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청백전

[청백전 마늘쑥쑥조] 시즌3 <몰로이> 발제

게시물 정보

작성자 문명 작성일19-05-15 19:10 조회21회 댓글0건

본문

끝없는 반복


몰로이2부는 자크 모랑의 이야기다. 자크 모랑은 그의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게이버라는 연락원에게 몰로이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고 말이다. 떠나기 전 모랑은 몰로이에 대해 생각한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투박하며, 찌푸린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한다.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의 모습을 그려가다가 발견한다. 그의 안에는 네 명의 몰로이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는 내 마음속에 있던 몰로이, 그에 대하여 내가 그려가고 있던 몰로이, 게이버의 몰로이, 그리고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피와 살을 가진 몰로이가 있는 셈이다. 다른 이가 생각하는 다섯 번째 몰로이도 더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무수한 몰로이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읽기만 해도 혼란스럽다. 이 작품의 끝에서 그는 과연 몰로이를 잡을 수 있을까?


반복 속의 지옥과 편안함

결과적으로 작품 속에서 그는 몰로이를 만나지 못한다. 어쩌다 몰로이의 고장에 가긴 하지만 게이버의 연락을 받고 다시 집으로 복귀한다. 이야기 끝에서 그는 집 안에 들어와서 글을 쓴다. ‘자정이다. 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아니었다. 비가 오고 있지 않았다.’ 이 말의 앞부분은 2부 작품의 시작과 같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길을 떠남과 동시에 쓰고 있던 걸까? 집에 들어와서 사건을 회귀하는 방식으로 쓴 걸까?


모랑이 자신의 고장으로부터 몰로이의 고장에 이르는 도중의 이야기를 쓴 부분에서 그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말한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 이어질 페이지에서, 내가 사건들의 엄격하고 실제적인 진행 단계를 벗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그리고 그는 매번 갈 때마다 그것이 첫 번째라고 믿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그에게 희망을 간직하게 해줄 것이다. 그렇지 않겠나.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것과는 상반되는, 진짜 지옥 같은 성질의 희망을, 한편 끊임없이 본래로 돌아가는 자신을 보는 것, 그것은 우리를 아주 편안함으로 채워준다. (몰로이, 사뮈엘 바케트, p.201)


이 부분을 읽자 끔찍했다. 매번 가는 길을 처음이라고 느끼며 희망을 갖지만, 계속해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니 정말 지옥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돌아가는 자신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준다. ‘역설적이다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간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라고 하는! 하고 나서 후회할 짓을 계속하는 데에는 그 행위에 대한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넘어서 모랑도 몇 번째 돌아오는 길을 계속 반복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몰로이의 다른 이름은 오비딜이다. 주석에 따르면 오비딜(Obidil)은 리비도(Libido)의 철자를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랑의 여정은 자신의 리비도를 찾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랑의 아들, 게이버, 길 위에서 마주친 남성 등등 나오는 모든 사람이 그의 내부에 있는 여러 인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이 떠났을 때 그는 평온했다. 그는 모든 게 끝나리라는 것 혹은 다시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저 기다리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들의 분노가 가라앉고 나서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 찾아올 것이라는 걸 안다. 이 내부의 싸움에서 반복은 계속된다.


다양한 리듬을 가진 꿀벌들의 춤

이 안에서 작은 기쁨을 주는 것은 꿀벌이다. 그들은 모랑의 정원 안에 있었던 새장 속에 갇힌 새들과는 다르다. 모랑은 꿀벌을 자세히 관찰한다. 꿀벌들의 춤은 형태와 리듬이 다양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끼리의 신호체계를 형성한다. 수확하러 갔다 온 꿀벌이 나가는 꿀벌에게 방향을 알려준다. 그것은 밖에서 보면 춤이지만 그들에게는 소통의 방식이다. 모랑은 그것이 인간의 이론으로써는 더럽혀질 수 없는 영역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항상 바라보기에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부득이한 나 같은 인간의 이론으로써는 결코 더럽혀질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분노와 걱정, 욕망 그리고 내 육체까지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는 걸 배워왔었는데, 내가 내 하느님께 저지른 그 잘못을 내 꿀벌들에게는 저지를 수 없었다.

(몰로이, 사뮈엘 바케트, p.254)

내 감정들, 내 분노와 걱정, 욕망은 이미 더럽혀진 것일 수도 있다. ‘각자 자기 일에 전념하기를 하는 꿀벌들과는 달리 누군가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속에서 모랑은, 우리들은 끊임없는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계속해서 다른 것을 탓하며 말이다.


모랑은 이후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작품 끝에서 이 목소리는 모랑에게 이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말한다. 모랑은 묻는다. 이것이 내가 지금은 더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치만 작품의 끝은 작품의 시작과 연결된다. 반복되는 것이다. 이 끝없는 반복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