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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2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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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risa 작성일17-07-29 15:43 조회3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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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2주차 후기

 박주영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과학과 관련된 책이라지만, 패러다임 등 개념들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과학이라면 정의가 명료하고 수식과 기호 등으로 정리가 가능할 것이라는 나의 선입관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과학에 대한 책이기에 주장의 근거가 되거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예시들은 과학적 지식이 거의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책은 어쩌면 일반인들보다는 과학자들에게 과학관과 과학에 대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책일지도 모른다. 과학의 언어로 설명되었기에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쿤이 말했듯이 과학은 너무나 전문화되어 과학자 사회는 일반인과 일상 생활의 요구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과학자는 대중의 관심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공유하는 청중인 동료들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주차 시간에는 <과학혁명의 구조>의 후반부(9: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10: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11: 혁명의 비가시성, 12: 혁명의 해결, 13: 혁명을 통한 진보, 후기)를 읽고 토론했다. 이 책의 목차는 과학자가 쓴 책답게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이었지만, 각 장의 내용은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여러 주제에 대해 토론했으나 이 중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칼 포퍼의 반증 vs 쿤의 패러다임  

  칼 포퍼와 토마스 쿤 둘다 절대불변의 과학적 진리는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설명하는 방식은 달랐다. 포퍼는 반증(falsification)’을 들어 과학적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은 절대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반증 가능성에 있다. 반증 가능성이란 모든 과학에 대해 반증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반증을 통해 기존 과학에 오류가 있음을 밝힐 수 있고 잘못된 지식은 제거돼 간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고 누적되면서 과학은 진리를 향해 진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개념을 들어 과학 지식이 누적적으로 진보한다는 칼 포퍼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은 비연속적이며 혁명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패러다임 전환은 반증을 통해 정상과학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패러다임 사이의 경쟁은 증명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혁명기에는 패러다임, 즉 대전제가 변하는 것이므로 증명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증명은 패러다임 내에서 작용하는 조건, 규칙 등에서 가능하다. (예를 들면, 질량이라는 개념을 뉴턴은 보존되는 것으로 사용한 반면, 아인슈타인은 에너지로 변환 가능한 질량으로 봤다.) 그렇기에 어떤 과학적 진리는 패러다임 내에서 성립이 되는 것이며, 각 시대마다 패러다임과 그 안에서 인정되는 과학적 진리가 있었다. 즉 과거의 과학, 예를 들면, 천동설이 과학적으로 비합리적이고 의미가 없다는 것은 현재 작동하는 패러다임의 눈으로 보는 의견일 뿐이다. 중세과학의 패러다임으로는 천동설은 의미있는 과학적 원리이다.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vs 번역

  공약불가능성은 동일표준상 비교 불능성을 의미한다. 상이한 패러다임 내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그들의 연구를 수행하며,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그들은 같은 방향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이 기분내키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두 그룹이 보고 있는 세계와 대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영역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며, 또 서로 다른 관계에서 이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이한 패러다임 내 과학자들은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것인가? 초기에 쿤은 이에 대해 이들은 대화단절을 겪게 된다고 했다. 이들 사이에서 충분히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려면, 한 그룹 또는 다른 그룹이 우리가 패러다임 변동이라 불러온 개종(conversion)을 거쳐야만 한다고 했다. 이는 논리에 의해 또는 가치중립적 경험에 의해 한번에 한걸음씩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게슈탈트 전환에서와 같이 일시에 일어나거나 전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개종되고 나면 보는 것이 달라지고 기호, 개념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예전 세계와 단절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즉 소통을 하려면 개종이 필요한데, 개종하면 단절될 수 밖에 없는 역설. 그러나 쿤은 후기에서 번역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번역은 대화 단절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견해가 안고 있는 가정과 결함이 무엇인가를 대리해서 경험하도록 한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번역은 설득을 위하거나 개종을 위해 양쪽으로 막강한 수단이 된다고 했다. 기술적으로 한 과학자 사회의 언어로부터 다른 것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고 했는데, 언어를 단순히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낯설은 언어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다. 쿤도 이에 대해 확답을 내린 것 같지는 않다.

 

  이 밖에도 우리는 왜 과학을 누적적으로 진보되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즉 혁명의 비가시성(The Invisibility of Revolutions)에 대해서도 얘기 했는데, 토마스 쿤은 권위의 원천으로 교과서를 모델로 한 대중서적들과 과학교과서를 지목했다. 교과서는 당대의 과학적 언어의 어휘와 구문을 전달한다. 교과서는 정상과학의 영속을 위한 교육적 수단으로서 언어, 문제구조, 정상과학의 기준이 달라질 때마다 그에 따라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다시 쓰여진다. 즉 교과서는 과학혁명을 거칠 때마다 바뀌고, 이렇게 새로 쓰인 교과서는 필연적으로 이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가려 버리는 것이다. 매번 다시 쓰임에 따라 과학은 대체로 축적적으로 진보한 것처럼 보인다. 교과서나 이에 기반한 책들은 현재의 패러다임 안에서 합리적으로 보이는 과학적 진리들을 위주로 언급하기 때문에 우리가 잊어버린 과학, 즉 정상과학에서 배제된 과학도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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