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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조] 시즌5 <사랑의 기술> 발제 (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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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재현 작성일19-10-21 23:58 조회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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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우리는 항상 사랑 때문에 고민한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에 대해 고민할수록, 사랑은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같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같지 않던 그 사람의 모습에, 사랑에 우리는 좌절한다. 때로는 버겁기까지 하다. 왜 내 사랑은 나아지지 않는거지? 노래가사처럼 사랑은 노력해서 되는게 아닌건가? 강렬한 감정에 몸을 맡기고, 그 감정이 식으면 사랑도 끝난걸까?


노력이 아니라 노오력?

이런 질문에 에리히 프롬은 답한다. '사랑도 노력하는거야!'라고 말이다. 다만 '노오력'아닌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노오력이라고? 그건 꼰대들이 하기싫은 일 억지로 시킬 때 명분찾는 그런거 아니야? 맞다. 자기계발, 야근, 열정페이 등등 21세기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항상 노오력하고, 그래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 때 다시 등장한 에리히 프롬이 일침을 날린다. 억지로 말고 스스로 원해서 하는 노력도, 정말 노력이 맞다고 생각해?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살펴봐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생명은 목적이 아니라, 효율적인 교환을 위한 상품으로 전락해버렸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서 생명은 어쩌면 가장 쉽게 사고 팔수 있는 상품일 것이다. '생명pay'를 부여받은 우리에게 생명을 팔아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타인의 생명을 사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의식하지는 않아도 그 끝에 절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잊기 위해서는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필요하니까, 사야한다. 먹방, 탕진잼, Flexing은 그런 우리의 눈물겨운 노오력이다. 사랑이라고 크게 다를까. 프롬은 오늘날 우리의 사랑을 이렇게 꼬집는다.


사랑에 관한 한 상황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대인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과 대응된다. 자동 기계는 사랑할 수 없다. 자동 기계는 '퍼스낼리티라는 상품'을 교환할 수 있고 공정한 거래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문예출판사, 2019, p128


사랑은 거래이자, 오락이자, 기계로서의 자신을 잊기 위한 피난처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낭만'이라는 환상을 부여했다. 그 아래서 우리는 마음껏 사랑하는 대상을 우상화하고, 나의 환상으로만 사랑을 해석하고, 자신의 문제를 잊기위해 상대의 결점에 집착하기까지 한다. 행여 갈등이 일어날 기미만 보여도 회피하려고 한다. 갈등을 통해 자신의 텅 빈 실존을 마주하는 일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결코 노오력을 벗어날 수 없다.


진짜 노력이란

프롬은 사랑이 '실존'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스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경험할 때, 진실된 사랑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자아도취에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하다. 자아도취란 자신만을 유일한 현실로 느끼는, 쉽게 말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현상이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들을 그를 위한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신마저 자아도취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욕망하고, 끝내는 자신마저 수단으로 삼는 소비자만이 남는 것이다. 자아도취의 반대편에는 객관성이 있다. 객관성은 자아도취라는 내면의 돋보기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능력을 말한다.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집중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는데, 여기서도? 혹시 내가 모르는 정신집중이 따로 있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정신을 집중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프롬이 말하는 정신집중을 살펴보자.


정신을 집중한다는 건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즐거운 것에 대한 상념들이나 미래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에 빠지면 안된다.

ㅡ같은 책, p164


프롬은 이어서 정신집중이 내가 하는 모든일에 대한 집중과,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일이나 공부하는데에만 집중하기도 빠듯한데, 모든 일에 집중해야 하다니. 들으면 들을수록 실천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다는 말은 왠지 동감이 간다. 공부를 해야 할 때는 드라마 생각으로 가득하다가, 정작 자야할 때 내일 할 공부 생각에 괴로워하는걸 보면 말이다. 정보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동시에 많은 것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요구 받아왔다. 십수년을 거쳐 그 요구를 수행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몸이 그 속도와 밀도를 견딜 수 없게 된 탓이다. 집중하려고 할수록 내 몸은 거부하려 들 것이다. 그 때 마다 의식해야 한다. 일시적 감정이나 욕망의 목소리가 나를 유혹해도 그에 빠져 나약한 자신을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나의 상태와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노력을 통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명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생명의 생산성은 사랑의 생산성으로 이어진다. 능동적인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실존하는 생명으로서 나를 내어주고 상대의 생명에 진심으로 응답할 때,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이 모든 과정은 분명 쉽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와 그 선두주자들은 우리가 철저히 기계로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노오력을 노력이라고 믿은 채 남은 생명력을 갉아 먹는 소비기계 말이다. 진실된 사랑을 주장하는 프롬조차 사랑은 예외적인 일이 되었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모든 사랑과 실천에 대한 믿음이 신앙이 될 때, 사회는 마침내 그 모순을 드러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러한 결여 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ㅡ 같은 책, p188


나의 고민도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 역시 그가 말한 합리적 신앙에 동감하며,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의 노력만으로 합리적 신앙의 가능성을 찾기에는 무언가 아쉽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만큼 자본주의 사회 또한 그 형태를 바꾸며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소외시키지 않는 사회에서, 사랑할 줄 아는 이들의 하모니를 꿈꾸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 해답을 공동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공동체에는 사랑을 실천하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은 순전히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 공동체 사람들 -들은 단순히 내가 같은 공동체 안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베풀었다.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럴 수록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아 방황하던 나였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며 미약하게나마 주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공동체야 말로 자본주의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배제되었던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 내 사랑이 외부와 순환할 수 있어야 한다. 순환하는 사랑은 멈추지 않으며,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신앙의 가능성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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