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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공자스쿨 4기 청공 4기

청공2학기 에세이

게시물 정보

작성자 서다윤 작성일19-07-06 21:59 조회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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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4/ 사피엔스& 축의시대 에세이/ 2019.07.07./서다윤

 

나는 행복한 은둔자가 되고 싶은가?

 

너무 쉽게 쾌락에 흔들리는,

 나에게 행복은 곧 쾌락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웹툰을 봤을 때랑 비슷한 거다. 웹툰을 보면 그 쾌감이 눈에서 머릿속으로 퍼지는데, 그 감각을 나는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 쾌락은 정점을 찍고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쾌락이 사그라지는 감각을 느끼며 방금 전에 봤던 것을 머릿속으로 돌리고 또 돌려가며 방금 전에 느꼈던 쾌락을 또 맛보려 한다. 그렇게 또 다음 편을 봤는데, 전 편보다 재미가 없으면 쾌락은 오지 않고, 찜찜한 아쉬움만 남게 된다. 나는 전에 느꼈던 쾌감을 그대로 다시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쾌감은 어느 시점이 오면 쉽게 오지를 않는다. 그러면 쉽사리 허무해진다. 그럴 때면 이러한 감정의 덧없음을 느끼고 불교에서 말하는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유발 하라리, 김영사, 사피엔스, 558)라는 말이 너무 와 닿는다. 그리고 쾌락을 느끼는 것을 멈춰야겠다.’라는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더욱 더 큰 쾌락을 느끼는 때가오면 나는 쾌락을 느끼는데 급급해서 쾌락이 최고야!’가 되어버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쾌락을 원하는 거야’, ‘내 내면의 느낌이 중요하지~’로 생각이 튀어버린다.

 현대의 자유주의에게는 불교의 사상이 받아드리기 힘들어서 완전히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자유주의는 행복은 외적인 무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느낌에 좌우된다는 식으로 받아드린 것이다. 불교와 같이 외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불교에서는 내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내 느낌을 중하게 여길수록 느낌이나 감정에도 집착하게 된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갈망을 멈춰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왜 이리 너무 쉽게 자유주의가 말한 것처럼 내 내면의 느낌이 중요해로 가버리는 것일까?

 

나는 모르고 있는가?

 붓다는 칼라마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답을 듣기를 기대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미 올바르게 사는 법을 알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탐욕은 좋은가, 나쁜가? 누군가 욕망에 사로잡혀 훔치고,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평판이 좋지 못하고, 따라서 불행해지는 것 아닌가? (카렌 암스트롱, 교양인, 축의시대, 485-486)

 

 나는 이 텍스트를 읽으며 나는 그저 답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답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동 매뉴얼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내가 중독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러나 붓다의 말처럼 내가 그것을 정말 몰랐을까? 계속 웹툰(등등)에 빠져 살던 내가 이게 아닌 것 같다고 집구석을 나왔다. 그리고 공부를 했다. 작년에 웹툰 등을 안 보며 공부했을 때, 그런 나를 보면서 나 스스로도 신기했다. ‘내가 이런 삶이 가능하다니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탐욕에 나를 맡기지 않는 것이 내게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그런 것을 한 번 경험하고 나니까, 나를 절제하게 해주는 공부가 좋아졌고, 또 재미를 붙여갔다.

 그러나 나는 삐끗하고 말았다. 청년 스페셜과 청공4기 중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청년 스페셜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좀 무섭기도 했다. 너무 바쁜 스케줄을 보니 겁을 먹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공4기로 우회했다. 나는 더 이상 바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남아 도니까, 작년에는 별로 세어 나오지도 않았던 욕망들이 이틈을 타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공부하러 이곳에 왔는데, 어느 순간 웹툰에 빠져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나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쾌락에 빠진 나는 쉽사리 다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주객전도가 되었다. 세미나가 있어도, 그 세미나를 들면 웹툰 볼 시간이 줄어든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해서 힘들어도 웹툰에 끄달리지 않고 살게 돼서 좋았다는 것은 쾌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내게 더욱 큰 쾌락을 불러온 것이었다. 그리고 휩쓸려 가버렸다.

 

행복한 은둔자는 될 수 없다

 쾌락에 휩쓸린 후에 생각해보았다. 언제까지 공부와 쾌락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자책할 것인지, 자책 자체가 스스로에게 면죄부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차라리 웹툰을 보는 것 자체가 내게 존재적으로 충만한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처음부터 웹툰이나 이런 것을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마치 그런 상태면 행복할 수 있을 것처럼.

 

 우리의 내부 생화학 시스템은 행복 수준을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듯하다. 자연선택은 보통 말하는 의미의 행복을 선호하지 않는다. 행복한 은둔자의 유전적 계통은 끊어질 테지만, 걱정을 많이 하는 부모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질 것이다. 진화에서 행복과 불행이 맡는 역할은 생존과 번식을 부추기거나 그만두게 하는 것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진화의 결과 우리가 너무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진화는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 느낌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조만간 이 느낌은 가라앉고, 불쾌한 느낌에게 자리를 내준다.(유발 하라리, 김영사, 사피엔스, 545)

 

 유발 하라리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말란 듯이 내 뒷통수를 쳤다. 웹툰을 보면서 존재적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유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쾌락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도 유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길을 찾았어야 했지, 불가능한 것을 쫒지는 말았어야 했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느껴왔던 쾌락이 한순간에 없어졌으면 좋겠다니, 이 마음 자체가 욕심이었다. 어차피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자책을 하지 말고, 그 힘을 다른데다가 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내가 자책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내게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 그만두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어쩌면 너무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된 상태이기에 무언가라도 하려고 발버둥을 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것이 인간의 유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짜증이 났었다. 왜냐면, ‘행복할거면 아주 행복하지, 왜 이렇게 어중간 한 거야?’라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발버둥을 쳤기에 웹툰을 탐닉하는 것보다,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를 잡아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내가 집구석에서 웹툰만 보는 행복한 은둔자였으면 이런 것을 알았을까? 그럴 수도 없겠지만 분명 모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더 이상 행복한 은둔자이기를 바라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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