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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내 사유의 한계를 탐험하는 한편의 추리소설이자 SF입니다. 자신의 경계를 탐험하고 돌파하기! 글쓰기 강학원에서는 읽기와 쓰기의 초식을 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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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8품에서 14품까지 후기

게시물 정보

작성자 푸른달 작성일17-08-08 13:56 조회178회 댓글2건

본문

8월 6일에는 유마경의 8품부터 14품까지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유진(有盡)과 무진(無盡)이란 무엇일까요?

“선남자야, 보살들의 해탈법문이 있으니, 이름하여 ‘다함이 있는(有盡) 해탈법문과 다함이 없는(無盡) 해탈법문’이라 한다. 그대는 이를 공손히 받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그러면 다함이 있는 것과 다함이 없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다함이 있는 것은 유위(有爲), 즉 생멸이 있는 법을 말한다. 다함이 없는 것은 무위(無爲), 즉 생멸이 없는 법을 말한다. 보살은 유위를 다해서도 안 되며, 마찬가지로 무위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222)

부처님께서는 다함이 있는 유위과 다함이 없는 무위 모두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9품의 ‘둘이 아닌 법문’은 이 유위와 무위를 함께 추구하는 수행의 방법을 내용뿐 아니라 그 구성으로서 잘 보여줍니다. 유마힐은 먼저 불이(不二)의 법문에 들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살들에게 묻고 31명의 보살들 각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들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생사의 소멸이 없다는 깨달음, 나와 내 것이 없다는 깨달음, 유죄와 무죄가 없다는 깨달음 등 불이의 구체적인 사례로 불이를 실천하는 31가지의 방편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수사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이 말한 내용은 모두 훌륭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대들의 설명에는 여전히 둘이라는 낱말이

남아 있습니다. 만약 보살이 일체 모든 법에 대해 말하거나 설할 것도 없고 명시하거나 가르칠 것도 없다면, 온갖 어리석은 논쟁을 벗어나고 모든 분별도 끊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189)

문수사리는 앞서 보살들이 제시한 방편들은 모두 훌륭했으나 그들이 분별하지 않기를 말하면서 여전히 분별의 언어에 기대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보살의 방편들이 분별의 집인 언어를 버리고 ‘공’을 추구해야 비로소 불이의 법문에 들어설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서른한 번의 꽉 찬 노력들이 문수사리의 서른두 번째의 시도에 이르러 정상에 도달한 듯합니다. ‘불이를 다함’의 정점에서 방편의 언어들마저 분별임을 지적한 문수사리를 통해 우리는 이것이 결국 불이의 깨달음의 결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다면 과연 유마힐은 무슨 방편을 제시할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묻습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 말합니까?”

유마힐의 대답은 침묵이었습니다.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것을 놓는 순간 드러납니다. 31명의 보살들의 언어적 분별을 지적하여 이 모두를 버릴 것을 말한 문수사리 역시 언어 속에 머물며 그 깨달음 속에 여전히 분별을 붙들고 있음은, 역설적으로 유마힐이 언어라는 방편을 놓는 순간 드러납니다.


그러나 유마경은 불이로의 깨달음에 유위에서 무위로의 방향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부처님께서 유위를 다해서도 안되며 무위에 머물러서도 안된다는 말씀에 답하듯 이야기의 구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이는 유마힐의 침묵에 대한 문수사리는 논평으로 드러납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보살은 이렇게 불이의 법문에 참되게 깨달아 들어갑니다. 그 속에는 언어나 문자에 의한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189-190)

이렇게 유마힐의 무위적 실천은 문수사리의 유위적 실천 즉, 침묵을 불이를 행하는 연기(緣起) 위에 올리고 이를 무위의 방편으로 인정하는 것을 통해 가치가 드러납니다. 먼저 32명 보살들의 다함(有爲)이 모여 팽팽한 힘의 장력들을 만들어 내고 그 힘들은 역설적으로 유마힐의 무위로 드러나며 다시 유마힐의 침묵은 문수사리의 유위에 의해 빛이 납니다. 유마힐의 침묵 전후로 보살들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그의 침묵이 무위의 실천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때의 침묵은 말 그대로 분별심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저 글자 그대로 ‘(할) 말 없음’으로 읽혔을지 모릅니다.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것이 놓인 맥락과 주변의 관계망을 통해서라는 연기의 원리에 비춰볼 때 침묵이라는 동일한 현상도 그것이 주변과 맺는 관계의 인연 속에서 끊임없이 재 규정될 것입니다. 보살들과 문수사리가 유마힐과 만들어낸 연기의 장 속에서 그들의 노력은 각각 유위와 무위의 방편으로서 빛나게 됩니다. 마치 흰색이 도드라지려면 주변에 검은색이 있어야 하거나 이와 반대로 주변이 온통 새하얗다면 검은색이 더욱 빛을 발하듯 유위와 무위는 서로가 순환하는 가운데 그것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유마경은 유위와 무위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끊임없는 순환의 운동에서 에너지를 내고 있음을 그 내용과 탁월한 구성으로서 시현하고 있습니다.

유마힐의 침묵’에서 보듯 어떤 현상은 그것이 원래 갖는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그 현상이 놓인 맥락과 주변의 관계망을 통해서 규정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침묵이라는 현상은 그것이 주변과 맺는 관계의 인연 속에서 끊임없이 재 규정되므로 우리가 침묵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라 여겨왔던 것, 즉, ‘말(언어) 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어떤 것’이라는 개념은 유마힐의 침묵을 통해 완전히 해체되며 유마힐의 침묵의 순간 말보다 더 언어적인 어떤 것으로 새롭게 정의됩니다. 따라서 이 순간 침묵은 말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둘이 분별없이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침묵은 말과 반대되는 것이 그것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을뿐더러 더 이상 침묵이라는 현상을 그것 자체만으로는 특정한 방향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만물은 연기에 의해 유위와 무위를 순환하기에 연기 없이 만물은 그 자체로 ‘공’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대승경전의 가르침을 설파하고자 하는 유마경의 역사적 배경에서 9 품을 이해할 때, 문수사리로 대변되는 아라한이 ‘자신의’ 깨달음을 완성하는 유위에 머무름을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속세를 떠나 개인의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은 유위의 단계는 반드시 무위의 단계에서 중생과 더불어 그들을 깨우치게 하는 것으로 다시 출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대승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위와 무위 속에서 나의 깨달음을 중생들과 나누고 그들도 함께 깨닫게 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붙여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말씀 정리합니다.

*

유마경에는 여러 세계들이 등장합니다. 중향 세계, 사바세계 묘희 세계 등등 여러 세계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별과 위계가 있는 건가요?

세계를 구조적으로 나누어서 공간성을 부여하는 것은 대승불교 때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합니다. 특히 공간의 구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이고 또한 인도에서 여러 신들과 더불어 부처님을 하나의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생겨나면서 부처님이 계시는 불국토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구분 짓는 것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구조적인 구분은 확연히 있는 것처럼 느껴짐에도 내용적인 측면에서 불국토는 우리의 마음장에 따라 바로 여기가 될 수도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 땅은 청정하지만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34)

한량없는 중생이 동일한 불국토에 태어나지만, 그들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냐 더러우냐에 따라서 불국토를 보는 데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그 즉시 이 땅이 한량없는 공덕의 묘한 보배로 장엄되어 있음을 볼 것이다.” (36)

우리는 줄곧 내가 있는 환경에서는 도저히 이런 경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온갖 번뇌가 작용하는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라야 비로소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불법이 생장”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처한 환경은 도저히 불국토가 될 수가 없는데 여기서 뭘 하라는 거지? 라는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것이 마음을 내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변명에 다름 아님을 우리는 유마힐을 통해 배웁니다. 그것은 유마힐이 지닌 독특한 위치에서 비롯되는대요. 유마힐은 보통 사람입니다. 즉 속세를 떠나서 깨달음을 얻는 자가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일상에서 모든 혈연의 관계들을 비롯한 속세의 모든 조건들이 다 존재하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 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한 자라는 것이 그의 독특함이며 또한 우리와의 유사점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런 불교의 방편들을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면 내가 놓인 그 지평에서 나는 어떤 부자가 될 수 있을까? 가난하다면 그 상태에서 어떻게 동일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직장인이고 그것이 너무 괴롭지만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지반 위에서 나는 어떤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로 질문을 해보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결국 유마힐이 말하는 길 아닌 길을 따를 때 비로소 온갖 불법을 성취하는 길을 따르는 것(163)이 될 것입니다.


*

불심을 내면 과거를 바꿀 수 있다!?!! 너무 놀라워 믿기 어려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제까지 살인자였던 내가 오늘부터 보살로 살게 되면 내 과거는 더이상 살인자의 과거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매우 간단한데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오늘 내가 보살로 살겠다는 마음을 냄과 동시에 새로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면 어제의 살인의 추억들은 어제까지의 나의 추억일 뿐 결코 ‘오늘’ 나의 추억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업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자의 업은 더 이상 내 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회나 제도에 의한 업(형벌과 같은)은 오겠지요. 그러면 그것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그것을 받는대에 있어서 나는 아무런 마음의 번뇌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면 그는 정말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고 그의 과거는 이미 바뀐 것이 되겠지요. 보이지 않아 과거를 바꾼다는 기적 믿기 어렵지요? 기적이 보여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기적은 믿는 사람에게만 온다고 하네요. 오늘 내가 바뀌었다면 어제의 나는 오늘 나의 과거가 아닙니다. 불심으로 믿어 보십시다.


* 소화하려면 수행해야.

아직 ‘번뇌를 끊고 바른 성품에 들어 생을 벗어난 경지에 들지 못한 자가 이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바른 성품에 들어 생을 벗어난 뒤에라야 비로소 소화됩니다. 아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자가 이 음식을 먹으면 욕망을 벗어난 뒤에라야 비로소 소화가 됩니다. 아직 해탈하지 못한 자가 이 음식을 먹으면 마음의 해탈을 한 뒤에라야 비로소 소화가 됩니다. (217)

내 마음속에서 해탈을 해야만 먹은 음식이 소화가 된다. 해탈을 하려면 수행을 해야겠지요. 수행을 해서 해탈의 경지에 오르면 비로소 소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음식도 소화하고 책도 소화해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이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니까 책을 소화시키려면 내용을 몸 안에 넣고 그것을 나의 수행을 통해 소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어쩌면 내가 수행하지 않고 ‘먹기만 한 책들’... 소화가 안 되었으니 몸 안에서 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어떤 책을 읽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수행’을 통해 소화를 시켜 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불교의 만다라는 유위, 무위, 그리고 공에 이르는 불교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너무나 잘 표현한 행위예술입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가 아니라 어쩌면 공든 탑일 수록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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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8월 13일)에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읽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읽기 범위는 한 권 전체이구요. 문리스 선생님께서 특히 재미를 강조하셨는데 비교 대상이 유마경입니다. 적어도 기준이 과학혁명은 아니니까요. ㅎㅎ 불심(×) 문심으로 믿어서 소화의 기적을 ㅎㅎ


다음주 간식은 영순샘이시고 + 문리스 샘의 떡 협찬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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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문리스님의 댓글

문리스 작성일

와!!! 생생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거죠? 멋진 정리+후기입니다. 후기계의 불이법문! 더 이상의 댓글은 무용하니 이제 침묵으로! ^^

까망닭님의 댓글

까망닭 작성일

동감.. 감사... 그러나,
침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