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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인절미> 시즌3 -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후기 (2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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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삼봉 작성일19-06-11 11:11 조회1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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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전 인절미> 시즌3 -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후기 (29/100)


 

참여 : 김지혜, 이윤하, 최세실리아, 현정희, 김성아, 윤보경, 이지향

 


이번 세미나에는 전원 출석해서 7명이었습니다. 원래 8명인데 무슨 말이냐고요?

엘림샘이 임신이라는 기쁜 소식과 함께 아무래도 세미나에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오셨습니다 흑흑 그래서 아쉽지만 7명이 시즌의 마지막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시즌의 마지막 책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인데요 똘스또이의 단편선입니다.

출판사별로 선별된 작품이 다르기에 책을 두 번 사거나 다시 빌리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만은 일단 제가 발제문에 쓴 세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작품은 똘스또이가 세 종류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간결하게 그러나 임팩트 있게 그려놓은 단편인데요. 저에게는 인상이 깊어서 좀 더 파고들어가보고 싶어지더라고요.

 

가족과 신부님에게 둘러싸여 요란을 떨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귀부인과

가족은커녕 친구도 없이 공간만 차지한다며 구박받다가 죽는 늙은 남자

그리고 나무의 죽음까지.

(저는 처음에는 나무의 죽음이 아니라 소년의 죽음이라고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읽었습니다. 죽어가는 남자의 장화를 받으면서 비석을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미루고 미루던 소년이 나무를 하다가 나무에 깔려 죽었다고... 아주 독특한 해석을 한 채로 발제를 해버렸습니다. 하지만 후기를 쓰면서 나무의 죽음이라고 해석하니 그것도 나름으로 재미있다고 느껴집니다. 두 인간의 죽음과 나무의 우주적인 죽음, 그러니까 죽음마저도 우주적인 순환과 생산이라는 안티오이디푸스의 관점으로 읽히는 것도 재미있네요. 물론 안티오이디푸스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요! )

 

두 인간의 죽음은 뭔가 씁쓸합니다. 귀부인은 죽음을 거부하고 억울해하다가 죽음 직전에 아름다운 것으로 죽음을 미화합니다. 늙은 남자는 거의 먼지취급당하면서 스스로 소멸해가지요. 두 인간의 죽음이 나무의 죽음과 대비되면서 씁쓸하고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나무는 그저 쿵!하고 쓰러집니다. 일부는 늙은 남자의 무덤의 십자가로 쓰일테고, 또 일부는 썩어서 새롭게 살아갈 나무들에게 비료가 되겠지요. 그저 새로운 생명들을 위해 공간을 내어주며 미화도 비참도 아닌 모습으로 우주의 순리에 참여합니다.

 

두 번째 죽음, 늙은 남자의 죽음은 저에게 다소 헷갈렸습니다. 스스로 소멸해가는 인간이 저에게는 한끗 차이로 담담함과 생장소멸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단편집의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전쟁터의 여러 인간 군상 중에서 진정으로 용기 있는 대위의 다른 버전으로 보이기도 했거든요. 비록 대위처럼 지위도 능력도 그리고 몸도 탄탄하고 충만하지는 않지만,) 과욕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장화를 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내어주는 모습이 칭얼거리는 귀부인보다 성숙하다고 생각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후기를 쓰면서 자신의 죽음에는 무심하고 오로지 장화를 탐하는 소년에게 비석을 세워달라는 말을 하는 심정이 어땠을지 새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왜 비석을 바랐을까요? 기억되고 싶고, 흔적을 남기고 싶지만 그럴 기력이 없는 거였을까요? 그리고 그런 소년밖에는 부탁을 할 사람이 없었던 거라면 죽음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말고 할 기력도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슬퍼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는 좌절의 상태였다면, 그건 성숙과는 거리가 멀겠죠.

 

읽고나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또는 죽음은 어떻게 맞이해야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어떻게 죽고 싶지?”라고 묻게 되고요. 나는 죽음을 미화하면서 신에게 기대거나, 나의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허무한 약속을 받아내거나 하는 방식이 아닌 죽음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그게 이 단편집의 제목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연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품들도 많았지만 저는 첫 번째 두 번째 작품이 기억이 남습니다. 여러 인간 군상이 나오는데요, 정말 그들은 모두가 다른 것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에 대한 증오가 원동력인 사람, 폼생폼사인 사람, 자신에 젊음에 도취된 사람, 호기심으로 전쟁터와 와서 실상을 보고 질리는 사람, 명예가 중요한 사람 ... 그리고 그 중에 영웅처럼 그려지는 대위가 있습니다. 그는 용기로 살아갑니다. 그는 말이 많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행동할 뿐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도 번드르한 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내는 돈과 짧은 편지가 전부입니다. 그는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그것에 도취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응당 해야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에게 화자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글을 읽고 있으면 저도 반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지? 사랑이라고 말해주는 단편도 있었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그것을 더 선호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런 단편이 동화처럼 느껴지고 와닿지 않습니다. 어쩐지 죽음이나 전쟁그리고 용기가 더 와닿네요. 하하.

 

다음에 나머지 반절을 마저 읽고나면 청백전 시즌3이 마무리됩니다. 똘스또이에 취해서 잊고 있었지만 이번 시즌의 주제인 유일신과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다음시간에 더 집중해서 토론을 준비해오자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토론을 마쳤습니다. 개인적으로 각자 부분을 정해서 입발제를 하고 필사를 해오는 방식이 퍽 마음에 듭니다. 토론도 알차고, 각자 밀도와 긴장도도 생기고 말이죠.

 

그리고 다음 시간에 뒷풀이를 하면서 세미나는 무엇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까합니다 흐흐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궁금해지네요! 그럼 마지막 시간 발제를 맡은 윤하의 글을 기대하면서 후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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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죽음 그리고 ...

 

죽음만큼 우리의 적나라한 속내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세 죽음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똘스토이의 단편에 꽂힌 이유는 그 적나라함이 응축되어서 나오기 때문이다. 별자리에서 전갈자리를 설명할 때 항상 죽음에 대해서 설명한다. 심연의 깊이까지 내려가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 심오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해서만 이뤄내는 존재의 변이! 마치 죽음이 마법적인 어떤 것으로 들린다. 반면 똘스토이가 그리는 죽음의 주변에는 꼴 보기 싫은 그러나 내 안에도 있을 추하고 못난 인간상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부인의 죽음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부인이 마차를 타고 간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이탈리아로 향하는 중이다. 그녀의 남편은 의사에게 슬픈 소식을 전해듣는다. 그녀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탄하고 또 한탄한다. 아픈 아내를 집으로 돌아가게 설득하러 가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자신의 배를 채울 빵이다. 그렇다, 그는 산 사람이고 건강하다.

 

여보, 당신 좀 어때?남편이 빵 조각을 씹으며 마차로 다가와서 물었다.

<언제나 똑같은 질문만 하면서 자기는 먹고 있군!>

괜찮아요!그녀는 이 사이로 내뱉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 죽음, 똘스토이, 82

 

게다가 이를 갈면서 말하는 아름다운 부인이라니! 죽음은 우리의 맨 낯짝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얼마 뒤 시간이 흘러서 그녀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그녀가 죽기 직전이다. 부인은 아직 삶을 포기하지 못했다. 약을 구해오지 않는다며 남편의 마음을 오해하고 자신을 진작 이탈리아에 보냈다면 살았을 것이라고 남편을 원망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사촌은 계속 천사!”라고 추앙한다. 신부님께 죽음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고 난 뒤 그녀와 남편의 대사는 경악의 화룡정점이다.

 

환자는 성상화를 보며 조용히 울고 있었다.

여보, 축하해.남편이 말했다.

고마워요! 얼마나 기분이 좋아졌는지 몰라요. 불가사의한 달콤함마저 느껴진다니까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 죽음, 똘스토이, 92

 

이 무슨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인가? 정말 불가사의하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녀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가족들과 비슷한 대화를 나누리라. 죽음을 미화시키며 죽음 앞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덮어버린 채, 천사를 찾고 축하하고 달콤함을 느끼는 그들을 향해서 똘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생전 그녀의 신경은 온통 곤두서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낭독되는 위대한 말을 그녀는 조금이라도 이해할까?”

그가 말하는 위대한 말이란, 시편의 한 구절이다. 94쪽에 인용되어있는 시편의 구절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나름으로 풀어보자면 이렇다. 먼지로 돌아가지만 땅으로 소생하고, 야훼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 아름답게 미화될 필요 없음을, 천사와 달콤함을 운운하지 않는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할 순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말이다. 애써 죽음을 미화시키는 그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아름답지 않아도 죽음이 충분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간의 죽음

그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다. 괜히 좁은 방구석의 자리를 차지한다거나 또는 그가 신고 있기에는 아까운 장화를 신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마침내 죽던 날, 그에게 자리를 차지한다면서 면박을 주던 그러나 또 담요를 덮어주던 나스따샤는 그의 꿈을 꾸었다.

 

표도르에게 피붙이는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다음날 숲 뒤편에 만든 새 묘지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나스따샤는 몇 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꿈 얘기와 자기가 표도르 아저씨의 죽음을 처음 알아챈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 죽음, 똘스토이, 88

 

그의 죽음보다 그녀의 꿈에 더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라니, 표도르는 끝까지 참 대접을 못받늗다^^; 표도르가 죽을 때, 부잣집 부인의 경우처럼 허례허식이나 절차를 갖춘 고해성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그는 조용히 숨을 죽이면서 죽었다. 다소 잔인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의 존재보다 공간이 더 가치 있는 것처럼 이야기 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장화를 떼어줄 때, 그리고 자신이 곧 떠날 테니 공간이 날 거라고 말할 때 그가 앞의 부인보다 성숙하다고 느껴진다. 표도르는 죽음과 죽음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아름답지 못한 맨 얼굴을 그냥 받아들인다. (혹은 그저 기력이 없었을 지도 ... )

 

나무의 죽음 그리고 또...

 

도끼와 발소리가 멎었다.- 같은 책, 96

 

표도르의 장화를 받아가면서 비석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소년에 대한 비난이나 반발심은 짧은 단편이 끝나면서 사라졌을 것이다. 사실 그 비난의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나는 조금 반가웠다. 그 소년을 닮은 철딱서니 없는 이기심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서 그런 모습을 만나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을 겪지 않으면 소년처럼 갑작스럽게 밖에서 닥쳐오는 죽음에 쓰러지고 만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떨어질 수 없다. 글은 스스로 죽음을 겪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오류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겪어내어야 글로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 세 죽음의 주변에서 만난 보고싶지 않은 모습을 글을 쓰면서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것을 미화시키거나 그것을 피해 다니다가 나무에 깔리는 소년처럼 피드백에 깔리고 만다. 심오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마법이 아니라 오타와 비문을 안 쓰고, 책을 착실하게 읽는 성실함에서 오더라... 세 죽음에서 나는 나의 죽음을 보았다. 똘스토이는 우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죽음을 겪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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