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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본기(4)>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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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옥상 작성일15-03-24 20:14 조회1,54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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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읽기

 

우샘은 <사기>의 한 글자 사이의 행간에서 무언가를 읽어내신다. 이번 시간에 읽어 주신 것은 바로 ‘민심民心’이다. 원문 어디에도 ‘민심’이라는 두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항왕(항우)을 ‘대노大怒’하게 만들고, 연전연승하던 항왕에게 패배의 징후를 보인 것은 모두 다 숨겨진 ‘민심’ 때문이다. 그가 ‘어려서^^’ 읽지 못했거나 안 보여서 읽지 못한 ‘민심’이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셈이다. 홍문의 연회가 일어나기 전과 후를 통해서 살펴보자.

홍문의 연회에서 항왕은 패공(유방)을 용서했다. 함양에 먼저 들어가 평소 자신답지 않게 패공은 안 하던 짓을 했다. 재물도 탐하지 않았고, 미녀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세상의 모든 진귀한 보물과 여인들이 지천에 깔렸는데도 말이다.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그의 욕망은 천하를 소유하려는 것. 그 큰 욕망을 항왕이, 그의 책사인 범증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 항왕은 ‘잠시’ 패공의 욕망을 눈 감아 주기로 한다. 어떻게?

항왕이 항백을 통해서 패공이 용서를 구하러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마음 반쯤은 풀린 상황이었다. 이 구역의 미친개가 누구인지 명명백백 알게 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홍문의 연회에서도 범증이 세 번이나 패공을 죽이라고 눈치를 줬지만 항왕은 무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공은 목숨을 유지했다. 마지막으로 패공이 보내준 벽옥에 항왕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물론 패공의 존재가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가 자신의 라이벌이 될 깜량으로는 절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자기에게 대적할 것인가, 그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뒤 서쪽 함양으로 진출하면서 항왕은 항복한 진왕 자영을 죽였다. 진나라의 호화 궁실들이 불탔다. 얼마나 싹 다 태웠던지, 얼마나 진의 궁실이 화려했던지 석 달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진시황의 무덤도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재물과 여인들은 전리품마냥 동쪽으로 옮겨졌다. 야만인이나 할 듯한 약탈을 항왕이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가 함곡관까지 도착할 때 생매장했던 진나라 군인들의 수는 물론이고, 함양을 약탈하면서 보여줬던 행동들은 아무리 잔혹한 전쟁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항왕은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모셨다. ‘의로운 황제’라는 의미일지는 모르나 ‘의형제’의 ‘義’자처럼 해석한다면, 초 회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항우가 만든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꼭두각시일지라도 그가 황제인 한, 그에 걸맞게 대접해주어야 한다. 의제의 재가도 없이 항우는 스스로 왕으로 칭하고, 구체적인 군공이 있는 장수들에게만 땅을 나눠주는 등의 논공행상을 단행했다. 그가 보여준 오만함의 극치.

"천하에 처음으로 난이 일어났을 때, 임시로 제후의 후손을 세워서 진나라를 토벌했지. 그러나 몸소 갑옷을 걸치고 무기를 들고 전쟁에 앞장서, 들판에서 삼 년 간이나 야전생활을 하면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것은 그대들 장군들과 재상, 그리고 나의 힘 덕분이었지. 비록 의제가 공이 없으나 마땅히 그 땅을 나눠서 왕 노릇하게 하겠다."

얼마나 오만한 발언인가! 게다가 그는 “부귀하여져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 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형국이니 누가 알아주겠느냐!”라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골뜨기’ 근성이 있었기에 그는 함양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을 터다. 개선장군처럼 금의환향하기를 꿈꿨던 그는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그런데 하필 그가 가려는 초 땅(팽성彭城, 지금의 서주徐州)에는 이미 의제가 있었다. 같은 곳에 두 왕은 있을 수 없는 법. 그는 옛날 황제가 살았던 사방 천리의 도읍은 반드시 강의 상류에 있었다면서, 의제를 양자강의 상류로 치워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의제를 모시던 장군들은 팽성에서 장사長沙로 조금씩 의제를 옮기는 와중에 그를 죽였다. 항왕이 의제를 죽인 것.

황왕의 군대가 가는 곳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정도로 피가 튀었다. 생매장은 기본이다. 그러니 양민들 중에 그를 좋아할 자 누구랴! 기의起義의 명분인 의제를 죽인 항우에게 지식인과 제후들이 어떻게 고개 숙일 수 있을 것인가! 어찌 반발의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으리! 항왕의 군대는 싸움에서 이길 때마다 저항세력까지도 함께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항왕은 패공을 용서한 듯하나, 여전히 그를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초 회왕의 ‘약속대로(如約)’ 패공에게 관중 땅인듯 보이나 관중關中 땅이라고 하기는 거시기한 파촉巴蜀 땅으로 유배 보내듯 보냈다. 그 지역은 한수漢水의 발원지로 한중漢中 지역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패공은 이후 한왕으로 불리고, <사기>의 서술에는 한왕 일 년, 이 년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항왕은 한왕을 견제하고 막기 위해 진나라의 항복 장군인 장함과 장사 흔을 관중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장함은 함양을 기준으로 서쪽 지역인 옹雍 땅의 왕으로, 장사 흔은 함양 서쪽에서 황하까지의 새塞 땅의 왕으로 임명된 것이다. 옹과 새, 그리고 한왕이 맡은 파촉지역을 통틀어 삼진三秦이라고 불렸다. 한왕이 간 파촉 지역은 험하기로 유명하다. 지금의 섬서성 남부와 사천 지역인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은 양자강을 타고 나가거나 북쪽의 관문을 뚫고 나가는 길, 둘밖에 없었다. 항왕은 그 북쪽을 막으면 한왕을 고립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항왕의 인사정책은 여기서 실패(?)한다. 꼼수를 부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너무 민심에 대해서 몰랐던 것일까. 자신의 아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갔다가 다 생매장시켜 죽이고, 혼자 살아온 옹왕과 새왕에 대해서 진나라 백성치고 좋아할 자가 누가 있을까. 항왕의 입장에서는 그 지역 출신자가 그 지역민을 잘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마천은 그 지역민이 장함등에 대해서 어떻게 저항했는지, 혹은 어떻게 개겼는지 쓰지 않았다. <사기>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민심이 그들에 대해서 우호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항우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실패한 까닭을 찾자면, 이렇듯 민심에의 무시, 민심에의 위배가 크게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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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금강석님의 댓글

금강석 작성일

항우가 패자를 꿈꾸었다면 철저히 패자가 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진이 3개월동안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패망시키고 불을 질렸는데 6개월동안 꺼지지 않았으며, 2차세계대전에 패망한 일본은 스스로 불을 질렸다고 한다.

용씨님의 댓글

용씨 작성일

황왕 오타 하나 있구요. 삼진은 옹,새, 그리고 동예를 왕으로 세운 적翟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