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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공자스쿨 4기 청공 4기

청공 3기 3학기(청공4-1학기) 3주차 후기 (1)

게시물 정보

작성자 류수정 작성일19-03-13 11:04 조회2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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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후기가 길어지는 것이 고민이다. 줄여야 한다. 줄여야 한다.


1교시 후기를 시작해 볼까. 요즘 일찍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1주일 동안 숙성시킨 질문을 들고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주일 숙성시킨 질문들이 좋았다. 직장상사와 내가 마주쳐서 일으키는 변용이 죽을 만큼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실생활과 밀접한 질문이다. 상사와 부딪쳐서, 돌멩이가 유리창과 마주쳐서 유리창이 깨지는 것과 같은 죽음에 가까운 변용이 날마다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일단 유리창인 나는 돌멩이(상사)와 마주치면 깨지는것과 같은 죽음에 가까운 변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 돌멩이와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마주친다면 나(유리창)와 돌멩이 사이에 쿠션을 놓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마주쳐야 한다. 그러면 죽음과는 다소 먼 변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된다면 회사를 나와야한다. 만약에 회사를 나오지 않으면 그렇게 매일 정신이 깨지고 또 깨지며, 정신과 신체는 별개이지만 유사한 리듬을 만들기 때문에, 언젠가는 신체도 깨지고, 아프게 되어 있다. (몸이 아프지 않으니 나는 회사를 다닐 만 한 것인가 되물어 본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 이야기하였다. 요즘 우리는 나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나를 드러내면 사람들과 다투고, 감정이 다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는 실로 자기를 기만(?)한 것이다. 내가 사람들과 부딪치는 이 부분, 유리창과 돌멩이가 만나서 깨지는 변용은 돌멩이의 특성보다 나의 본성을 더 잘 나타낸다. 그러니 내가 부딪치고 깨져야 나의 본성을 알 수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내 본성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공부의 기회를 내가 스스로 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치킨이야기를 했다. 밤마다 먹는 치킨은 맛이 있다. 그러나 밤에 먹는 치킨은 살도 찌고, 체하기도 하고, 가끔은 위가 아프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도 밤에 치킨을 멈출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이롭지 못한 치킨을 멈출 수 있게 할까? 내 생각에는 유리창이 깨지는 변용과 같이 죽을 만큼 아프지 않기 때문에 치킨을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멈출 수 있게 할까? 날마다 야식을 먹는 것이 머리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몸은 너무 즐거워서 멈출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짜릿한 대화가 오고 가지 못한 채 수업이 시작되었다.

저번 시간에 우리는 스피노자의 신체와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신체는 운동과 정의 비율을 맞추어 하나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다. 리듬은 우리의 본성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어떤 리듬을 가지고 있는가? 를 알면 우리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신체는 확장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내가 책을 읽고, 그 책이 재미있으면, 책과 나는 하나의 몸을 형성한다. 신체가 확장된다. 그리고 그 책이 너무 재미있으며, 밤을 새서 읽는데, 그러면 점점 책과 나의 관계에서 나는 부분적인 원인 되고, 나의 신체는 축소된다. 이와 같이 신체는 확장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신대륙을 찾은 유럽인들이 인디언에게 땅을 팔라고 하였다. 그런데 인디언에게 땅은 또 다른 나였고, 확장된 신체의 일부였다. 땅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인디언들은 땅을 팔라고 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장기매매를 하라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이다. 이에 유럽인들은 몸과 자연을 분리하는, 자신과 자연을 분리하는 단계부터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유럽인들은 인디언의 손에 거울을 하나씩 주었다. 거울에 비추는 나 자신의 모습, 자연과 떨어진 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몸을 분리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사실은 자연적이지 않다. 모두 사회에서 만들어진 감각이다.

신체와 신체가 마주치면, 우리는 변용을 일어난다. 그 변용은 뇌가 인지한다. 그런데 뇌라는 것이 신기한 것이, 뇌는 한 번도 외부와 마주치지 않는다. 두 개 골에 쌓여서, 깜깜한 방안에 앉아서,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환상에서 이해한다. 외부의 세계를 추측하여 인식한다. 뇌는 외부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을 자기의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체와 신체가 마주침이 일어나면,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변용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변용은 나의 본성을 더 많이 나타낸다. 변용의 원인을 내부의 원인으로 두면 적합한 인식이고, 변용의 원인을 외부의 원인으로 두면 부적합한 인식이다. 나와 외부의 원인이 만나면 두 가지의 감정이 일어난다. 두 가지 감정은 기쁨과 슬픔이다. 기쁨의 원인을 외부에 두면 사랑이고, 슬픔의 원인을 외부에 두면 증오이다. 그래서 사랑과 증오는 똑같다. 외부의 원인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중독 되게 된다. (관계의 중독)

능동적 신체는 신체의 본성을 나타낸다. 신체의 본성은 리듬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코나투스라고 하며, 우리의 활동능력과 변이능력을 가지고 있다. 코나투스가 실현되면 기쁘고, 코나투스가 실현되면 활동능력이 증가하여, active한 상태가(능동태)가 되고, 신체의 결합이 잘되어 변이 능력이 증가한다. 이와 반면에 코나투스가 막히면 슬퍼하고, 활동능력이 저하되며, 변이능력(결합능력)이 저하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능동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우리는 고립되어 있으면 불편해 한다는 것이다. 고립되어 있으면 신체의 활동능력이 저하되고, 이의 변이능력 (결합능력)이 저하되어, 코나투스의 실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의 리듬을 맞추면 기뻐한다. 기쁘면 계속 계속 그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능독적 신체가 되려면 이와 같이 기쁨의 감정을 이용하면 될 수 있다.

3. 기쁨과 슬픔의 물리학

기쁨과 슬픔의 정념은 신체의 이런 이완과 수축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쁘면 몸이 펴지고, 슬프면 몸이 움츠려든다). 신체가 이완되든, 수축되든,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용은 우리의 본성인 코나투스의 발현이다. 그러나 정념의 상태에서 신체는 수동적이다. 코나투스는 실행되지만, 그 실현은 외부 신체를 통해 펼쳐지는 것. 정념은 우리의 활동능력을 외부 우리의 것, 즉 우리가 아닌 것들을 통해 펼친다. 우리를 우리 활동능력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실행되는 코나투스. (나를 나로부터 분리해서 실행되는 코나투스) 우리는 여기서 우리 본질에 대해 어떤 인식도 형성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정념은 우리 신체를 정립하고, 우리 존재를 긍정하는 실재적인 것을 갖지 못한다. 정념을 통한 코나투스의 실현은 한마디로 상상적 실현이다. (외부의 신체가 주된 원인이 되고, 내가 부분적인 원인다면, 그것은 나를 실현 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 신체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의 소비가 있다. 돈을 소비했다는 것, 돈을 소비함으로써 내가 산 물건과 내가 리듬을 함께 맞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부 신체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돈을 소비한 것이다.)

코나투스의 상상적인 실현은 실재적으로 자기 존재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감정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념을 제어하고 길들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시도는 실패한다. 하나의 감정은 그 감정 하나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감정은 힘이고, 그 힘들의 배치 속에서 사유해야 한다. (감정의 물리학)

우리는 감정의 물리학을 통해 수동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유일한 재료는 정념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념을 넘어서는데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정념밖에 없다. (결핍의 조건을 어떻게 나를 일으키는 조건으로 바꿀 것인가) 정념을 통해 정념을 넘어서기! 감정은 언제나 힘들간의 관계속에 자리한다.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다.” (옳다고 안다고 해도 우리는 감정을 따라 살아간다. 감정적으로 아는 것보다 직접적인 마주침으로 변용이 일어나야한다. 우리가 아기에게 뜨거운것에 손을 데지말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기가 뜨거운 것에 손을 가져가봐서 변용이 일어나야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기쁨을 계속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쁨이 강한 감정임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력하다. (만나서 슬픈 것보다 만나서 기쁜 것 이 더 크면 관계를 유지한다. 아기를 기르는 것도 이와 같다. 아기를 기르고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계속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그 웃음 한 번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아기를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슬픔의 감정의 원인을 찾기 보다는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을 생성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야식으로 치킨을 먹는 것과 같다. 야식으로 치킨으로 먹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만들어야 우리는 야식으로의 치킨을 먹지 않을 수 있다)

기쁨에 대해 좀 더 들어가 보자. 기쁨이 강력한 힘인 이유는 기쁨에는 변이 능력의 증대, 신체의 구성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기쁨은 비록 수동적이기는 해도, 신체들의 합성에서 오는 감정인 것(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 신체가 확장되어 기쁘다), 반면 슬픔은 아무런 신체도 구성하지 못한다. 슬픔은 신체를 구성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무능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의 힘은 인간의 힘과 동시에 외적인 원인(관계를 맺으로써, 근영의 힘+ 정희의힘이 합쳐짐/ 그러면 혼자 집안일 하는 것 보다 둘이 나눠서 하는 것이 덜 힘들다)의 힘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되며, 이에 반하여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의 힘은 오직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만 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전자는 후자보다 강력하다. 수축도니 신체는 아무것도 구성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슬픔을 통해서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는 작더라도 기쁨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사건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의 힘을 증대시켜 나가야 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에 한 발 더 다가설 것이다.

4. 기쁨과 슬픔의 윤리학

정념(수동적 감정)은 맹목적이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정념은 중독된 대상(외부의 대상)에 고착되어 있어 다른 어떤 것과도 시선을 맞출 수 없는 무능력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외부의 시선에 눈을 맞춘다). 우리는 우리 본성의 필연성을 탐색하기보다, 외부 신체를 위해 자신을 작동시키는 일에 바쁘다. 정념은 우리 본성을 넘어서는 과도함이다. 존재의 피곤. (나를 소진시키고, 소모시킨다) 자유인이 정념을 문제 삼는다면, 그것이 자기 존재의 이익에 무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유인이란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의 자연 상태는 자기 존재에 대한 앎을 가지지 못한 상태다. 저념은 우를 자기에 대한 무지, 그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게 한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가치 척도는 코나투스다. 지금 이것이 내 존재에 이로운가. 해로운가. 이것이 내 활동능력의 실재적 실현인가 상상적인 실현인가. 이로부터 나의 변이 능력은 증대되는가, 아닌가. 우리를 점점 더 부분적 원인으로 만드는 수동적 만남들을 멀리하고 우리 자신이 타당한 원인이 되는 만남들을 키워가기. 지금 이 신체를 다른 신체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는 (수동) 관계의 장을 떠나, 이 신체가 다른 신체와 함께 더 큰 신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관계를 창안하기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으로서 기쁨이다.

산화와 부식와 같은 독성인 산소는 수소 두 분자와 만나서 물이 된다. 신체와 신체가 결합되어 공통의 신체인 물이 되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은 분해하면 산소와 수소로 분해된다. 이와 같이 각자 자신의 리듬을 가지고 어떻게 공통의 신체를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해 봐야 하다. 그것은 각자의 신체의 리듬을 이해하고 결합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결합만하려는 모든 시도는 폭력으로 다가간다. 우리는 신체와 신체가 만나서 공통의 신체를 이룰 때 항상 어느 한쪽은 수동이고, 다른 한쪽은 능동으로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산소와 수소가 모두 능동으로 작용하여 공통의 신체인 물을 만들 듯이, 두 신체다 능동적 일 수 있다. 산책하면서 이와 같이 이야기하였다. 스피노자는 조건은 변하며, 변화는 조건의 시간과 공간의 장을 이해하여,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갈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내가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그 시절에 나의 리듬과 같은 리듬을 맞출 수 있는 사람도 항상 변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은 항상 변한다). 그러니 영원한 우정도 영원한 사랑도 없다. 오직 변화하는 내가 있고, 그 리듬에 같이 맞춰서 나갈 수 있는 끓임 없이 변화하는 외부의 신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을 알아도 끓임없는 변화는, 사랑은 쓸쓸하고 외롭다. 그 이유는 산소가 수소를 만나서 물이 되는 기쁨을 경험하고, 자신이 변화하여 다른 원자와 만나서 새로운 공통의 신체를 만드는 상황에서 물이 아닌 다른 공통의 신체를 만들어서 기쁠 수 도 있지만, 물이 아니여서 슬플 수도 있다. 애니 웨이 (즐거웠어 스피노자야 다음에 보자구)


니체 도덕의 계보 [선과 악]

니체의 수업을 하기 전에 선과 악을 읽은 느낌을 이야기하였다.

니체 도덕의 계보를 읽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당위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당위성을 가지는 도덕은 없다. 뭐든지 원래부터 주어진 도덕은 없고 다 역사를 통해서 주어진다. 우리가 다 각각 하나의 개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역사의 상물이다. 즉 도덕에는 역사가 있다. 가치의 전도. 도덕적이라는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것에서부터 태어났다. 가장 순수한 것은 가장 불순한 것에서 태어난다.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만든 도덕이 이타주의이다. 도덕이라는 것이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 시대는 어떤 도덕의 관점의 시대인가?

니체는 1844년 독일에서 태어나고, 1849년 아버지가 뇌질환으로 사망하면서 여자들과 둘러싸인 삶을 살았다 (인성과다). 그리고 1869년 스위스 바젤 대학의 문헌학과의 교수가 된다. 그리스 고전을 연구하였다. 이때 독일의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러면서 눈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만성 편두통까지 시달렸다. 그러면서 1897년 대학을 그만두면서 무국적자의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산책하였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편두통에 시달리면서 앉져서는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산책을 하였다. 산책을 하면서 글을 썻다. 그 글은 하나의 장문이 아니라, 메모 형식의 단문이었고, 이를 재조립하여 책을 내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아포리즘이라는 특별한 하나의 형식을 만들었다. 하나의 장애가 결핍의 대상이 아닌, 조건으로써 새로운 형식의 글을 선사하였다) 1889년 정신의 암흑기를 보내고 1899년 사망하였다 (10년 대운). 니체는 글을 쓰는 기쁨을 느끼면서 살았다.

니체가 살았던 시대는 19세기 중반이다. 산업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막 태동하던 시기이다. 산업자본주의는 분업을 통한 노동력을 통해 상품의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이를 파는 경제 시스템이다. 산업자본주의와 반대되는 말이 상업자본주의다. 물건을 물물교환하여 가격의 낙차를 이용하여, 물건의 사용 가치를 파는 경제시대이다. 상업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의 차이는 사용가치(상업자본주의)를 파냐? 교환가치(산업자본주의)를 파느냐의 차이다. 산업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하는데, 분업을 통해, 관계의 단절을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사용가치를 넘어서는 교환가치에서의 상품을 판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의 단절이 필요하다. 너무 친한 사이에서는 거래가 되지 않는다. 거래가 성립되려면 관계의 단절 및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의 대등한 관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윗사람이 사주는 것은 조금은 당연하지만, 친구끼리는 더치페이가 조금 더 당연하다) 예전에 신분적 관계에서 귀족과 농노에서는 거래가 가능하지 않았다. 귀족이 부르면 농노는 가서 일을 하고, 귀족은 사치와 낭비를 통해서 농노에게 베풀었다. 이들 관계에서 노동력을 팔거나, 물건을 파는 거래가 성립하지 않았다.부르주아들(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위계가 있는 관계에서는 거래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런 위계를 없애고자 했다. 사람과 사람이 대등한 관계에서만 거래가 성립된다. 이에 부르주아는 귀족과 농노의 신분제를 격파하는 시민 혁명을 일어나게 된다.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키면서, 관계를 깨는 작업을 가치를 전도 시켜 평등이라고 하였다. (상업자본주의 와 산업잔본주의 차이 정리 및 사고의 필요)

그래서 개인은 근대의 탄생물이다. 우리 교실에서 21명의 사람이 있다. 이렇게 21명이라고 셀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셀 수 있는 개인이 축군 본능이다. 개인의 전제는 다 똑같다는 조건이다 (예를 들면 11). 개인이라는 말은 동질적인 인간을 전제한다. 산업자본주의체제에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개인이다. 이렇게 거래()을 통해 자신은 다른 이들과의 차이를 일으킬 수 있다. 돈으로 자신을 차유할 수 있는 방식이 산업자본주의이다. 니체의 선과 악에서 귀족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고귀한 이라는 단어와 동일하다. 귀족적이라는 것은 존재적인 차이가 있는 개인이다.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 가능한 사람들이다. 구별가 능한 인간이 귀족적이다 (나폴레옹은 말더듬이인데, 자신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기 위해, 연설할 때 더 말을 더듬는 것과 같다). 귀족적이라는 것은 평범하다는 것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나쁜 것이고, 이는 구별이 불가능한 인간이다. 평범한 인간은 서로가 비슷하고 존재적인 특징이 없다.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면 빠름과 느림이 구별되지 않아, 운동과 정지의 비율도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 귀족과 반대되는 노예라고 이야기 하였다. 평범하다는 것은 표준화 되었다는 것이고, 이는 거래가 가능하다고 이야가하는 것이다. 너트와 볼트와 같은 부품이 규격화 되어야지만 거래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귀족적 인간간과 노예적인 인간으로 넘어가는 시대 사이에 니체가 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평범하게 만들고, 개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간의 관계를 분절 시키고, 단절 시키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를 미워하게 하면 된다. 그래서 니체를 관통하는 단어가 원한감정이다. 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되는가. 부산행은 감독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인 사랑은 단백질에는 치킨을 시켜먹는 백수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이 먹는 치킨집의 사장은 닭이다. 어느 날 백수들이 치킨을 시키고, 닭 사랑이 배달을 오는데 우는 것이다. 왜 우냐고 물어보니 닭 사장이 자신의 아이를 튀겨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자신, 부인 그리고 다른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아이 중 하나를 튀겨온 것이다. 자신과 나머지 가족들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아이를 죽여서 튀겨서 팔아야 하는 시대이다. 우리 부모들이 돈을 벌면서 느끼는 아픔을 자식에게 주고 싶지 않지만 결국에는 또 똑같이 돈을 벌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지금의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돈의 노예와 같은 방식으로 똑같이 살자고 자기 자식을 내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테가 그린 지옥에는 지옥을 지키는 파수꾼이 없다. 이것이 지옥의 핵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나가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선과악을 읽을 때, 관계의 단절을 일으켜 거래 가능한 개인으로 만드는 원한 감정의 시대, 그리고 구별가능한 귀족적 삶이 아닌 구별 불가능한 노예의 삶으로 넘어가는 산업자본주의 시대,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 다시 선과 악을 읽어보자. (반가워 니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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