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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5 <파시즘의 대중심리>-3 발제 (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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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연자연 작성일19-10-10 22:25 조회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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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책임을 짊어지는 노동자

 

노동에 대한 고찰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성() 정치학만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부분은 노동! , 노동에 대한 주제는 날 떠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또 나를 찾아온 걸까. 사랑, 노동 그리고 지식. 이 세 가지는 인간을 떠날 수 없는 문제라고, 대중심리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라이히는 본다. 사랑()에 대한 논의는 앞서 충분히 했고, 이제는 노동과 지식이다. (사실 지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노동을 대중심리학적으로 올바르게 고찰하려면, 노동자와 그의 작업으로 생산된 생산물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해야한다. 이 관계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서 만들어내는 쾌락과 관련이 있다고 라이히는 말한다.

그런데 잠깐! 요즘 우리의 노동을 돌아보자.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불과 몇 달 전 나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내 노동의 결과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적당히 돈을 받으며, 그냥 적당히 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뭐 외부로 회의를 가거나 할 때, 부끄러운 일이 생길 때는 좀 책임감이 일기도 했다. ~주 간혹. 노동자와 노동의 결과물 사이는 매우 불편하고 계산적이고 기계적인, 전형적인 대중심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예전에 열정과 책임을 가지고 일했던, 첫 직장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보고서나 PPT 같은 작은 결과물들에도 대한 책임이 있었다. 내 작업에 대한 연결이 있었다. 제출 판넬에 처음으로 아주 쪼그마한 나의 결과물이 들어갔을 때, 그 쾌감은 아직도 기억난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노동자와 그 작업물에 대한 거리감은 있었다. 설계를 하는 일이었기에, 이 설계물이 구현되는 데까지 적어도 2년 이상은 걸렸고, 난 이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작업에 더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분이 아닌 전체에 관여하고 싶은 느낌이랄까.

우리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 내가 무엇을 하는 지 알 수 없을 때, 만족스럽지 못한 노동을 하게 된다. 노동에 대한 욕구와 즐거움을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라이히는 즐거운 노동이라는 목표가 현실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려면, 무엇이 이 목표를 방해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한다고 한다. 내 질문이 멈췄던 지점은 여기였다. 방해물을 그냥 두고, 난 떠났다.

 

노동민주주의의 현장

여기 진일보를 하였던 소련의 이야기가 있다. 소련경제의 초기 몇 년 동안에 보여 졌던 노동민주주의의 현장의 모습이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주기적으로 다른 일자리에 다양하게 배치되었다. 또한 다양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서로 교환되었다. 만약 숙달된 전문가들이 공장의 관리 위치로 오게 되면, 그들은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에, 노동과의 접촉을 잃고 행정적 관료로 변하지 않도록 다시 기계를 다루는 현장으로 돌려보내졌다. (...) 이러한 방식으로 한 작업장의 종업원은 직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또한 특별 생산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런 사실을 비롯한 많은 사실들이 노동의 쾌락과 작업의 통합을 재확립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파시즘의 대중심리, 400~401p)

 

예상했겠지만, 결국 소련의 이 작업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노동 작업과 그 쾌락의 통합을 위해 시작된 방식이었는데, 도대체 왜? 보기엔 너무도 이상적이여 보이는데,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문제는 인간의 성격구조가 함께 개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일만의 희망은 있다. 라이히는 노동자들 스스로가 경영을 공부하고 실천적인 생동감을 유지하면서 작업장을 전문적으로 지배할 때 노동하는 대중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적인 인간의 성격구조’, 이것만 파헤쳐보면 그 길이 어렴풋이 보일 것 같다.

 

즐거운 노동에서 기계적인 노동으로

우리들의 성격구조는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반세기가 넘도록 이 굴레 속에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노동하고, 전체를 보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내가 만드는 생산물에 대한 관심도 없고, 책임감도 떨어진다. 19세기 수공업자, 장인들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작업생산물과 노동자와의 관계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기계처럼 일하고 있다. 노동자 스스로가 기계화가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자연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정말 기계와 비견되는 노동을 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성과급 임금체제의 도입이다.

 

작업장에 검은 게시판과 붉은 게시판이 설치되었다. ‘게으른노동자의 이름은 검은 게시판에 게재되었으며, ‘성실하고 쓸모 있는노동자의 이름은 붉은 게시판에 게재되었다. (...)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방법이 인간의 성격구조 형성에 끔찍한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은 확실하다. 검은 게시판에 이름이 적힌 노동자는 부끄러움, 질투, 열등감, 심각한 증오의 감정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으며, 반면에 붉은 게시판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경쟁자를 제압했다는 승리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승자라고 느끼면서, 야만성을 발산하고, 공명심에 의기양양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책, 417~418p)

 

이 지점에서 인간의 성격구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소련은 생산량을 늘려야 했기에,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성과급제는 열등감과 승리감을 부추겼고, 야심 가득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외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즐거움도 잊어버리고, 책임에서도 벗어난 기계적인 노동만을 하게 된 것이다.

 

노동민주주의의 희망, “책임을 짊어지는 노동자

노동민주주의로 새로운 길을 열어보고자 했던 것이 무색하게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성과급제의 성공신화를 이룬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중들은 수동적으로 변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독재자들은 인민들의 사회적 무책임성을 기반으로 권력을 확립했다.

국가가 국민으로 형성되듯 사회적 삶은 대중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훈련한 수동성 속에서 자유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왔다. 무기력하게 책임이 없다는 냥 회피해왔다. 하지만 두려움에 맞서고, 자유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 안의 노예근성을 떨쳐 내야한다.

노동의 즐거움을 위해 내 결과물과의 간극을 줄여보고자 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선배들도 그런 회사는 없어. 작은 시공회사 같은 데를 가야 그나마 나을까? 그런데 그런 곳이 어디 있니. 돈이 안 되는데. 창업해보던가.”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그래도 길을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난 두려움에 부딪쳤다.

나는 내 삶에, 나의 노동의 현장에 책임지기 두려웠던 것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노동하는 남녀 대중들에게 있다.(447p)” 이 사실을 인정해야, 노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달라질 수 있다. 그 책임 위에서, 우리는 다른 노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수동적이고 무책임하지 않은 자유로운 활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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