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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공자스쿨2기 청공 2기

청공 2기 4학기 4주차 후기

게시물 정보

작성자 성아 작성일19-02-04 21:57 조회4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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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주차 수업 1교시에는 마지막 양자역학 수업이 있었다. 양자역학이 연구되기 전, 과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물질은 입자 혹은 파동으로 구분이 되며, 둘은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의 경우, 간섭과 회절을 하는 등 파동의 성질을 분명히 띄고 있으면서도, 입자라고 가정을 하고 수학 공식을 정리해도 맞아 떨어지는 결과가 나온다. 입자인가, 파동인가? 빛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중 슬릿 실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실험 조건이 조금씩 달라질 때마다 빛은 입자적 성질을 드러내기도 하고, 파동적 성질을 드러내기도 했다. 질문이 달라질 때마다 빛이 다른 답을 내놓은 것이다. 우리가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 즉 관찰을 하기 전까지 빛은 입자인지 파동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다. 과학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냥 신기하네, 수수께끼 같네 하고 관조했지만 당시 과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발견이었을 것 같다. 그 당시 과학계의 거장인 아인슈타인이 의외로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에게 신을 표상하는 빛은 반드시 절대적인 존재여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양자역학이 얼마나 파격적인 분야인지가 새삼 느껴졌다. 

     또 양자역학 연구를 이끌었던 보어라는 과학자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었다. 그는 그가 제시한 원자의 모형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배짱 있게 '일단 그렇다고 치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고, 결과적으로 양자역학이라는, 도무지 말이 안 되고, 이해할 수 없는 분야를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철저한 논증을 좋아하고 가치롭게 여긴 슈뢰딩거는 보어와의 대화에 너무 지친 나머지 물리학계를 아예 떠나기까지 한다. '말이 안 되는 부분'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나름의 해소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지점에 머물러 계속 궁리하고 있는 것이 보다 지적이고, 심지어는 책임감 있는 자세라고 생각했었는데, 보어와 슈뢰딩거의 사례를 통해 때로는 과감하게 '그렇다 치는' 태도도 필요한 것 같다고 느꼈다.


     수업 2교시에는 1957년도에 쓰인 <여름으로 가는 문>이라는 SF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세실 언니와 내가 발제문을 제출했는데, 읽은 직후 연락을 주고 받을 때 나눴던 감상은 상당 부분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신기했다. 세실 언니는 주인공 맘에 안 들어, 하는 1차적인 감정을 '일단 그렇다고 치고' 흘려보낸 후 그와 감정의 교류가 발생한 지점을 찾아냈다. 그에 비해 나는 '주인공 맘에 안 들어, 나아가 이 소설 억지스러워'라는 감상에 지배되어 그 비판점에 대해서 논증하는 발제문을 써냈다. '이해가 안 된다'는 감상이 가장 크게 일어난 이상, 이를 무시한 채 다른 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라는 당위도 마음 속에서 올라왔다. 그러나 세미나 시간에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거치면서 이전과는 달리 사람을 믿게 된다는 설명을 들으니 내가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포착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꼭 캐릭터에 집착하지 않고 1957년이라는 과거에 묘사된 과학 기술이나 SF적 설정을 그냥 흥미 있게 읽어내려도 됐을텐데, '나는 이 캐릭터와 작가가 이런 점에서 싫어'라는 감상이 일종의 도덕적 당위로 비화되고 나니 그런 지점이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줄자쌤은 발제문을 읽어봤을 때 내가 SF적 소양이 없는 사람인 점,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굳어버린 점이 드러난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교시 수업 내용과 연관지어 보자면, (이것도 과분한 평가지만) 나는 차라리 슈뢰딩거처럼 가능한 한 논증하고, 가능한 한 짚고 넘어가는 것이 당위적으로 온당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번주 내 모습을 돌이켜 보니, 내가 그런 자세를 고집한 것이 이질적인 무언가가 나를 변형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자기 보존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고집이 세고 변화에 약한 무토 일간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된다. 앞으로는 낯선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당위와 논리를 앞세우는 비장한 태도 대신 유연하고 말랑한 마음으로 임한다면 오히려 내 답답하고 메마른 세계를 돌파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3교시에는 마지막 니체 철학 수업이 있었다. 변화와 전복, 길 위의 삶. 그 동안 내게 마냥 긍정적으로 다가온 관념이지만, 니체가 말하는 '생성'은 나의 막연한 직관과는 달리 긍정적인 가치의 지속을 내포하지 않는다. '생성'에 앞서, 긍정과 부정, 선악을 막론하고 모든 것이 소멸한다. 소멸 없이는 생성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소멸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자기직면을 택하는 대신 자기보존의 욕구를 떨친다. 

     또, 이번 시간에는 '힘의 고양'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배웠다. 니체는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려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라고 파악했고, 그를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번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적 고양을 위해 노력한다. 두번째는 상대방의 존재를 끌어내려서 비교 우위를 점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연민하고, 본심과 어긋나는 친절을 베풂으로써 힘의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적 질서가 탄생하기 전에도, 원시 부족 간에 서로 더 큰 선물을 주면서 자기 부족의 막강함을 과시하는 관례가 있었다고 한다. 선물의 규모가 너무 커진 나머지 나중에는 결국 아주 귀중한 선물을 폐기하고, 작은 규모의 선물부터 다시 돌리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버려지는 귀중품이 너무 아까울 따름이지만, 그것이 당시 원시 부족에게는 역설적으로 아주 실용적인 필요에 따른 행위였던 셈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서려는 현대의 우리와, 원시 사회에서 선물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고 했던 부족장들이나 힘의 고양을 위해 같은 전략을 쓰고 있다. 자본주의든, 선물을 주고 받는 풍습이든, 사회를 작동시키는 제도는 항상 남과의 경쟁을 통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방식을 차용한다. 따라서 존재적 고양을 위해선 제도 밖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근영쌤이 강의하신 양자역학과 니체 수업이 이번주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낯설면서도 자꾸 마음이 가는 내용이라 이별하기 아쉬웠는데, 이 수업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미흡하게나마 배운 내용을 정리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인 것 같다. 다음 주에는 1교시에는 동의보감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는데, 어떤 지점에서 새로운 충돌이 발생할지 예상할 수 없다. 2교시에는 정화 스님의<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를 읽고 세미나를 진행할 것이고, 3교시에는 니체에 대해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랩 낭송을 구성해보게 될 것이다. 다음주 수업도 기다려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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