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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뭄조] 시즌5 <사랑의 기술> 발제 (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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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겨리 작성일19-10-10 15:59 조회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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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8./ 청백전 S5 / 사랑의 기술/ 조한결 ]

에리히 프롬 : 내 고민, 내 문제에 답해주다

이상한 기분의 정체 : 실존을 인식하므로 야기되는 분리에 대한 불안

5년 전쯤, 막 대학에 가고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때(지금도 많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펼쳤다가 몇 장 못 읽고 덮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당시에 내가 기대했던 것은 실용적(?)인 연애 지침서였던 것 같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실존을 논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이 딱딱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다. 그런 선입견과 두려움을 가지고 오랜만에 다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달랐다. 프롬님이 설명해 주시는 인간 실존의 조건과 이로부터 발생되는 분리에 대한 불안에 대해 들으며, 내가 최근에 가장 고민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에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마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묵직하고 커다란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전역 후 4개월간 음란물 문제로 상담치료를 받았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고,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휴가만 나오면, 특히 밤에 혼자 방에 있으면 뭔가 적적하고 기분이 우울했다. 그러다 음란물을 보다가 밤을 새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러면 피곤해서 다음날 일정에 문제가 된다는 걸 아는데도 그것을 반복하는 내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때 내 상황을 반추했다. 나는 도피성 입대를 했다. 내 꿈과 현실 사이에서, 내 능력과 한계 사이에서, 내가 믿어 왔던 세계관과 그것이 무너지는 상황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잠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입대하며 인간관계도 다 정리했다. 그래서 휴가를 나오면 딱히 만날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있자니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돈 문제와 고부갈등, 건강문제로 다툼이 잦았고 그런 부모님이 꼴보기 싫었다. 고등학생인 여동생은 4년 정도 못 본 사이에 훌쩍 크고 성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런 동생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휴가를 나오면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차라리 부대에는 같이 웃고 떠들 동기도 있고, 나를 잘 따라주고, 함께 고민도 나누는 맞후임도 있었다. 단체생활과 열악한 시설로 스트레스를 받아도, 오히려 그 덕분에 분리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틈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솔로인 이유 : 주는 사랑, 책임, 존경, 지식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

나는 멜로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남녀 간의 사랑 뿐 아니라, 동성애나 진한 우정을 그린 작품을 보면, 팍팍했던 감정이 정화(?)되는 듯 한 대리만족을 느낀다. 현실에서도 가까운 연인이 있거나, 친한 친구가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어떻게 가족이외의 타인과 저렇게 가까워 질 수 있지?’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 남녀관계에 더 관심이 가는 이유는, 내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특히 이성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일은 내겐 정말 어려운 일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많이 갖고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자가 부자이다.…… 그러나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각별히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황문수 옮김, 에리히 프롬/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42p]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의 능력은 그 사람의 성격발달에 달려 있다. 이것은 특히 성격이 생산적 방향으로 발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방향에서 인간은 …… 자신의 인간적인 힘에 대한 믿음, 곧 목표달성에 있어서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용기를 획득해 왔다. 이러한 성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같은 책/44p]

프롬에 따르면, ‘생산적 성격이 발달하므로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의 능력이 생기고, 이로부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를 획득한다. 이것이 결여되면 자신을 주는 것, 즉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던 이유는, 무언가(친분, 안정감, 집단에서의 인정, 관심 등)를 얻기 위해 다가가 갔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거절당하면, 즉 얻지 못하면 내 교환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니 자괴감과 분노 따위의 감정을 느낀 것 같다. 무언가를 주기 위해 누굴 만난 적이 없었다. 다 내가 외롭고, 내가 심심하고, 내가 잘나서 만났었다. 왜 연애를 할 수 없었는지도 이제 이해가 됐다. 나라도 누군가가 나 같은 마음을 먹고 내게 접근하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주는 사랑뿐만 아니라, 나에겐 사랑에 있어 필요한 책임, 존경, 지식도 없거나 매우 부족하다.

책임,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존재의 요구-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수 있고, ‘응답할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같은 책/46p]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바라본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같은 책/47p]

사랑의 한 측면인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때에도 가능하다. 예컨대 나는 어떤 사람이 화를 냈다는 것을 그가 분명히 나타내지 않을 때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나 화를 냈다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그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가 불안하고 근심에 싸여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의 노여움이 보다 깊은 어떤 것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를 근심하고 당황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말하면 화낸 사람이라기보다 괴로워하는 사람으로서 보게 된다. [같은 책/48p]

책임, 존경, 지식 각각의 의미를 찬찬히 곱씹으면 책 서문에서 한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님에 공감하게 된다(‘자신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한다.’5p). 앞서 언급한 책임, 존경, 지식의 경지에 이르려면 정말 수행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다행히도, 나는 무슨 복인지 고미숙샘과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을 만났고 이곳에서 함께 그 수행을 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고전을 읽고 도반들과 생각을 나누며, 그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다보면 언젠가 프롬이 말할 사랑의 경지 밑발치라도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청백전 발제_사랑의 기술(19.10.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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