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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인절미] 시즌4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3 후기(40/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서형 작성일19-09-17 22:12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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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4 청백전 시즌4 / 10주차

참여자(9): 김지혜, 문보경, 이윤하, 최세실리아, 현정희, 김다솜, 서다윤, 이용제, 장서형


이번시즌 마지막 발제는 다윤샘이 해주었는데요~

마오리족 이야기 중 테 레인가의 이야기에 꽂혔다고 합니다.ㅎㅎ

이 부족의 문화로는 다른 사람이 가진 물건을 칭찬하는 경우 대부분 즉시 그 물건이 칭찬한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테 레인가라는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기만하면 "그 음식 참 마음에 드네그려"라며

(당시에는 그 음식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이었고) 사람들은 두말없이 주었지만,

이런 행동이 계속되면서 질려버린 마을 사람들이 결국 그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 발제를 읽고 문득 간식을 준비하면서 무화과를 씻고있던 중 수정언니가 "무화과 되게 예쁘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고 

'혹시 먹고싶다는 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미안해졌어요. ㅋㅋㅋ(세미나 끝나고 챙겨드려 마음이 편해졌다는)


다윤이는 마을사람들이 왜 테 레인가를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저도 문득 궁금해지긴 했는데요~

하지만 발제에 다윤이의 고민(?) 증여나 돈, 자본 등 다윤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없어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7장 입발제를 맡았는데요, 저자가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ㅜㅜ

그렇지만 결국 맑스와 모스를 통해 '소외되지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다솜샘이 해주었어요.

아리송하게 끝났지만 증여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시즌을 시작하면서 가져갔던 '자본 밖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해야할 것 같아요.

 

다음 시즌에서는 '마이너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함께 읽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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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청백전 시즌 4/“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3 발제/서다윤

 

마오리족이 테 레인가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왜 테 레인가가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증여는 교환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교환은 내가 이걸 사기 위해서 바로 돈을 줘야하는 즉각성이 있다. 증여에서는 내가 그 물건을 받을 후 적당한 시간차를 두고 그에 대한 적당한 물건을 상대에게 주는 행위이다. 마오리족은 증여, 즉 선물교환을 주로 했다. 각각의 물건들에는 가치를 나타내는 정도가 달랐다는데, 예를 들어 음식은 일상적 소모품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요청하면 거절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가진 물건을 칭찬하는 경우, 그 물건은 대부분의 경우 즉시 그것을 칭찬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이것이 갖고 싶은 물건을 확보하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는지를 우리는 존 화이트가 들려주는 한 대식가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카이타이아의 테 레인가는 식탐이 대단한 자로서 물고기나 다른 먹을거리들을 들고 계곡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기만 하면 그를 불러세워 그 음식 참 마음에 드네그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이는 그 음식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이었으며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속되는 이런 행동에 질려 버린 그 지역 사람들은 마침내 그의 구걸을 끝장내기 위해 떼를 지어 가서는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그린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379

 

레인가는 사람들에게 너무 받기를 원하다가 그런 모습에 질린 사람들에 의해서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음식들이 아낌없는 증여의 대상에 속하지만 위의 글에서 보았듯이 계속 주기만 하면 달라고 하는 자에게 질려버린다. 레인가에게는 그 음식들에 답례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러면 물건 대신 나중에 그 사람에게 가서 자네 참 일을 잘 할 것 같네 그려라는 말을 함으로써 준만큼 부릴 수도 있지 않지 않았을까? 아니면 부린 다음에 물고기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레인가는 음식에 답례를 할 물건은 없었어도 노동력이 있으니 맞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왜 레인가를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

 

레인가는 물건 대신 노동력제공을 했으면 살았을까?

나는 사람들이 레인가를 죽여서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궁금했다. 레인가에게는 물건은 없어도 몸은 있었다. 나는 일하는 만큼 돈을 받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이 부분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물건의 가치만큼 일하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생각은 정말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인가가 물고기를 받았으니 그 답례로 밭일을 해주었다면, 레인가는 물고기에 합당한 답례를 한 것일까? 일단 물고기에 대한 답례로 일을 했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면 얼마만큼 일해야지만 그 답례에 합당한 일을 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는 물고기를 주고 밭일을 원했지만, 누군가는 유리창을 닦아주기를 바란다면, 이 두 일들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일인 것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일을 해주어야지만 물고기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노동력이 되는 것일까? 그럼 만약에 물고기와 파이가 서로 교환되었다면 이 파이는 밭일과 유리창 닦기랑 비슷한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인가? 물건과 물건의 교환들만 해도 굉장히 복잡한 원칙들이 있는데, 물건을 노동력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은 정말 매우매우매우 복잡해져버릴 것이다. 이렇듯 마오리족에게 이런 노동력이라는 것을 가지다붙일수록 더더욱 밑도 끝도 없어지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빈털터리 레인가가 자신의 노동력으로 물고기에 답례를 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솔직히 레인가는 아무생각 없이 요청하기만 하면 배부르게 먹고 살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레인가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답례를 하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런 레인가에게 질리기도 했겠지만 위기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계속 주기만하는 관계가 고착되어 버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만을 원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레인가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다.)

 

21세기 테 레인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오리족에게는 물건의 가치를 노동력으로 제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나는 너무 당연하게도 마오리족도 물건의 가치만큼 노동을 제공하면 된다고 말하려 했을까? 그것은 내가 자본주의라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에는 임금노동제가 있다. 일을 한 만큼 돈을 번다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한 시간에 팔천 원을 주는 서빙알바에서 한 시간을 일을 하고 그 돈으로 팔천 원짜리 밥을 먹으면, 그 팔천 원은 딱 밥 한 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시간 서빙알바가 팔천 원짜리 밥과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밥이 아니더라도 책이든 화장품이든 팔천 원에 살 수 있으면 다 같은 가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돈으로만 따져본다면 말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말한 노동력제공의 이면에는 돈이라는 것이 깔려있었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가치척도는 돈에 달려 있다. 돈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세상이니 참으로 간편한 것이다. 그에 반해 마오리족은 물건과 물건을 이어줄 하나의 척도가 없었기에 엄청나게 많은 원칙들이 필요했다. 이런 원칙들 중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마오리족 역시 이런 보물을 누군가로부터 선사받는 물건으로 이해했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제공하게 만드는 것은 받는 사람의 유혹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선물에 답례 할 수 있는 능력(혹은 기질), 즉 받는 사람의 행위 능력이라고 생각 했다.(위와 같은 책, 380)

 

언 듯 봐서는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물건을 준다, 라는 말과 비슷해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자신이 준 물건과 비슷한 값어치의 물건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라는 것은 소비할수록 물건이 계속 쌓이게 되는 다다익선의 형태가 되기 쉽다. 그러나 마오리족은 그 사람의 소중한 물건을 요청할수록 자신도 그 값어치에 대하는 자신의 물건을 줘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다익선이라는 형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마오리족이 이런 복잡한 원칙들을 쓴 것에 대해서는 아마 이런 다다익선의 형태를 막기 위한 장치역할도 있지 않았을까? 물건을 주는 사람은 물건을 이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사람을 더 잘 알게 되는 효과도 생기게 될 것이다.

중요한 선물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제공한 선물을 받으면 그가 원하는 답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타히페 족장은 자신의 귀 장식품을 파파카 족장에게 주고 나서 나중에 답례로 전 영토의 지배권을 요구했다. 파파카 족장이 바보여서 나타히페 족장의 귀 장식품을 받았을까? 그걸 받으면 어떤 요구든 들어줬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귀장식품의 가치가 전 영토의 지배권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족장의 물건은 가치가 엄청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족장의 물건은 족장과만 바꿀 수 있고, 부족민의 물건은 부족민들과만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족장은 족장이랑만, 부족민은 부족민이랑만 물건을 교환 할 수 있어 불공평해 보일 순 있지만, 자기 분수보다 더 한 물건을 원하게 하지 않게 하는 장치로서는 효과적인 것 같다. 만약 족장이 부족민의 물건을 취했을 경우에는 족장이 부족민에게 상대에게 귀족적으로 아낌없는 답례를 제공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부족민의 경우는 다르다. 설사 족장의 물건을 원한 다 한들 그 물건에 답례할 물건이 없으니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족장들 역시 딱 봐도 부족민들이 자신의 물건에 답례할 능력이 없어 보이니 줄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레인가가 죽었던 이유도 답례할 능력도 없는데 받기만 해서이다. 레인가는 자기 분수를 넘었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분수를 넘는 레인가를 사람들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론적으론 보면 레인가는 목숨을 담보로 물고기를 계속 받아먹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모습들은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닮은 것 같다. 현대인들은 미래를 담보로 돈을 받아쓰고 있고 어쩌면 그렇게 돈을 받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래를 담보로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분수보다 더 한 물건을 원하고 살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마오리족의 사회가 더 좋은 사회고,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미래를 끌어다 쓸 수 있을 듯이 말해서, 너무 쉽게 빚을 지고 대출을 받게 돼서 위험한 것 같다. 대출 할 때 돈을 그냥 줄 거처럼 말해도 갚지 않으면 빚덩이가 굴러 들어오게 되기 일쑤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빚덩이는 생각하지 않고 레인가가처럼 앞으로도 요청하기만 하면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기 쉬운 것같다. 그러니 어느 사회에 살든 간에 어떻게 해야 돈(혹은 물건)을 어떻게 대할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21세기 테 레인가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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