인 대상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더 두려워했다면? 그렇기 때문에 공포를 더욱 실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라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다. 의미가 사라지는 공포는 정말 평생의 위협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인지, 라고.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